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성명에서 "우리"를 '한국 정부'로 바꿔 읽어보면 이 성명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한국이 미국의 MD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 문장으로 이뤄진 이 성명은 한국 정부가 작성해 발표한 것이 아니다. 2001년 3월 초에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김대중 정부에게 전달한 비밀 외교전문에 담겨 있는 것이다. 외교전문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 방문에 앞서 위와 같은 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분위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여 있었다.
DJ의 방미 나흘 전인 3월 2일, 이정빈 외교부 장관은 MD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장은 미국이 제시한 문안을 거의 받아쓰기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세 번째 문장이 달랐다. "MD를 배치할 필요를 인정한다"는 미국 측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는 미국 정부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동맹국 및 관련 국가들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이 문제에 대처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 김대중 정부가 미국 측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때 철저히 '푸대접'으로 보복했다.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가 아닐진대,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미국은 왜 DJ의 워싱턴 방문에 앞서 MD 성명 문안까지 작성·전달해, 한국 정부에 읽고 오라고 했던 것일까? 그랬던 부시는 왜 동맹국의 수반에게, 그것도 고령이자 불과 몇 개월 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DJ에게 토라진 것일까?
ABM 조약 파동의 경위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2001년 2월 말 서울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2월 27일 한러 공동성명에는 "ABM 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이를 보존·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앞선 글에서 소개한 G-8 정상회담 성명에 담긴 내용을 재확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한 구절로 인해 서울-워싱턴-모스크바가 동시에 뒤집혔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언론들은 한국 정부가 ABM 조약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함으로써 결국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에 대한 반대 의사를 나타낸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러시아 언론은 푸틴의 외교적 승리라고 자축했다. 국내 대다수 언론도 김대중 정부가 NMD에 반대해 한미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요지의 보도를 쏟아냈다.
▲ 2001년 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오른쪽)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단독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
그러자 김대중 정부는 "ABM 조약 지지와 NMD 반대는 별개"라며 진화에 나섰다. 이정빈 외교장관은 기자회견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ABM 조약의 강화는 미국이 주장해 온 표현이다. NMD 반대와는 관계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두 개가 별개라는 말은 스스로 무지를 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ABM 조약이 있으면 NMD를 할 수 없다는 점은 미국도 알고, 러시아도 알고, 웬만한 전문가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이미 예전의 미국이 아니었다. 공화당의 공세에 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NMD를 추진했던 클린턴과 '스타워즈'에 사활을 건 부시는 차원이 다른 정권이었다. 안타깝게도 김대중 정부는 달라진 세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해명 정도로는 이미 단단히 뿔이 난 부시 행정부의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오히려 약삭빠른 부시의 외교안보팀은 'ABM 조약 파동'을 MD에 대한 한국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위에서 소개한 성명을 발표하고 워싱턴으로 오라고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국일보>가 관련 문건을 입수해 보도한 2001년 6월 14일 자 기사에는 그 생생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문건에 따르면, 분노에 휩싸인 부시 행정부의 토켈 패터슨 미 국가안보회의(NSC) 선임 보좌관은 워싱턴에서 유명환 주미 공사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이 NMD 추진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동맹국이 러시아와 함께 ABM 조약을 지지하는 내용을 발표한 것은 정말로 혼돈스럽다."며 특히 "콘돌리사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은 물론 부시 대통령도 화가 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다음 주 (한미)정상회담이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3월 2일 예정된 NSC 회의 후 다음과 같은 발표문안으로 입장을 발표해 달라"며 미리 작성한 문안을 건넸다. 패터슨이 건네준 문안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성명이다.
