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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서리 머금은 들국화 속...경주 폐사지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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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찬 서리 머금은 들국화 속...경주 폐사지를 걷다"

[인문학습원] 11월의 폐사지학교 참가 안내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 제5강은 오는 11월 9(토)∼10(일)일, 1박2일로 찬 서리 머금은 들국화가 지천인 경주의 폐사지들을 걷습니다. 이틀에 걸쳐 무장사지, 보문사지, 황복사지, 구황동 모전석탑지, 황룡사지, 황둔사지, 감은사지, 장항리사지,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등 10곳의 폐사지를 둘러보는 여정입니다. 눈부신 가을 햇살과 신선한 바람을 벗 삼아 걸으면서, 과거의 영화로움을 되새겨 보시고 현재의 쓸쓸함에 젖어보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망덕사지. 왼쪽 소나무숲이 절터다. ⓒ이지누

폐허로부터 받는...뜻밖의 힐링-.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가을빛 가득한 보문사지 당간지주 ⓒ이지누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사천왕사지 목탑터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이차돈이 순교하자 눌지왕 당시 아도화상이 움막을 짓고 머물던 천경림에 절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불사는 법흥왕이 시작하여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완공되었으며, 진흥왕은 백성 누구나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스스로도 말년이 되어 삭발염의하고 대왕흥륜사의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대왕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 되었으며, 이내 경주에는 "절과 절이 밤하늘의 별처럼 늘어섰고, 탑과 탑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섰다(寺寺星張 塔塔雁行).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을 매달자 학덕이 높은 승려의 무리들은 세상의 복전(福田)이 되었고, 대승·소승의 불법은 온 나라를 덮는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라고 <삼국유사>권3, '원종흥법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경주는 발 딛는 곳마다 폐사지이며, 눈 머무는 곳마다 부러진 비석이자 허물어진 탑입니다. 박물관 마당에는 상처 입은 부처들이 즐비하고 사찰을 장엄했던 석물들이 가득합니다. 들판에는 논 가운데에 우뚝 솟은 목탑지에 억새가 피어나고, 웃자란 풀에 가려져 있던 논둑의 주초석이나 석물들은 노란 들국화로부터 헌화공양을 받는 즈음입니다.

눈부신 가을 햇살과 신선한 바람을 벗 삼아서 경주의 폐사지를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경주의 폐사지를 걷는 일은 앞에 말한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塔塔雁行)'을 확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걸으면서 과거의 영화로움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현재의 쓸쓸함에 젖어 보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비로소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폐허는 과거를 되새기는 곳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를 비춰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구황동 폐사지와 남산 ⓒ이지누

2013년 11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답사 경로]
모두 열 곳의 폐사지를 답사하는 이번 여정은 대체로 도보 이동이 많습니다. 첫째 날, 무장사지 가는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임도여서 길의 폭은 넓지만 비포장이며 잔돌들이 흩어져 있어 거친 길입니다. 운동화보다는 등산화를 신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더불어 산중을 걸어야 하므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겉옷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바람이 많이 불면 생각보다 추울 수 있습니다. 보문사지에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으로 가는 길은 논 가운데로 나 있는 농로이며, 시멘트 포장이 된 길입니다. 둘째 날 아침, 황둔사지로 가는 황용골은 농로가 나 있어 승용차는 다닐 수 있지만 대형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길이어서 걸어야 하며, 무장사지 가는 길보다는 길이가 짧고 길 상태가 한결 나은 길입니다.

<제1일>
압구정동 공영주차장→경주 도착→점심식사→무장사지
(도보 왕복 2시간)→보문사지→황복사지→구황동 모전석탑지→황룡사지→동궁(월지) 관람→숙소(저녁식사는 숙소에서 합니다)

<제2일>
아침식사(숙소)→황둔사지
(왕복 도보 1시간30분)→감은사지→장항리사지→점심식사→망덕사지→사천왕사지→압구정동 공영주차장

[답사 일정]


<11월 9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강 여는 모임
11:30 경주 도착, 점심식사(<숙영민속식당>에서 찰보리밥정식)
12:20 식당 출발
12:40 암곡마을 주차장 도착, 임도 도보 이동
13:40 무장사지(鍪藏寺址) 도착

