현재 논의의 초점은 조달 시장의 개방 과정에서 절차상 문제다. 이를 두고 정부와 국회가 공방을 벌이고 있다. 또 조달협정 개정을 통해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철도 분야 개방과 철도 민영화 가속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논의에서 더 나아가 이번 사안은 김영삼 정부 이후 어져 온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GPA, 공기업 역할 축소시키기 위해 등장"한 것이라는 정부의 설명 자료들
우리나라는 1994년 4월 WTO GPA에 24번 로 가입했고, 1997년 1월 1일부터 협정 적용을 받고 있다. 이 협정의 핵심인 개방 대상을 정하는 양허 협정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시작됐다.
정부조달이란 정부가 고유의 업무 수행을 위해 소비 및 투자 등 경제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물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반 기업의 '구매부' 역할을 하는 게 조달청이다. 지난해 기준 한국 조달 시장 규모는 100조 가량으로 GDP의 8%에 달한다. 이같은 광범위한 시장을 개방하는 것이 GPA의 목적이다. 코트라의 '유럽 공공 조달 시장 동향'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EU 정부 조달 시장 규모는 2조4000억 유로(한화 약 3456조 원)로 EU GDP의 19%에 달한다.
2001년 한국전자통신원(ETRI)가 낸 'WTO 정부조달협정과 공기업 민영화'라는 보고서는 이 협정의 성격을 잘 규정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GPA의 목적과 관련해 "세계적으로 공기업이 확산되는 가운데 공기업의 조달 문제를 축소하고 세계 무역을 보다 자유화하기 위한 배경으로 탄생"했다고 분석한다.
GPA 협정 자체가 공기업의 민영화 촉진을 가속화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또한 공공성을 강화하는 흐름을 경계하고 전 세계적으로 정부 주도하에 움직이는 수천조 원 규모의 조달시장에 민간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을 촉진시킬 목적을 갖고 있다.
협정이 발효될 경우 가장 크게 변화하는 부분은 강제적 분쟁 조정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GPA역시 다른 자유무역협정들과 마찬가지로 특정 정부가 자국의 조달시장에 규제를 가하는 것을 국제분쟁화시킬 수 있다. 선출된 정부의 자율적 결정을 침해하는 것을 본질적 성격으로 두는 셈이다. 이는 9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흐름과 맞물려 있으며 WTO 체제의 기본 합의 사항이다.
<나라경제> 2005년 5월호에 실린 '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 협상'이라는 보고서는 정부가 조달시장 개방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정부 조달은 정부 기능 수행을 위해 필요한 물품 및 서비스를 조달하는 기능 뿐 아니라 중소기업 보호, 지역 균형발전, 전략 산업 육성 등 다양한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각국 정부가 다자무역규범의 핵심 원칙이라고 할수 있는 무차별대우 의무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 수단(국산 우선 구매, 국내 공급자에 대한 특혜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유지하고자한 결과 정부 조달 분야가 아직 국제 무역 자유화에 있어 주요한 장벽의 하나로 남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정부 조달의 특수성에 따른 정부의 배타적 태도가 자유무역의 장벽이 되고 있다는 논리다.
앞서 언급한 두 보고서는 이처럼 정부조달의 기능과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GPA의 목적 또한 정확히 분석하고 있지만, 결국 "무역 장벽을 없애기 위해 GPA에 조달 시장 접근성을 강화하도록 우리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를 급속하게 흡수한 관료들의 전형적인 태도다.
'정부조달'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통제에 갇혀 있는 '알짜배기 시장'을 개방토록 하는 것은 민간 자본에게 구미가 당기는 일일 수밖에 없다. 정부 관료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협정에 적극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결국 민영화와 맞닿아 있는 논리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과거에는 '민영화는 좋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게 주장했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지만, '민영화'에 대한 인식만 바뀌었을 뿐이다. GPA는 오히려 양허 대상 기관을 더 늘린 상태에서 발효를 위해 정부가 발벗고 뛰고 있는 상황이다.
김익태 변호사는 "큰 틀에서 조달 시장을 개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다른 국가나 자본이 국내 정책에 개입하는 효과가 나올 것"이라며 "발효가 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국민들이 체감을 하지 못하겠지만, 5년 정도 지난 후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 세계 최고 수준의 철도 회사인 프랑스 알스톰의 홈페이지. 각종 최신 철도 서비스 상품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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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철도 기업 들어오면 한국 철도 산업 '종속'될 것"
철도의 경우는 국민 재산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생활과 밀접한 분야이기 때문에 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27일 박근혜 정부가 국회에 알리지도 않은채 '밀실 재가'를 한 후 인터넷 검색어 상위권에 '철도 민영화'가 포진한 것은 철도 민영화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관심도를 입증한다.
그러나 철도 조달 시장 개방의 여파는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외국에 비해 한국 철도 산업이 처한 현실은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경쟁을 통한 효율성 확보'를 달성하기에 지나치게 초라한 상황이다. 철도 차량 분야만 따지더라도 현대로템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5%에 불과하다. 캐나다의 봄바르디에, 프랑스의 알스톰, 독일의 지멘스가 전 세계 50%의 점유율을 갖고 있다.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이같은 회사들이 우리 나라의 신호기, 철로 등 공공 조달 시장에 뛰어들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지난 21일 정의당 박원석 의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연맹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이번 정부조달협정 과정에서 정부는 800~1000억 달러의 세계 조달시장이 열리게 돼 한국 기업들(철도 기업 포함)에게 큰 기회가 열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현실을 벗어난 장밋빛 전망"이라고 주장했다.
박 연구위원은 "철도 산업의 특성상 철도 분야 진출 기업들은 건설 계약 단계부터 신호, 통신 시스템 등을 포함하는 '턴키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추세"라며 "단순히 시설을 건설해서 운영 주체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도 시설의 특성상 외국 기업의 진출은 장기적으로 그들의 사업을 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초의 선점 기업이 채택하는 운영 방식(신호, 제어 전기)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철도시설공단 일반철도 조달 분야만 개방해도 기술력이 뛰어난 유럽 기업의 대규모 진출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박 연구위원은 "일반철도 시설 분야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외국 기업은 경쟁력이 부족한 한국의 기업들을 도태시키거나 외국 기업에 종속된 하청 기업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며 "시간이 흐르면 원천기술능력이 없는 한국 기업이 물러나고 외국 기업이 한국 철도에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고, 결국 시설공단이 담당하는 고속철도 건설 분야까지도 자연스럽게 진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 조달 정책의 원래 목적인 중소기업 보호 및 육성 등을 달성하기 힘들어질 뿐더러, 오히려 외국계 철도 회사에 대한 의존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철도 조달시장의 개방이 공공 시스템의 약화와 함께 민간 통제가 강화되는 '민영화'의 물꼬를 틀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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