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이어집니다. ☞ "입양특례법,출생신고를 의무화했다고?")
아동 신분 세탁은 범죄 행위
아동 신분 세탁은 범죄 행위이다. 개정 입양특례법이 출생신고를 의무화했다고 사실 아닌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이런 범죄 행위가 더는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의 그럴듯한 포장에 불과하다. 물론 이 아픔의 소리는 대체로 미혼모 당사자들에게서 나오는 일이니, 함부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아우성에 대한 성찰 없이, 60년 불법 관행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60년 입양 역사에 남겨진 어두컴컴한 협곡처럼 깊은 생채기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일방적으로 불법을 합법화하자고 나서는 모양새는 매우 거칠어 보인다.
주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24세 이하의 청소년 미혼모(부)가 데리고 온 아이의 경우, 입양 기관의 장이 이 아동을 짐짓 고아로 간주할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한 아동의 출생 진실성을 왜곡·조작하는 길을 국가의 공부 체계 안에서 공공연히 실행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진실을 거짓으로 덮을 권리를 입양 기관의 장에게 주자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지난 60년을 살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해온 일로 인해 실제로 입양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비록 이런 일이 불법이었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출생의 진실을 알 길이 없고 출생의 진실성에 기초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갈 권리를 박탈당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혼란과 분노와 좌절에 대해 공감적 울림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이런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몇 달 전 스위스에서 온 한 입양인이 필자가 섬기고 있는 '뿌리의집'에 머물렀다. 그는 입양 부모가 지어준 스위스식 이름을 입양 문서에 나타나 있는 자신의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을 한 사람이었다. 철수 김 뮐러(가명). 자신의 뿌리와 온전한 정체성에 대해서 그만큼 간절한 내면의 추구를 지니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이 개명으로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입양인이 가지고 온 자신의 입양 문서에는 자신을 입양 기관으로 데리고 온 할머니의 이름과 주소가 명기되어 있었다. 친가족을 찾아 나선 여정에 오른 입양인 중에는 큰 행운이 보장된 그런 문서였다. 얼마나 다행인가? 출생지인 부산으로 가서 시청과 동사무소를 방문하면 할머니의 현 소재지를 찾는 일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먼저 그를 스위스 가정으로 입양 알선한 입양 기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입양 자녀들이 찾아올 것에 대비해서 친가족이 입양 기관과 접촉해서 변경된 주소를 남겨 두는 일이 흔히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입양 기관을 찾아가면 더 구체적인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조언을 했다. 그런데 입양 기관을 방문하고 돌아온 철수는 이름과 주소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양 기관은 뭔가 석연치 않은 대답을 한다고 했다. 당연히 다음 순서는 직접 찾아 나서는 일. 그는 부산으로 갔고 시청과 동사무소를 거쳐 할머니를 만났다. 문제는 자신의 입양 문서에 나타나 있는 그 할머니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낯선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당혹 그리고 깊은 혼란!
부산 김철수와 스위스 김철수의 사연은?
그 할머니에게도 사연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도 김철수라는 외손자가 있었고, 스위스에서 온 입양인과 같은 나이였다. 그런데 스위스 입양인 김철수가 한국의 입양 기관에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위탁되었을 무렵, 이 할머니는 외손자 김철수를 데리고 이 기관에 왔다. 이 할머니의 딸이 미혼 상태에서 낳은 외손자를 두 해 남짓 키우다가 고군분투 끝에 입양을 보내기로 하고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외손자를 맡기고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이 할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부산 김철수의 외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노발대발한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이튿날 서울로 올라와서 입양 기관에서 부산 김철수를 데리고 내려가서 키웠다. 그는 지금은 결혼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신분 세탁이다. 국제 간의 아동 입양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스몰린 박사는 이런 일을 일컬어 아동 세탁이라고 정의한다. 스위스 김철수는 한국 김철수의 외삼촌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는 한국 김철수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지만, 한국 김철수 가족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한국 김철수는 그가 유아였던 시절 외할머니의 손에 의해 거의 입양 보내질 뻔했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성장했고 지금도 모르고 있는데, 스위스 김철수를 만나는 순간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가족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 가족의 실패와 수치에 직면하는 일을 그들은 피하고 싶어 했다. 스위스 김철수가 한국의 낯선 김철수를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개명까지 해가면서 구성해온 자신의 삶이, 실은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삶이었다는 허탈감 혹은 그 야릇한 운명에 대한 원초적 흔들림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나는 그의 젖어드는 눈빛과 목젖이 슬픔의 파고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거칠게 떨리며 퍼덕거리는 손을 아귀 잡고 있었다. 온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혼란과 비애의 파도가 나를 덮치고 있었다.
해외 입양 제도와 실천 안에서 아동 세탁 문제는 입양 아동 송출국 중 한국에서만 자행된 일은 아니다. 과테말라, 캄보디아, 라이베리아, 에티오피아 등 입양 산업이 뿌리내린 나라 어디에서든지 광범위하게 자행되어 온 일이다. 아동 세탁은 결국 인신매매의 한 형태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 송출 국가의 지도와 국제 간의 아동 입양 송출 국가의 지도는 기이하게도 상당한 수준에서 오버랩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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