무장사는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아버지 김효양(金孝讓)이 지은 절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쟁에 지친 문무왕이 투구와 병기 등을 묻은 골짜기에 지은 절이라서 무장사라고 불렀다 한다. 1915년 이곳에서 신라 소성왕(昭聖王)의 왕비 계화부인(桂 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무장사에 봉안한 내력을 새긴 사적비가 발견되면서 무장사 터임이 밝혀졌다. 무장사지삼층석탑(보물 제126호)과 무장사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 및 귀부(보물 제125호)가 남아 있으며, 지난해 몸돌을 다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삼국유사>에는 "전하는 말로 태종임금이 삼국통일 이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묻었기에 그런 이름을 지었다(諺傳太宗統三已後 藏兵鍪於谷中 因名之)"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은 문무왕 때인 663년 백제 의자왕을 완전 진압하고 668년 12월 17일 고구려를 멸망시켜 668년 말에 삼한 통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문무왕을 무열왕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지누

14:10 무장사지 출발, 임도 도보 이동
15:10 암곡마을 주차장 도착
15:20 암곡마을 주차장 출발
15:40 보문사지(普門寺址) 도착, 시멘트 길 도보 이동

보문사지는 신라 경문왕 11년(871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을 뿐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지 못한다. 절터에는 보물 제910호인 연화문당간지주, 보물 제 64호인 보문리 석조, 그리고 보물 제123호인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들판에 남아 있다. 그 외에도 금당터와 동서 목탑지는 물론 논둑에는 주초석과 같은 석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페사지 답사의 진수를 보여 준다.

▲보문사지 석조 ⓒ이지누

16:40 구황동 삼층석탑(황복사지, 皇福寺址) 도착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기슭에 있다. 황복사는 신라 때 의상(義湘. 625∼702)이 출가한 사찰이라고 전할 뿐 건립 연대나 그 이후의 사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절터에는 국보 제37호인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논둑에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가 둘 그리고 여러 가지 석물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절터에서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이 출토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또 1942년 여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2층 지붕돌에서 금동으로 된 사리함이 발 견되었다. 사리함 안에는 은합, 금합, 녹유사리병과 함께 금불상 두 구, 금동과 은으로 만든 굽다리접시 각각 두 개, 유리파편과 다량의 유리구슬이 사리함 바닥에 깔린 채 발견되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사리함 윗면에 1㎝ 크기의 글자로 빽빽이 새겨진 명문(銘文)이다. 음각으로 새긴 해서체 글씨는 금동판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획의 흐트러짐이 없이 뚜렷하고 서체가 우수한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저 성인은 가만히 있으면서 혼탁한 세상에서 백성을 기르고 지극한 덕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신문대왕(神文大王)이 오계(五戒)로 세상에 응하고 십선(十善)으로 백성을 다스려 통치를 안정하고 공(功)을 이루고는 천수(天授) 3년(692) 임진년 7월 2일에 돌아갔다. 신목태후(神睦太后)와 효조대왕(孝照大 王)이 받들어 종묘(宗廟)의 신성한 영령(英靈)을 위해 선원가람(禪院伽藍)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성력(聖曆) 3년(700) 경자년 6월 1일에 신목태후(神睦太后)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 높이 극락에 오르고 대족(大足) 2년(702) 임인년 7월 27일에는 효조대왕(孝照大王) 도 승하하였다.
신룡(神龍) 2년(706) 경오년 5월 30일에 지금의 대왕이 부처 사리 4과와 6치 크기 의 순금제 미타상 1구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의 둘째층에 안치하였다.
이 복전(福田)으로 위로는 신문대왕(神文大王)과 신목태후(神睦太后) 효조대왕(孝照 大王)의 대대 성묘(聖廟)가 열반산을 베고 보리수에 앉는데 보탬이 되기를 빈다. 지 금의 융기대왕(隆基大王)은 수명이 강산(江山)과 같이 오래고 지위는 알천(閼川)과 같이 크며 천명의 자손이 구족하고 칠보의 상서로움이 나타나기를 빈다. 왕후는 몸 이 달의 정령과 같고 수명이 겁수(劫數)와 같기를 빈다. 내외 친속들은 옥나무처럼 장대하고 보물 가지처럼 무성하게 열매 맺기를 빈다. 또한 범왕(梵王) 제석(帝釋) 사 천왕(四天王)은 위덕(威德)이 더욱 밝아지고 기력(氣力)이 자재로와져 천하가 태평하 고 항상 법륜을 굴려 삼도(三塗)의 중생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육도(六道) 중생이 즐 거움을 받으며 법계(法界)의 중생들이 모두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빈다.

