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포용할 필요성을 (부시) 대통령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손으로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으면서 '이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ive he is!)'이라고 말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부시는 프리처드에게 김대중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프리처드는 밤샘 작업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부시에게 보고했지만, "대통령의 시각을 바꾸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때 나는 부시 대통령이 취한 행동과 그가 김대중 대통령과의 대화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40일 후 김대중-부시의 재앙적인 정상회담의 불씨는 이렇게 잉태되고 있었다.
▲ 김대중(왼쪽) 전 대통령과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이 2001년 3월 열린 정상회담 중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을 마친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같은 날 북한 역시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품은 입장을 내놓았다. 외무성 대변인은 "새 미 행정부가 우리와의 관계에서 이제 어떻게 나오든 그에 대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성적인 미국 정치인들과의 협상을 통해 지금까지 마련된 조미관계의 진전에 대해서는 평가하지만,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들에게 구태여 기대를 걸 생각이 없다. 미국이 우리에게 칼을 내밀면 칼로 맞설 것이고, 선의로 나오면 우리도 선의로 대답할 것이다."
열 받은 부시, 왕따 당한 파월
이처럼 미국의 정권교체기에 한반도 정세는 중대한 분수령을 맞이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에 있었던 남-북-미 3자 관계의 황금기를 어떻게 든 이어가고 싶어했다. 국무장관으로 기용된 콜린 파월이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김대중 정부의 기대감도 커져갔다. 2001년 2월 파월을 만난 임동원 국정원장이 "미국의 국무장관인 그가 한반도문제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 크게 고무되었다"고 밝힌 부분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김정일 정권에 대한 도덕적 반감과 더불어 클린턴 행정부에 대한 정치적 반감을 품고 있었고, 북한을 미사일방어체제(MD)의 최대 구실로, 남한을 그 포섭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ABM 조약 파동'까지 불거져 한미정상회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백악관 담당 선임기자인 피터 베이거가 최근에 출간한 <불의 날들(Days of Fire): 백악관의 부시와 체니(Days of Fire: Bush and Cheney in the White House)>에는 그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미정상회담을 불과 5시간 앞둔 3월 7일 새벽 5시(미국시간),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를 집어 들었다가 기사 제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부시, 클린턴 때 북한과의 미사일 회담 계승키로!" 이 기사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3월 6일 기자회견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파월은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대통령이 물려준 부분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준비할 계획이다. 테이블 위에는 몇 가지 유망한 요소가 남아 있고, 우리는 그러한 요소들을 검토해나갈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파월은 1월 17일 국무장관 인준 청문회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내놓은 바 있었다. 그는 김정일을 "독재자"라고 부르면서도, 남북관계 발전 적극 지지,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준수, 클린턴 행정부 때 북미 미사일 협상 계승 등이 대북정책의 주요 골자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입장을 밝힌 데에는 2000년 12월에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 담당자들이 파월의 자택을 찾아 정책 브리핑을 한 것이 주효했다.
그러나 이건 부시가 딕 체니 부통령으로부터 받은 자문과는 정반대였다. 체니는 "악마와는 대화할 수 없다"며,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외교·안보 문제에 문외한이었던 부시는 대북정책을 비롯한 외교·안보 정책을 체니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3월 7일 자 <워싱턴포스트>를 보고 단단히 화가 난 부시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워싱턴포스트> 읽어봤어요?"
"아니요. 대통령님, 아직..."
"당장 나가서 신문을 가져와요!"
라이스가 신문을 집어 들자, 부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 문제를 처리할까요? 아니면 당신이 할래요?" "대통령님, 제가 하겠습니다" 부시와 통화를 마친 라이스는 즉시 파월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부시와의 전화통화 내용을 전달하고는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이 문제를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날 아침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김대중 및 부시와 나란히 선 자리에 함께 선 파월은 "북한과의 협상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파월은 "내 스키가 조금 앞서 나갔다"고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파월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기실 파월은 전날 기자회견에 별문제가 없었다고 봤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책을 재검토하면서 "유망한 요소"를 살리겠다는 취지로 발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월은 훗날 왜 부시가 그토록 화를 냈는지 알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치명적인 단어, 클린턴을 사용했기 때문이었죠."
