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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를 품은 1972년 모스크바와 2000년의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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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를 품은 1972년 모스크바와 2000년의 오키나와

[정욱식의 '모순과 악연'] ABM 조약과 한반도의 엇갈린 운명(상)

연재를 시작하며

북핵, '킬 체인', 미사일방어체제(MD), 전시작전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과 우경화, 중·일 간의 영토 분쟁, 중국의 부상,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 등등. 최근 몇 달 동안 언론 지면을 장식한 표현들이다.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안들이다. 그러나 이들 사안은 거대한 그물망처럼 상호 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에 필자는 현미경과 망원경을 함께 사용해 나무는 좀 더 세밀하게, 그리고 나무들로 이뤄진 숲은 좀 더 포괄적으로 보려고 한다. 렌즈는 MD 문제로 삼으려고 한다. MD라는 렌즈를 통해 이들 사안을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에서 바라보면 실체적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또 앞날을 내다보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만능의 보검"으로 삼기로 한 평양의 결정은 북한을 꽃놀이패로 삼아왔던 '워싱턴의 룰'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악연'이다. 이 악연에 힘입어 워싱턴은 서울에 창과 방패를 파는 데 여념이 없다. 한편으로는 북핵을 파괴할 수 있다며 스텔스 전투기와 각종 미사일을 팔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미사일을 막자며 MD에도 편입시키려고 한다.

떠오르는 중국 고사가 있다. 한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좌판에 늘어놓고 '이 창은 뚫지 못하는 게 없어요', '이 방패는 막지 못하는 게 없어요'라며 호객행위를 한다. 이 장사꾼은 어떤 행인이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오?'라고 묻자 줄행랑을 친다. 모순(矛盾) 이야기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서울의 정책결정자들은 이 행인보다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

앞으로 매주 한두 차례에 걸쳐 이러한 악연과 모순을 집중적으로 파헤쳐보려 한다. 정부의 발표와 언론 보도의 이면에 숨겨진 얘기들을 들춰내기 위해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문서, 핵심 관계자들의 회고록, 여러 보고서 등을 분석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첫 이야기는 1972년 모스크바의 합의가 2001년 서울에 비수로 다가온 사연이다.

미국과 소련이 '희한한 조약'을 맺은 사연

30년간 칭송을 받았다가 지금은 "냉전 시대의 유물"(레이건과 부시가 즐겨 쓴 표현)처럼 잊혀진, 그러나 가끔 거론되는 조약이 있다. 탄도미사일방어(Anti-Ballistic Missile: ABM) 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ABM은 오늘날 미사일방어체제(Missile Defense: MD)와 같은 말로써, ABM 조약은 MD 구축을 사실상 금지한 것이다.

1972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체결한 이 조약은 29년 후, 서울-워싱턴-모스크바를 동시에 뒤집어 놓게 된다. 남북한의 분단된 현실, 한반도의 현재진행형인 냉전과 지정학적 위치, 한미동맹의 종속적인 현실, 한국 외교안보팀의 무능이 서로 맞물리면서 한국 외교 사상 최악의 참사 가운데 하나를 야기하고 만다.

▲ ABM 조약에 서명하고 있는 닉슨(왼쪽) 미국 대통령과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국 국무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ABM 조약과 MD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ABM 조약은 대단히 희한한(?) 조약이다. 상대방의 핵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방어망 구축을 사실상 금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핵미사일이 워싱턴이나 모스크바에 떨어지면 수백만 명이 죽을 수도 있는데, 왜 두 나라는 방어망 건설을 포기한 것일까?

195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미사일을 증강시켜 나갔다. 그러면서 양측은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언제든 상대방의 핵미사일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핵미사일이 자신의 땅에 닿기 전에 막을 수 있는 '신의 방패'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패를 만들려고 하면 할수록 그 꿈에서 멀어져갔다. 모든 조건이 공격자에게 유리하고, 시제품을 만들어 실험을 해보면 실패하기 일쑤이며, 방패를 무력화할 수 있는 대응 수단이 얼마든지 있고, 비용 자체도 천문학적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MD가 절대 안보를 실현시켜줄 수 있다는 환상은 곧 절대 안보를 추구하는 것이 더 큰 불안을 초래한다는 이성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바로 '전략적 안정(strategic stability)'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국립과학아카데미는 상호 간의 군비경쟁을 최소화하고(군비경쟁 안정)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동기를 제거할 때(위기 안정) 전략적 안정이 달성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MD는 전략적 안정을 해치는 가장 대표적인 무기체계이자 군사전략이다. 어느 일방이 방패를 갖게 되면, 다른 일방은 그 방패를 무력화하기 위해 더 많은 창과 화살을 만들려고 한다. 전략적 안정의 한 축인 '군비경쟁 안정'과 역행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동시에 방패를 갖고 있는 나라는 자신이 먼저 창이나 활을 사용하더라도 상대방의 창이나 활을 방패로 막을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선제공격'이 훨씬 수월해지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그렇게 우려한다. 이렇게 되면 전략적 안정의 또 다른 축인 '위기 안정'이 극히 어려워진다.