사주(寺主)는 사문 선륜(善倫)이다.
소판 김순원(金順元)과 김흥종(金興宗)이 특별히 왕명을 받든다.
승 영휴(令携), 승 영태(令太), 대나마 아모(阿摸), 대사 계력(季歷).
탑전(塔典)은 승 혜안(惠岸), 승 심상(心尙), 승 원각(元覺), 승 현방(玄昉), 대사 일인 (一仁), 대사 전극(全極), 사지 조양(朝陽), 사지 순절(純節)이다.
만든 이는 계생(季生)과 알온(閼溫)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탑 속에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무구정경(無垢淨經)>이라고도 하며, 704년 인도 출신의 스님 미타산(彌陀山)에 의하여 중국에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로부터 2년 뒤인 706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최초로 봉안되었다. <무구정경>은 탑을 세우는 것을 가장 큰 공덕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에는 <무구정경>에 근거하여 탑을 만들었으며 그러한 탑을 무구정탑(無垢淨塔)'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구정경>의 구체적인 법식을 살펴보면, 탑을 만들거나 수리할 때 다라니를 외우고 그것을 99벌 혹은 77벌을 써서 진흙으로 만든 토탑(土塔)에 넣어 탑에 봉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77억 또는 99억 개의 탑을 다른 곳에 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황복사의 금동제 사리함 네 면에는 99개의 사리탑을 음각하여 진흙으로 99개의 탑을 만드는 것을 대신하였다. 이와 같은 <무구정경>의 전래는 우리나라 탑 건립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다. 위에서도 말했듯 신라 사람들은 탑을 <무구정경>에 의거해서 세웠던 것이다.

▲구황동 모전탑터 ⓒ이지누

17:10 구황동 모전석탑지(模塼石塔址) 도착
분황사 탑과 유사한 형태의 탑이었지만 탑신을 이루고 있던 벽돌 형태의 돌은 허물어져 사라지고 없다. 동서남북의 감실 입구에 기둥 역할과 함께 감실 안의 부처님을 지키는 역할을 하던 인왕상을 세워 두었다. 현재는 남과 북을 지키던 인왕상이 남았고 또 다른 한 쌍은 경주 국립박물관 고분관 입구를 지키고 있다.
17:20 황룡사지(皇龍寺址) 도착
사적 제6호로 지정된 황룡사는 신라칠처가람지(新羅七處伽藍址)의 하나로 규모나 사격(寺格)에 있어 신라 제일의 사찰이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 있어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컸다. 황룡사는 528년 불교가 공인된 후 처음으로 세워진 흥륜사(興輪寺, 535~544년에 조영)에 이어 조영된 신라의 국찰(國刹)이다.
황룡사는 7세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眞興王)이 21세 되던 해인 553년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사찰로 고쳐 짓게 하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짓게 된 황룡사는 착공한 지 14년만인 566년에 대략의 건물을 완공하고 569년에 주위에 담장을 둘러 1차적인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 후 574년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황룡사장육존상(皇龍寺丈六尊像)이 만들어졌으며, 584년(眞平王 6년) 이를 안치한 중금당(中金堂)과 그 좌우의 서금당과 동금당이 완공되었다. 이후 60년이 지난 645년(善德女王 14년)에 신라 삼보의 하나인 황룡사목조구층탑(皇龍寺木造九層塔)이 조성되었다. 이 탑은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세운 것으로 643년에 세우기 시작하여 3년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진흥왕 때부터 시작된 황룡사의 조성은 4대왕 94년에 걸쳐 목조9층탑이 완공됨으로써 명실공히 신라호국대찰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후 745년(景德王 13년)에는 황룡사종(皇龍寺鐘)이 주조되었다.
이러한 황룡사는 특히 상륜부(上輪部)가 시작되는 철반(鐵盤)을 기준으로 위로 42척(약 15m), 아래로 183척(약 65m), 총 높이 225척(약 80m)인 거대한 목탑이 벼락 등으로 피해를 입어 수차례 수리되었고 경문왕(景文王) 때인 87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우는 등의 중수(重修)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몇 번의 수리가 있었으며, 1105년(고려 睿宗 원년)에는 황룡사를 전체적으로 크게 수리하였다. 그러나 1238년(고려 高宗 25년) 몽고병의 칩입으로 인해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다. 결국 황룡사는 9층탑이 최초로 조성되고 신라, 고려 두 왕조에 걸쳐 6차례의 중성(重成)과 함께 593년 동안 호국사찰로 숭앙받아 오다가 병란으로 완전히 없어지게 된 것이다.
17:40 황룡사지 출발
17:45 동궁과 월지
(안압지) 야경 관람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0 동궁과 월지 출발
19:15 신문왕릉 입구 도착