당시 미국 내에선 'ABC(Anything But Clinton)'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클린턴만 아니라면 괜찮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공화당과 부시 행정부의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 컸다. 7년 뒤 한국에선 'ABR(Anything But Roh)'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노무현만 아니면 괜찮다'는 의미이다. 부정의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 부시가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하면서 북한은 미국 본토까지 다다르는 미사일 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노무현의 대북정책을 부정한 이명박 정부 시대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오바마 행정부 등장 직후인 2009년 봄에 북한이 장거리 로켓과 핵실험을 강행하자, 워싱턴 정계에서는 또다시 'ABC'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C'의 주인공은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로 9.19 공동성명과 그 1단계, 2단계 이행조치인 2.13 및 10.3 합의를 도출한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이었다. 이로 인해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힐의 정력적인 대북 외교가 '전략적 인내'라는 대북 무시 정책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6자회담이다. 부시 행정부 때에는 주로 미국이 조건없는 6자회담을 제시했고 북한이 조건을 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 때에는 북한이 조건 없는 회담 재개를 촉구하는 반면에, 미국이 조건을 다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2009년부터 2013년 11월 현재까지 6자회담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는 핵심적인 사유이다.
다시 2001년 초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부시의 백악관이 파월에게 열 받았던 이유는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나 김정일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MD를 향해 전력 질주할 준비를 갖추고 예열을 가하던 시점에 파월이 찬물을 끼얹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부시의 대통령 취임을 2주 앞둔 2001년 1월 7일,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적인 변수는 MD 문제라며 이렇게 예상했다.
"MD에 대한 부시의 열망을 고려할 때 부시 행정부는 현재 진행 중인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 과정을 뒤엎을 가능성이 있다. (중략)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부정적이고, (그들은) 북한이 왜 미국이 MD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여긴다. (중략) 부시가 북한과의 협상을 중단하고 MD 구축을 선택할 경우 절망적으로 가난한 북한으로서는 군사력을 마지막 지렛대로 삼게 될 것이다."
기실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북한 위협을 근거로 MD에 방점을 찍을 것임을 예고해준 대목인 이보다 1년 전에 부시 캠프에서 이미 나왔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 진영의 외교안보참모였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포린어페어> 1/2월호 기고문을 통해 두 가지 대북정책 방향을 밝혔다. 하나는 "북한을 매수하려고 했던"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연하고 단호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빨리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를 배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였다.
한편 한미정상회담이 다가오면서 클린턴 행정부 때 고위 관료들은 부시 행정부에 대한 정책 권고와 함께 아쉬움을 토로하고 나섰다.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조정관은 "미국의 대선 공방이 북한 미사일 문제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침몰시켰다"며, "중요한 세부사항이 남아 있기 했지만, 북한과의 타협은 거의 이루어질 뻔했다"고 말했다. 국무장관으로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올브라이트 역시 "북한은 변화할 수 있는 지역 중에 하나였다"며 "우리가 이것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과 인터뷰를 한 <뉴욕타임스>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미국의 MD의 강력한 추진력이었기 때문에, 이번 에피소드(클린턴의 방북 무산과 이에 따른 북미 미사일 타결 결렬)와 NMD는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고 논평했다.
한반도 정세, 짙은 암흑 속으로
한국시간으로 3월 8일 오후, 두 정상은 공동발표문을 통해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 지지 △한미간의 긴밀한 공조 △한미동맹의 유지·발전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의 주도권 존중 △김정일 위원장 답방 지지 △억지와 방어를 위한 새로운 접근 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발표문만 놓고 보면 큰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언론들도 일제히 "부시 대북포용정책 지지", "한-미 대북포용정책 계속" 등으로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그러나 프리처드는 양국 합의 가운데 '억지와 방어를 위한 새로운 접근'이 "공동성명의 본질"이라고 봤다. 부시 행정부가 염두에 둔 "새로운 접근"의 핵심은 바로 MD였기 때문이다.
부시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북한에 대한 불신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는 북한이 세계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갖고 있다"며 "북한이 앞으로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것들에 대한 검증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혀 북한의 미사일 개발, 생산, 실험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철저한 검증을 요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북한을 상대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투명성"이며 "비밀에 싸인 나라와 협정을 맺을 때 그 나라가 협정내용을 준수할 것인가를 어떻게 확신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국내 언론의 긍정적 보도와는 달리 <뉴욕타임스>는 정상회담 다음 날 부시 행정부의 강경 기류를 전하기도 했다. 부시가 김대중에게 "클린턴 행정부 후반기의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 결과에 연연하지 않겠다"며 "당분간 북한과 미사일 회담을 재개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분명한 퇴짜"라고 표현했다.
한미정상회담을 누구보다도 유심히 지켜본 북한도 퇴행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3월 13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5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돌연 연기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당시 장관급 회담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등 중요한 현안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미간에 불협화음이 드러나고 북한이 남북대화마저 연기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짙은 암흑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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