72년 미국과 소련이 ABM 조약을 체결했던 핵심적인 사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의미는 당시 미국 협상 대표였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이 "ABM 조약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방어 경쟁을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를 배치하려는 동기도 위축시킬 수 있다"고 발언한 것에 잘 담겨 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존 루이스 가디스는 ABM 조약의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일갈했다. "이 조약은 처칠과 아이젠하워의 아이디어, 즉 즉각적인 절멸에 대한 전망을 동반하는 취약성이 미·소 관계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기초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양측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취약성이 안보에 기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즉 서로가 절멸의 취약성을 안고 사는 것이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에 처음에는 소련이 나중에는 미국이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만큼 미국 협상단이 소련을 설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어쨌든 그 이후 약 30년 동안 ABM 조약은 "국제 평화와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는 칭송을 받아왔다. 이 사이에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략방위구상(SDI)을 들고 나온 레이건 행정부는 ABM 조약이 못마땅했다. 전략적 안정이라는 알쏭달쏭한 표현을 달리 말하면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이다. '너 죽고 나 죽고 모두 죽는 공포의 균형'을 유지해야 평화가 유지된다는 전략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도덕적·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대단히 모욕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를 현실 정치에서 전면으로 들고 나온 정권이 레이건 행정부였고, 레이건을 우상으로 삼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였다. 이들의 눈에는 MAD에 의존하는 평화는 모욕적인 것이고, "방어력에 기초한 평화는 재앙의 그림자를 말끔히 치울 수 있는 길"로 비춰졌다.

1981년 취임사를 통해 소련을 "범죄와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는 집단"이자 "세계 공산화"를 획책하는 집단으로 묘사한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2년 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스타워즈(SDI의 별칭)'을 천명했다. "우리가 적의 전략 미사일이 미국이나 우리 동맹국의 영토에 떨어지기 전에 요격할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가"라며, MAD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SDI를 추진하면서 ABM 조약에 대한 좁은 해석이 이 구상에 어떤 차질을 빚고 있는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는 ABM 조약을 넓게 해석해서 SDI 구상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레이건 행정부가 스타워즈 구상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에드워드 텔러는 "미국은 SDI를 통해 '상호확증파괴에서 확실한 생존(assured survival)"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MAD가 전략적 안정의 다른 표현이듯이, 미국이 MAD에서 절대 안보로 방향을 튼다는 것은 소련과의 전략적 안정의 기초가 허물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소련은 미국의 SDI 및 핵전력 증강을 '핵전쟁 준비'로 간주하고 대규모의 핵전력 증강에 나서 86년에는 핵무기 숫자가 4만개까지 치솟았다. 또한 '경보 즉시 발사(launch on warning)' 시스템을 강화해 미국이 선제공격할 조짐을 보이면 먼저 공격하기 위한 준비 태세에도 박차를 가했다. 미국 역시 이러한 군사적 조치를 취해 나갔다. 이에 따라 전략적 안정의 두 축인 '군비경쟁 안정'과 '위기 안정' 모두 뿌리째 흔들렸다.

이에 반해 기다렸던 SDI는 당시 가치로 500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퍼붓고도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반전·반핵' 피켓을 들고 주요 도시의 거리를 누볐고 미국 내에서는 '스타워즈'가 공상과학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환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레이건은 소련의 새 지도자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선택했고 SDI 예산도 줄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과 소련은 총성 한 방 울리지 않고 냉전 종식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남북정상회담, MD를 요격하다!

레이건 행정부와 그의 후임자인 조지 H.W 부시 행정부 행정부는 ABM 조약을 느슨하게 해석해 MD 구축을 시도했다면,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 조약의 개정을 러시아에 타진했었다. 민주당 정권이자 MD 자체에 미온적이었던 클린턴 행정부는 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을 내세워 압승한 이후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를 빨리 만들라"는 공화당의 공세에 시달렸다.

(참고로 클린턴 행정부는 MD를 미국 본토 방어용인 NMD와, 해외 주둔 미군 및 동맹국 방어용인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로 나눠 접근했다. 이를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전지구적 MD"로 통합했고, 오바마 행정부는 이를 다시 나눠 TMD는 '지역 MD'로 NMD는 '지상배치중간단계방어체제(GMD)'로 부르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 한반도와 MD 사이의 악연의 씨앗이 뿌려졌다. 미국 중간 선거 직전에 나온 것이 바로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였다. 그런데 공화당의 눈에 비친 제네바 합의는 "악행에 대한 보상"이자 "북한의 위협에 미국이 굴복한 것"이었다. 공화당은 이 합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미국과의 계약'을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왔는데 그 핵심이 바로 MD 구축이었다.