19:30 숙소(경주한옥고택 수오재(守吾齋)) 도착
19:40 저녁식사 겸 뒤풀이(삼겹살 숯불구이요리) 후 자유시간, 취침(다인실)

▲보문사지에서 황복사지 가는 길 ⓒ이지누

<11월 10일 일요일>


07:00 아침식사(숙소에서 한식백반)
07:50 버스 승차
08:20 황용골 입구 버스 하차, 시멘트 길 도보 이동
09:10 황둔사지(黃芚寺址) 도착

황둔사지는 <불국사고금역대기> 기록에 의하면 담화(曇華)라는 스님이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은점산(隱霑山) 본사(황룡사)에 들어 가보니 절이 왜적에 의하여 모두 불타고 없어서 마음에 분개를 느껴서 조선 인조대왕 원년(1623)에 황룡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는 말에 의하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2년, 당 정관 7년 계사(633)에 장인을 불러 약사상을 만들어서 절(황룡사)에 안치하고 황둔사(黃芚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 때(799~800), 5년 동안 가뭄이 들어서 산에 풀과 나무가 다 말라죽었으나 유독 이 산의 풀과 나무는 봄철과 같고 계곡의 물은 더욱더 불어나서 풀과 나무는 물을 흠뻑 먹었다 하여 이 산을 은점산이라 하고, 절은 황룡사라고 하였다. 그 후 강희(康熹) 40년(1701)에 절은 폐사되었으나 스님이 남아 있어서 불국사에 속하고 심적암(深寂庵)이라고 절의 이름을 바꾸고 그 이듬해 중창하였다. 이때 화주는 숭흘(崇屹), 사차(思次) 두 사람이었다. 또 강희 47년(1708)에 심적암 법당을 중창하였다. 이때 화주는 찬홍(贊弘)이었다. 강희 54년(1715)에 우연한 실화(失火)로 다시 중창하였는데 이때 화주는 국정(國淨)이었다. 그 다음 기록은 없어서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로 미루어 창건 당시에는 황둔사라고 하였고, 그 다음은 황룡사, 심적암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선덕여왕 2년에 약사상을 만들어서 절에 안치하였다고 전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유구는 없었다. 남아 있는 탑은 8세기말에서 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주초석이 남아 있는 법당터와 함께 석탑 두기가 무너져 있다. 덕분에 폐사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느낌은 물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사리공과 같은 석탑의 구조도 볼 수 있다.
09:40 황둔사지 출발, 시멘트 길 도보 이동
10:30 황용골 입구 버스 승차
11:00 감은사지(感恩寺址) 도착

<삼국유사> 권 제2 만파식적조에는 "제31대 신문대왕의 휘는 정명(政明)이며 성은 김씨로서 개요원년(開耀元年) 신사 7월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기록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같은 만파식적조 하(下)의 주(註)에 인용되어 있는 <감은사 사중기(感恩寺 寺中記)>에는 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사중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하여 이 사찰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붕어하여 해룡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開耀) 2年(682)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나의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 대개 왕이 내린 유조(遺詔)로써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이름지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년조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가을 7월1일 왕이 죽자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東海口)의 대석(大石)위에 장사하였으며, 속전(俗傳)에는 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하니, 이에 그 돌을 가리켜 대왕암(大王岩)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동서 석탑은 찰주 높이 3.49m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13.3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쌍탑으로서 이 탑을 완성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과 긴 시일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석탑이 가람 내의 다른 건물보다 먼저 조영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단, 석탑의 규모로써 판단할 때에는 이 설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석탑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넓은 면적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점에서도 금당보다 석탑이 먼저 조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대의 가람 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된 것은 탑이었다. 탑이 금당보다 높은 격에 있다는 것은 기단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한 유적에서는 탑 기단이 금당 기단보다 한 층씩 높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같은 가람에서 금당이 단층기단이면 탑은 이중기단이고, 금당이 이중기단이면 탑은 삼중기단인 것이다. 감은사에서는 금당은 이중기단이고 서탑(西塔)은 삼중기단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기단을 자세히 보면 석탑의 일반적인 이중기단 밖으로 장대석을 두르고 그 사이에 판석을 깔아 삼중기단을 이루고 있다. 경주 황룡사터에서도 금당은 채양 칸을 둔 이중기단이며, 목탑터는 가구식기단 밖으로 일명 탑구(塔區)라고 칭하는 장대석을 이중으로 둘러서 삼중기단을 꾸미고 있다.
초기 사찰에서는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던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처의 형상이 금당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탑의 규모가 차츰 작아지고 양식도 약화되는 반면, 부처를 안치한 금당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커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통일신라 이전에는 금당보다 탑이 높은 격에 있었다고 믿어진다. 불완전한 구분일지 모르지만 초기, 중기, 후기로 경과되면서 가람의 전체적인 배치와 탑의 규모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감은사는 통일직후에 가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서 중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므로 아직은 탑이 건물에 비하여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경주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11:30 감은사지 출발