그렇다면 한러 공동성명에 ABM 조약 구절이 들어가게 된 경우는 무엇일까? 주무부처인 외교부의 이정빈 장관은 "ABM 조약의 강화는 미국이 주장해 온 표현"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사용했던 표현을 한국이 다시 사용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뜻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핵심 참모이자 국가정보원 원장이었던 임동원의 회고는 보다 구체적이다. "외교부가 자주적인 외교를 위해 이런 입장을 취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작년에도 오키나와에서 있었던 G-8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이런 입장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필자는 앞선 글에서 "G-8 공동성명에 담긴 ABM 조약 부분은 8개월 후에 한국에 비수로 다가오고 만다"고 쓴 바 있다. 당시 한국 외교안보팀의 대다수는 불과 8개월 전에 미국 대통령도 참석한 G-8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담긴 구절을 한러정상회담에서 다시 사용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내막을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ABM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자,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진상조사에 들어가 '한러 공동성명관련 사항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한국일보>가 입수·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외교부의 한러정상회담 준비팀은 관련 부처 및 주 러시아 대사관 등의 의견을 반영해 "양측은 ABM 조약의 유지·강화를 희망했다"는 문안을 작성해 러시아 측에 제시했다. 놀랍게도 ABM 조약 부분을 한국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그러자 러시아는 "미국의 NMD 계획에 반대"한다는 내용도 넣자고 수정 제안했지만, 한국 외교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후 외교부 내에서도, 청와대에서도 ABM 관련 조항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김대중-푸틴 공동성명에 담기고 말았다. 이렇게 된 배경 역시 "클린턴 행정부에서 사용한 문구이므로 이를 인용하는 것은 문제없다"고 봤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선 유세 때 ABM 조약 파기 의사 밝혀
그렇다면 김대중 정부는 ABM 조약 파동을 사전에 막을 수는 없었을까? 최소한 미국 대선 유세 때부터 미국 공화당 및 부시 후보가 발표한 입장만 알고 있었다면, ABM 조약의 민감성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부시는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이었던 2000년 6월 23일 외교·안보정책 공약을 발표한 자리에서 "냉전을 뒤로 하고 새로운 위협에 대응할 때가 왔다"며, "러시아가 ABM 조약 개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미국은 더 이상 이 조약에 구속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특히 "차기 대통령의 손을 묶어놓는 어설픈 합의를 하느니 차라리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는 게 미국 안보에 좋다"라며 클린턴을 정조준하고 나섰다. 그는 이후에도 "러시아가 ABM 조약 개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폐기하면 그만"이라는 입장을 줄곧 밝혔다.
한국 외교의 상당 부분이 대미 외교에 편중되어 있었고, 정보 수집과 분석에 막대한 인력과 예산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한미관계의 중대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김대중 정부가 이러한 외교적 미숙함을 드러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파문의 1차적인 책임이 주무 부처인 외교부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청와대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안 자체가 외교장관 회담이 아니라 정상회담이었고, 청와대 역시 ABM 조약의 민감성을 파악한 것은 파문 이전이 아니라 이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2001년 초는 한국의 MD에 대한 입장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던 시점이었고, 김대중 정부는 한미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ABM 조약 파동을 예방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쨌든 이 파문으로 인해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길은 가시밭길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방미 기간에 "ABM 조약 문구가 안 들어가는 게 좋았다"고까지 말했다. DJ를 수행했던 임동원의 회고이다.
"'MD 반대'로 비춰진 이 사건은 "한국은 독자적으로 '남북평화조약'을 추진하려 한다"는 미국의 오해와 함께 '외교대통령'이라는 김 대통령의 이미지에도 큰 손상을 입혔다. 뿐만 아니라 새로 집권한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워싱턴에 가야 하는 김 대통령의 어깨를 매우 무겁게 만들었다. 김 대통령은 몇 차례에 걸쳐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마에 MD를 새긴 정권"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스타워즈에 골몰하던 부시 행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빠르게 ABM 조약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5월 1일 취임 이후 첫 대외 정책 연설에서 "미국은 30년 동안이나 미국의 손발을 묶어온 ABM 조약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가 ABM 조약을 탈퇴하고 싶었던 이유는 두 달 뒤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의 입을 통해 단순명쾌하게 나왔다. "MD는 이 조약을 위반한다." ABM 조약과 MD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 9·11 테러가 발생하자, 부시 행정부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ABM 조약에서 탈퇴한다고 러시아에 통보했다. 그리고 탈퇴 통보 6개월 후인 2002년 6월 ABM 조약은 정확히 30년 만에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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