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현실은 쓰리다. 그러나 결국 음악에 대한 열정은 포기할 수 없다. 음악인의 고충을 담은 '알 수 없는 작곡가'를 부른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는 "오늘 공연과 참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명 생활을 하다가 처음 공중파 매체에 제가 소개된 게 EBS <스페이스 공감>"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공연을 할 수 있도록 <공감>이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스페이스 공감>은 선우정아를 비롯한 많은 뮤지션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다. 예쁘고 잘 생긴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도, 대형 소속사에 있지 않아도, 음악만 좋으면 출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2004년 첫 방송 이후 <공감>은 2200회가 넘는 무료 공연과 1000회분의 방송을 했다. 그 사이 다양한 장르와 뮤지션들을 선보였다. 재즈·보사노바·로큰롤·스카 등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소개했고, '무명을 떨치던' 국카스텐과 장기하와 얼굴들 그리고 로큰롤라디오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신인들을 발굴했다.
그런데 지난 세밑, <공감> 제작진에게 우울한 소식이 들려왔다. 사측이 매주 4~5일씩 열던 무료 공연을 2일로 축소하고 제작진을 줄이기로 한 것.
제작진뿐 아니라 뮤지션들과 그들의 음악을 아끼는 팬들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반대 목소리가 퍼질 무렵, 베이시스트 최은창이 SNS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공감>이 축소되는 것을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에게 소중한 무대였다는 것을 한 번은 표현하고 싶다"며 "음악 하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하자"는 것.
방법은 자선 공연이었다. 뮤지션들은 연주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서울 홍익대학교 인근에 있는 공연장 벨로주는 무료 대관으로 힘을 보탰다. 그 외 많은 이들이 행사 도우미를 자청했다. 12일 열린 '공감을 지켜주세요' 공연은 이처럼 온전히 <공감>을 사랑하는 이들이 만든 공연이었다. 호응도 좋았다. 110석 규모의 좌석을 훌쩍 넘은 150여 명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가운데)의 '공감을 지켜주세요' 공연 모습. ⓒ안재경 |
"인디 붐 진원지 <공감> 축소, 시민에게도 큰 손실"
다채로운 음악을 소개하는 <공감> 취지에 맞게 이날 뮤지션들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무대를 꾸렸다.
브라질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나희경(보싸다방)은 보사노바, 허소영·말로는 재즈, 선우정아는 재즈·소울·록·레게 등 여러 장르를 오가는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 말로는 이날 국내에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희귀 재즈 음악을 공연해 주목을 받았다. 이들 뮤지션들은 관객들에게 자신과 <공감>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공감>을 지킬 수 있게 공연 소식을 널리 퍼뜨려 달라"고 했다.
지난해 <공감>에서 '헬로루키'에 선정된 로큰롤라디오는 "<공감>은 사회적으로 많은 이바지를 하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프로그램이고 저희에게도 감사한 프로그램인데 (EBS 측이)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문화에 대한 권리를 찾기 위해 모인 만큼, 이 공연을 통해 문화의 힘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장을 찾은 정지혜(27) 씨와 정시은(26) 씨는 "평소 함께 <공감> 공연을 자주 찾았었다"며 "오늘은 자선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호평했다. 이들은 "인디음악 붐이 이 프로그램에서 시작했고, 세계적 수준의 공연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축소한다면, 관객과 시민들 입장에서도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공감> 전·현직 제작진들도 함께 이날 공연을 관람했다. 프로그램 초기 제작을 맡았던 백경신 PD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본 오늘 공연은 <공감>에서 볼 수 있는 공연들을 압축해서 보여준 순결한 무대였다"며 "오늘 공연만으로도 <공감>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민정홍 PD는 "<공감>이라는 프로그램이 제작진, 혹은 EBS만의 것이 아니고 수많은 음악인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민 PD는 사측의 통보 이후 상황에 대해 "내부 설득 작업 중"이라고 전했다. 그는 "SNS 등에서 축소 반대 여론이 일어나면서 제작진들도 정식 절차를 밟아 사측에 의견을 전달하고 경영진 측도 여러 상황을 보고 숙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조만간 결정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민 PD의 인터뷰 이후 하루도 안 돼 낭보가 날아들었다. 사측이 다시 주 5회에서 4회 공연으로 결정한 것. 원상복귀까지는 아니지만 주 2회로 축소될 뻔했던 데 비하면 다행인 일이다.
▲ 록 그룹 로큰롤라디오의 공연 모습. ⓒ나승열 |
"박근혜, '강남스타일' 언급 말고 문화 정책 뭘 하나"
결국 EBS의 <공감> 축소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12일 모인 공연자들과 관객들은 <공감> 축소 논란은 정부의 부실한 문화 정책이 불러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에선 현 정부의 문화 정책에 대한 성토대회가 열렸다. 뮤지션들은 이번 사태가 EBS만의 문제가 아닌 방송 전반에 퍼져 있는 시청률 지상주의, 정부의 문화 정책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했다.
오히려 'EBS는 그동안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EBS가 KBS나 MBC에 비해 훨씬 높은 출연료를 주면서 주 4~5회 공연을 해왔기 때문에 축소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힘들다"며 "출연료를 적게 받아도 좋으니 공연 횟수를 줄이지만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사태를 공론화하려고 한 이유에 대해선 "매스미디어가 시청률에만 의존해 대중음악을 일부 아이돌 가수 중심으로 왜곡해 다루는 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EBS에만 촉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창조경제 사례로 얘기한 거 말고 문화 정책이 없다. 정부의 문화 정책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객 조헌태(27) 씨는 "<공감> 공연을 축소시킨다는 건 음악 팬들과 공감하지 않겠다는 얘기"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당시 문화 산업을 발전시키겠다고 했지만 이것은 문화 축소나 다름 없고, 팬들은 이러한 현실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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