▲장항리사지 오층석탑 인왕상 ⓒ이지누

12:00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 도착
사적 제45호로 지정되었다. 감은사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대종천(大鍾川)의 상류에 자리 잡은 절터는 본디 사찰의 명칭이 장항사여서 장항리가 된 것인지 마을 이름이 장항리여서 장항리사지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다.
절터에 남아 있는 서탑(국보 제236호)인 5층석탑은 금당터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15m 거리를 두고 있으며, 동탑은 계곡에 붕괴된 상태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부재를 모아두고 있다. 서탑은 1925년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舍利藏置)를 탈취하기 위하여 폭파한 것을 1932년 복원, 보수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당시 부서진 석불은 경주 국립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절터에는 온전한 형태로 남은 5층석탑인 서탑과 파괴된 동탑 그리고 석불대좌가 남아 있다. 두 탑의 문비 곁에 새겨진 인왕상은 다른 곳에 보기 힘들 만큼 빼어나다. 또한 석불대좌의 아래에 새겨진 안상(眼象)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가 조각되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12:40 장항리사지 출발
13:10 점심식사
(쌈밥, 우거지밥, 칼국수 중에서)
14:00 식당 출발
14:20 망덕사지(望德寺址) 도착

사적 제7호인 망덕사가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망덕사의 창건은 마주 보고 있는 사천왕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초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사경하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 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남아 있지만 제자리인지는 의심스럽다. 논둑에는 갖가지 주초석이 박혀 있어 폐사지의 느낌을 더한다.

▲망덕사지 목탑터 ⓒ이지누

14:50 망덕사지 출발
15:00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도착

사적 제8호이며, 울산-포항을 오가는 7번 국도 양쪽에 망덕사와 마주보고 있다. 사천왕사에는 경덕왕대에 <도솔가(兜率歌)> <산화가(散花歌)> 등의 향가를 짓고 피리를 잘 불어 달이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대사(月明大師)가 있었다. 또 석장사지(錫杖寺址)에 머물렀다고 전하는 신라 제일의 조각승인 양지(良志) 스님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부조된 녹유전(綠釉塼)이 출토되었다.
가람은 금당지(金堂址)의 앞에 동서로 목탑(木塔)을 세웠으며 금당의 북쪽 좌우 목탑과 대응되는 곳에는 경루(經樓)를 두었다. 금당지는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초석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며 건물지의 중간 부분에 불좌대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남아 있다. 동탑지는 130cm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으며 사방 3칸으로 초석이 남아 있다. 탑지의 중앙에는 118cm 내외 크기의 심초석(心礎石)이 남아 있는데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서탑지는 동탑지와 동일한 형태로 심초석의 사리공도 같은 크기이다. 탑지의 앞에 중문(中門), 금당지의 북쪽에는 강당지(講堂址)가 있고 이들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터(廻廊址)가 있다. 절터에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龜趺) 2기, 비신(碑身), 높이 2.4m인 1기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다. 절의 동편에 남아 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 수법과 등에 새겨진 음각 등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무열왕릉의 귀부에 버금가는 것이다.

▲사천왕사지 귀부 ⓒ이지누

15:30 서울로 출발. 제5강 마무리 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5강 답사로 Ⓒ폐사지학교


폐사지학교 제5강 참가비는 21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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