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로 산 냉장고는 상표가 지멘스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냉장실과 냉동실이 구분되어 있고 크기와 성능이 괜찮았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서리제거 기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정 기간 사용하다 보면 냉장실 제일 위 칸에 서리가 조금씩 쌓여 점차 빙산을 이루었다. 그래서 적당한 때에 그 칸의 물건들을 꺼내고 그 얼음들을 직접 떼어내야만 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사정이 있어 조금 오랫동안 방치하면 그 빙산이 커져서 나중에는 드라이버와 고무망치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대대적인 제거 작업을 벌여야 했다. 대체로 집사람 선에서 해결되었으나, 간혹 잘 떨어지지 않아 아주 애를 먹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면 억울하게도 그 화살이 얌전히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무능하여 서리 제거도 안 되는 싸구려 냉장고를 샀기 때문에 자기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 독일 그린피스의 홍보물.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 강화, 원전중단 등의 구호가 적혀있다. ⓒ조성복 |
비록 이런 불편함이 있었지만 잘 사용하던 그 냉장고가 독일 생활의 막바지인 베를린에 살던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멈춰버렸다. 우리가 쓰기 전에 얼마나 사용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중고로 구입하여 사용한 지 약 10년 정도 되는 시점이었다. 귀국을 고려해 가능한 한 새로운 물건을 사는 것을 자제하였으나,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상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새 냉장고의 구입에 나서게 되었다.
전자상가, 백화점 등에는 다양한 종류의 냉장고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돌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아직도 서리 제거 기능이 없는 냉장고가 많이 팔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사람의 얘기로는 한국에서는 이미 90년대에도 이런 냉장고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LG전자에서 일하는 친구도 아직도 그런 게 있느냐고 신기해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동으로 서리가 제거되는 냉장고는 그 기능이 없는 것보다 전기를 훨씬 많이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 이게 바로 그 이유였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다.
전시된 냉장고들은 가격표, 에너지 효율 등급과 함께 반드시 연간 전력 사용량이 얼마인지가 표시되어 있었다. 냉장고의 선택에서 상표나 크기보다도 전기 사용량이 더 중요시되는 것 같았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전력 사용량이 적을수록 냉장고의 가격은 비쌌다. 자동 서리 제거 기능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가격이 저렴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다소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는 전자 제품이 소비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전기 요금이 비싸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가정용 전기 요금은 1998년에 1킬로와트시(kWh)당 17.11센트(0.1711유로, 약 250원)였는데, 이후 요금이 인하되기도 했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상승했다. 2013년 현재 28.73센트(약 430원, 부가세 포함)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1998년 대비 68% 인상된 것이며, 그동안 평균적으로 연간 3.5%씩 오른 것이다.
우리의 가정용 전기 요금은 2013년 기준 1킬로와트시당 59원(100킬로와트시 이하, 부가세 미포함)이다. 물론 누진제를 적용하고 있어서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킬로와트시당 요금이 122원(101~200킬로와트시),183원(201~300킬로와트시), 273원(301~400킬로와트시), 406원(401~500킬로와트시), 690원(501킬로와트시 이상)으로 비싸진다. 하지만 일반 가정에서 평범하게 전기를 사용할 경우, 독일에 비해 훨씬 저렴하다.
전자 제품의 소비와 관련하여 독일 사람들이 우리와 조금 다른 점은 그들은 무조건 최신의, 최고 성능의 제품만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자신에게 필요한 용도가 가장 우선시 되는 것 같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냉장고의 기능이나 용량도 각각의 용도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양문형의 대형 냉장고는 소수에 속했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독일 사람들의 에너지 절약 정신이 집사람에게 나를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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