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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역사지리의 새 유람, <고을학교>가 문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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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인문역사지리의 새 유람, <고을학교>가 문 엽니다"

[인문학습원] 10월 개교, 교장에 최연 선생님, 제1강 경상우도 으뜸고을 상주(尙州)편

<다음 강의를 준비중입니다>

풍요로운 가을, 10월을 맞아 인문학습원이 <고을학교>를 개교합니다. 교장선생님은 최연 '고을' 연구전문가.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왔다.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 '낙동강 제1경'을 자랑하던 상주 경천대. 4대강 사업으로 많이 훼손됐다. ⓒ상주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 양진당(養眞堂)은 조선시대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挺)이 안동 임하(臨河) 천전리(川前里)에 있던 처가인 의성(義城) 김씨 문중의 99간 가옥을 옮겨지은 것으로 남방식 가옥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을학교

고을학교 제1강은 10월 12일(토요일) 당일로, '삼백(三白)의 고장'이며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으뜸 고을인 유서깊은 상주(尙州)를 답사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강 답사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고을학교 제1강은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尙州)를 찾아갑니다. 경상북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상주(尙州)는 고대 성읍국가(城邑國家) 시대부터 사벌국(沙伐國)과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고장으로, 신라시대는 9주(九州), 고려시대는 8목(八牧) 중의 하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었던 곳으로, 경상도의 대표적인 고을로서 신라 법흥왕 때 상주(上州)라 불렀던 것을 경덕왕 때 상주(尙州)로 개칭하면서 지금의 지명이 생겼는데, 달리 상산(商山)이라고도 불러 상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이름도 <상산지(商山誌)>입니다.

백두대간 상의 태백산 아래 황지(潢池)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압록강 다음 가는 큰 강으로, 안동(安東)에서 반변천(半邊川)을 비롯한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서쪽으로 향해 흐르다가 함창(咸昌)에서 내성천(內城川), 영강(穎江) 등 여러 지류를 받아들이고, 선산(善山)에서 감천(甘泉), 대구에서 금호강(錦湖江), 남지(南池)에서 남강(南江)을 합친 뒤 동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삼랑진(三浪津)에서 밀량강(密陽江)을 합치며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해로 들어갑니다.

이처럼 낙동강은 작은 물줄기를 모아 큰 흐름을 이루어[流域] 경상도를 관통하며 그곳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러 고을들을 풍족하게 적셔주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흐르는 강물이 여러 고을들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을 경상좌도(慶尙左道)라 하여 풍기, 예천, 안동, 칠곡, 경산, 청도, 영양, 양산 등 37개 고을이 있고 서쪽을 경상우도(慶尙右道)라 하며 상주, 선산, 성주, 고령, 합천, 거창, 함양, 하동 등 28개 고을이 있습니다. 좌와 우를 나누는 기준은 임금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여[背北南面] 통치를 함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볼 때 왼쪽은 동쪽이고 오른쪽은 서쪽이 되는 것입니다.

경상도(慶尙道)의 연원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서

고려시대 충숙왕 원년(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오늘날의 경상도 명칭은 이때 생긴 것이며,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洛陽)이었고 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고 해서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도 붙여졌습니다.

육로인 영남대로를 이용하여 한양에 갈 때는 반드시 낙동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기에 낙동강에는 좌도고을과 우도고을을 건네주는 나루가 여럿 생겼습니다만 그중에서 상주고을의 낙동진(洛東津)이 가장 발달된 나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로 또한 낙동강 하류 구포에서 거슬러 올라온 배들이 백두대간에 막혀 할 수 없이 낙동진에서 수로를 버리고 육로로 바꿔 조령을 넘어 충주 금천에서 다시 남한강 수로를 따라 한양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들 얘기하는 '낙동강 칠백리'는 하류 구포에서 상류 낙동진까지 거리입니다. 이처럼 상주 낙동은 육로의 역(驛)과 수로의 진(津)이 함께 발달되었던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경상도 백성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에 마주치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는 크게 보아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인데,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는 죽령을 이용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조령이 관로(管路)가 되어 주로 이 고개를 통하였는데 고개를 넘기 전에 이르는 가장 큰 고을이 상주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상주는 '백두대간 남쪽[嶺南]'의 관문에 해당하는 고을이며 낙동강 상류의 물류와 교통의 중심고을이기도 하기에 달리 상산(商山)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상주는 북으로는 조령 아래 첫 고을 문경(聞慶)과, 서쪽으로 속리산(俗離山) 너머 보은(報恩)과, 남으로는 백화산(白華山) 너머 황간(黃間)과, 동쪽으로는 갑장산(甲長山) 너머 선산(善山)과 접해 있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고을입니다.

상주의 이러한 지형적인 특징을 간파한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 "상주의 다른 명칭은 낙양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서 충청도,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임해서 김해, 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한 까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남장사는 상주 노악산 자락에 자라잡고 있다. ⓒ고을학교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를 예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한 것은 하얀색의 특산물이 생산되기 때문인데 쌀, 목화, 누에고치의 세 종류를 일컫는 것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목화는 생산이 거의 없어 그 자리를 곶감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쌀은 공검지라는 큰 못이 삼한시대에 이미 건립되어 상주평야 너른 들판에 넉넉하게 물을 대주니 생산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누에고치는 일본 강점기 때 상주농잠전문학교를 세워 잠업을 장려하여 그 생산량이 많았으며, 곶감은 상주의 상징 나무로서 집집마다 서너 그루의 감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감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놓은 감나무밭까지 많아 이 또한 생산량이 풍족하였습니다.

