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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의 당선과 '합리적 무지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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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의 당선과 '합리적 무지 가설'

[이정전 칼럼]<89> 정치 실패, 결국 유권자 책임이다

10·30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국민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가운데 치러졌지만, 서청원 후보의 여의도 입성만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고 감옥살이까지 한 그의 비리 전력이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무난히 통과했다고 새누리당은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권력의 뒷배를 탄 전형적 부패 정치인인 데다가 새 시대의 이미지라고는 전혀 없는 구닥다리 정치인이 도대체 어떻게 새 시대의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지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과연 이번 재보궐 선거 지역의 유권자들이 우리의 정치 현실을 제대로 잘 읽고 후보들의 면면과 그들의 공약을 꼼꼼히 파악한 다음 투표장에서 신중하게 한 표의 권리를 행사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제학자들, 특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경제학자들(이른바 정치경제학 학자들)은 이 질문에 단연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민주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다. 정치경제학에는 오래전부터 투표자 행태에 관하여 의미심장한 가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막말로, 정치에 관한 한 유권자들은 아주 무식하다는 것이다. 보통, 무식하다고 말하면 어리석거나 멍청함을 힐난하는 뜻이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무식하다는 말은 그런 비하의 뜻을 담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하면, 정치에 관해서는 무식한 것이 합리적이다. 달리 말하면, 합리적이기 때문에 무식해진다는 것이다.

신성한 투표권을 현명하게 행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 현실을 잘 파악하고 후보자들의 성격과 그들의 공약을 열심히 공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거나 박수 쳐주지 않는다. 공연히 시간과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그럴 시간에 TV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해봐야 별 이익이 없이 헛수고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내 한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확률은 비 오는 날 벼락을 맞아 죽을 확률만큼이나 낮다. 경제학은 개인이 철저한 손익 계산을 바탕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하는데, 정치와 정치가에 대하여 잘 알려고 노력하는 것은 밑지는 장사다. 따라서 정치와 정치가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말고 무지한 상태로 있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무지 가설'의 핵심 내용이다.

현실을 돌아보면, 이 가설이 그럴듯해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가장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알려진 미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의 이름을 모른다. 75퍼센트가 국회의원의 임기를 모르며, 70퍼센트가 어떤 정당이 하원의 다수당인지 모르고, 60퍼센트 이상이 상원의 다수당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80퍼센트 이상이 부시 대통령의 애완견 이름이 "밀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으나 그가 사형 제도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권자의 수는 15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의 정치 의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좌파 빨갱이'라고 몰아붙인 노인네들 중에서 박근혜 후보와 그 주변 인물들의 면면과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투표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재·보궐 선거 승리가 확정된 서청원 후보 사진 옆에 '당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합리적 무지 가설은 아직도 학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오늘날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횡행하고 있는 정경유착, 이를 둘러싼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이 가설이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국민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무지할 때에는 재벌을 비롯한 각종 힘 있는 이익단체들이 발호하면서 국회의원 및 관료들과 짜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의 거래를 자행하게 된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바로 이런 정경유착(정치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지대추구)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와 근거를 지난 수십 년간 무수히 내놓았다. 그래서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이른바 '포획이론(capture theory)'이 설치게 되었다.

만일 국민이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정치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정부의 각종 정책을 꼼꼼히 점검한 다음 선거에서 표로써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을 솎아내고 응징한다면, 정경유착과 이에 따른 부정부패는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선거의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와 같이 정치인과 관료들을 정기적으로 심판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 봐야 각 유권자 개인에게 별 이익이 없다. 그래서 결국 정치인과 관료를 제대로 응징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한 가지 근본적 모순이라고 정치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물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정치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들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합리적 무지 가설은 정치 현실을 너무 과장하고 있다. 둘째,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경제학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너무 비약이다. 설령 합리적 무지 가설이 옳다고 치자. 예컨대 우리 국민의 98퍼센트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래서 아주 무식하다고 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은 천방지축이다. 통계학적으로 말하면, 무작위적으로 행동한다. 주사위를 던져서 짝수가 나오면 여당 후보를 찍고, 홀수가 나오면 야당 후보를 찍는 식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무작위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그런 뜻이다. 그렇다면, 정치에 무식한 98퍼센트 유권자 표의 절반은 여당으로 가고 나머지 절반은 야당으로 간다. 이들의 표는 서로 상쇄되면서 정치권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못한다. 결국, 정치에 대해서 잘 아는 똘똘한 2퍼센트가 선거 결과를 결정하며, 이 결과는 올바른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합산의 논리'다. 그러니 유권자 대부분이 정치에 관해서 무식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실 유권자들이 그렇게 무식하지는 않다. 예를 들면, 상당히 많은 유권자가 정치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념 및 신념을 지니고 있고, 각 정당의 성향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각자의 이념에 따라서 진보 성향의 유권자는 진보 정당에, 보수 성향의 유권자는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령이 높을수록 그리고 학력이 낮을수록 보수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국회의원 선거를 분석한 한 연구에 의하면, 지역구의 경우 투표자의 55.4퍼센트가 자신의 이념에 따라 투표하였으며, 비례대표의 경우 55.7퍼센트가 자신의 이념에 따라 투표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 때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미국의 경우에도 이익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 못지않게 투표자의 이념이 정치판의 의사 결정을 좌우하는 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논문들이 근래에 속속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이익 집단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투표자의 이념도 정치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투표 결과를 예측하기 더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정치판이 이상하게 뒤틀리면서 표류할 가능성이 더 커질 수도 있다. 대체로 보면, 돈과 결부된 갈등은 타협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념과 결부된 갈등은 그렇게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 2013년 미국 연방정부의 폐쇄(셧다운) 문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던 주된 이유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 대립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여권과 야권의 대립이 완화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유도 이념 갈등 때문이다. 이념 갈등이 잘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이념이나 신념이 각 개인의 자존심이나 자아의식과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념이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지조에 관한 문제요 자존심 상하는 문제로 생각하기에 십상이다.

문제는 유권자 각자가 가진 나름대로 이념이나 신념이 사회적으로 옳고 타당하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대선 때 다수의 노인이 문재인 후보를 좌파 빨갱이라고 매도했지만, 좌파 빨갱이에 대한 보편적 기준에 따라 문재인 후보의 행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보고 나서 그가 좌파 빨갱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된 노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아마도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많은 신념이 즉흥적으로 형성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개인의 잘못된 이념이나 신념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린다는 신념은 옳지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일상 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에서는 개인의 잘못된 신념이 치명적일 수 있다. 사자가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초원에서는 내가 사자보다 빠르다는 신념이 자칫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정치판에서는 유권자 개인들의 잘못된 이념이나 신념이 개인에게는 별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엄청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권자 개인들의 잘못된 신념에 따른 투표가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치인 선출로 이어지면서 사회 전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의 난맥상은 우리 유권자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유권자들 사이에 잘못된 이념이나 신념이 횡행하고 있음을 보이는 정치경제학자들의 연구도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의 잘못된 이념이나 신념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유권자들이 올바른 정치의식을 가지도록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함과 동시에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시민운동이 크게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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