그러자 클린턴 행정부는 'NMD 3+3' 계획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3년간 실험 평가를 해보고 2000년에 그 결과를 평가해 배치 여부를 결정하며 배치 결정 시 3년간 실전 배치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98년 8월 북한의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계기로 NMD 조기 구축론은 더욱 거세졌다. 한반도와 MD의 악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공화당의 공세에 밀린 클린턴 행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ABM 조약 개정을 타진했다. 러시아가 반대 입장을 고수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ABM 조약 개정과 전략무기감축을 연계시키는 방안을 들고 나왔다. 2000년 6월 11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ABM 조약 개정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6500개에 달하는 핵탄두를 1500~2000개로 줄이는 것을 적극 검토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푸틴의 반응은 냉담했다. 북한의 위협 자체가 ABM 조약을 바꾸면서까지 MD를 추진해야 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그는 대안을 내놓았다. 미국이 MD 구상을 포기할 경우 러시아가 북한에 장거리 미사일 개발 포기를 설득하고, 그 대가로 북한이 필요로 하는 민간위성 기술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이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MD 및 ABM 조약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즈음, 한반도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회담은 미국의 MD 구상에 '무언의 돌직구'를 던졌다.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면서 북한 위협을 최대 구실로 삼은 MD 추진력이 크게 저하된 것이다. 존 이삭 '살만한 세상을 위한 위원회(Council for a Livable World)' 회장은 "북한은 MD의 구실이 되어 왔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은 MD 풍경을 변화시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남북정상회담의 '나비효과'는 커다란 지구적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이 국제사회 상당수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MD 구축을 강행하려고 하자, 세계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러시아는 ABM 조약 개정 여부를 두고 첨예하게 맞섰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MD를 일방적 패권주의로 규정하고 공동 대응을 다짐하고 있었다.

MD가 야기한 균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이 냉전 시대부터 세계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왔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마저 흔들릴 조짐을 보인 것이다. 그러자 유럽연합의 핵심 관료들이 2000년 5월 중순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국을 만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유럽연합 외무장관인 자비어 솔라나는 "만약 미국이 MD 배치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국제사회는 미국의 건방진 일방주의에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고, 요스카 피셔 독일 외무 장관 역시 "이 문제는 미국과 러시아에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이라며, "미국 한 나라의 결정에 국제사회는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신중한 결정을 촉구했다.

이처럼, MD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던 시기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우선 미국 언론의 태도부터 달라졌다. "북한을 미친 국가 취급해온 선입견이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고, 일부 언론은 비판의 화살을 북한에서 미국의 MD파들에게 돌렸다. 북한의 위협이 과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시들어가던 MD가 98년 8월 북한의 광명성 1호 발사로 되살아났다면, 1차 남북정상회담은 MD를 역사의 뒤안길로 돌려보내는 듯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이었다. 남북정상회담 한 달여 후에 열린 이 회담의 최대 쟁점은 MD였다. 미국은 ABM 개정 및 MD에 대한 선진국들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했고, 러시아는 반(反) MD 여론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결과는 러시아의 완승이었다. 캐나다는 MD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프랑스는 "MD의 필요성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유럽연합의 다수 국가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해 미국을 당황시켰다. 특히 G-8 공동성명에는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자 전략 공격 무기 감축의 기초인 ABM 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내용은 이전 주요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간혹 담기곤 했지만, 미국이 ABM 조약 개정을 위해 외교력을 집중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그 의미와 맥락이 달랐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한반도 정세의 변화가 MD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최대 명분이 북한이었고 그 북한이 남한과 최초의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이 교차되면서 MD 명분이 약화된 것만은 분명했다. 이 기회를 포착한 인물이 바로 푸틴이었다. 그는 G-8 정상회담 참석에 앞서 평양을 찾아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그리곤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은 다른 나라가 위성 발사를 지원하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는 김정일을 발언을 공개했다. 이를 두고 영국 일간 <텔리그래프>는 "미국의 MD에 제동을 걸려고 하는 푸틴은 이 기회를 즉각 잡았다"고 평했다.

결국 클린턴은 9월 1일 조지타운 대학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우리는 NMD 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게 될 때까지는 (배치를) 추진해서는 안될 것"이라며 배치 승인을 차기 정권으로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결정은 NMD가 기술적으로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고,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상당수 동맹국들조차 반발하고 있으며,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위협론'이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게 되면서 내려진 것이다. 동시에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과의 고위급 대화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미 3자 관계가 황금기를 구가하고 MD 문제에도 전환점이 되었던 2000년도의 '정(正)'의 시간은 '반(反)'을 잉태하고 있었다. G-8 공동성명에 담긴 ABM 조약 부분은 8개월 후에 한국에 비수로 다가오고 만다. 신처럼 떠받쳐온 MD와 한반도 평화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한 미국 공화당 진영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베어버릴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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