상주는 신라시대 이래 국방의 요새지로서 성곽문화가 발달해 온 고장으로 여러 산성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상주읍성은 왕산(王山)을 중심으로 평지에 석성(石城)으로 쌓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신문왕 7년(687) 다시 사벌주를 설치하고 성을 쌓으니 주위가 1,109보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향토지인 <상산지(商山誌)>에는 "석축으로 둘레가 1,549척, 높이 9척이며 성내에는 21개의 샘과 1개의 연못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14개월이나 점거하면서 성 둘레에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토성을 쌓으니 그 터가 남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1869년부터 수축하여 1870년에 홍치구루(弘治舊樓, 남문) 돈원문(敦元門, 동문) 진상문(鎭商門·相露門, 서문) 현무문(玄武門, 북문)을 중수하였는데, 일제가 1912년 성첩(城堞)과 문루(門樓)를 헐어버리고 1924년에는 마지막 남은 홍치구루마저 훼철되었습니다. 상주읍성 안의 읍치구역(邑治區域)에는 관아 터, 상주향교(尙州鄕校), 흥암서원(興巖書院) 등이 남아 있습니다.

상주향교는 경주향교와 더불어 규모가 큰 대설위(大設位) 향교로서 공자(孔子), 사성(四聖. 증자, 안자, 맹자, 자사), 송나라 2현(二賢. 주희, 정호), 동국18현(東國十八賢. 설총, 최치원, 정몽주, 안유,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송준길, 박세채) 등 25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상주향교의 배치는 전학후묘형(前學後廟形)으로 강학(講學) 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祭享) 공간이 뒤에 있는 형식이며 강학 공간은 명륜당(明倫堂)을 앞에 두고 양재(兩齋. 동재, 서재)를 뒤쪽에 둔 전당후재형(前堂後齋形)으로 되었으며, 제향(祭享) 공간은 양무(兩廡. 동무, 서무)를 앞에 두고 그 뒤쪽에 대성전(大成殿)을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놓아 그 위상을 높게 하였습니다. 향교의 학생수는 대설위는 90명, 중설위는 70명, 소설위는 30명으로, 상주향교는 90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흥암서원은 동국18현의 한 사람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배향하는 서원인데 그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상주에 세워진 까닭은 그가 상주목사를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주 출신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사위라는 인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흥암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서원철폐령에도 존치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서원답게 영남지방의 서원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낙동강 제1경' 경천대(擎天臺)

영남지방의 대부분의 서원들은 경사지에 세워 앞에 문루(門樓)를 세우고 높이의 차이에 따라 건물의 위계를 나타냈는데 흥암서원은 넓은 평지에 세워 문루도 세우지 않고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문을 삼고 있습니다. 영남의 향교와 서원이 전재후당(前齋後堂)의 형식을 취한 반면 전라도와 기호지방의 향교와 서원은 전당후재(前堂後齋)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흥암서원은 배향한 인물의 출신을 배려하여 전당후재의 형식을 따랐습니다.

읍치구역과 접해 있는 북천변(北川邊)에는 임란북천전적지(壬亂北川戰迹地)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영남으로 급파하였으나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懈)는 이미 도망을 간 뒤였습니다. 할 수 없이 이일은 곡식을 풀어 백성을 모으고 흩어진 군졸과 무기를 수습하여 선산을 거쳐 상주로 침공한 왜병에게 대항하였으나 관군 60여 명과 민병 800여 명은 왜적 1만 5천명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순절하였고 이일은 퇴로를 헤치고 문경으로 도망쳐 나옴으로써 상주는 함락되었습니다.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장렬히 전사한 백성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 교지를 통해 상주전역에 복호(復戶. 조세면제)를 내렸습니다.

상주의 동쪽 구역은 낙동강과 접해 있는데 이곳에는 사벌국의 유적과 경천대(擎天臺)와 양진당(養眞堂)이 있습니다. 경천대는 낙동강 1,300여 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온 곳으로, 경천대의 옛 이름은 '하늘이 스스로 만든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의 자천대(自天臺)였는데 지금의 이름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갈 때 수행했던 인물인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고향으로 낙향한 뒤 이곳의 풍경에 반하여 무우정(舞雩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짓고 머물면서 경천대라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명장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무예를 닦고 말을 훈련시켰다는 전설을 담은 흔적들도 경천대 바위 위에 말유구로 남아 있습니다.

양진당은 조선시대 문신 검간(黔澗) 조정(趙挺)이 안동 임하(臨河) 천전리(川前里)에 있던 처가인 의성(義城) 김씨 문중의 99간 가옥을 옮겨지은 것으로 원래는 정면 9칸, 측면 7칸의 '口'자형 맞배지붕 건물인데 지금은 퇴락하여 좌우가 약간 다른 'ㄷ'자형으로 변형되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대지가 약간 경사져 있기 때문에 건물을 땅에서 약 1m 정도 높여서 지은 다락집 형태로서, 이런 구조는 남방식(南方式) 가옥의 특징으로 뜨거운 여름에 지열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는 점 이외에 낙동강과 가까운 저지대에 위치하여 하천이 범람할 경우 집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침방(寢房)은 앞면 누각형(樓閣形), 뒷면 일반형의 두 줄로 배치한 겹집으로 구성되어 모두 구들을 들였는데 이는 한겨울 외부의 차가운 공기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는 북방식(北方式) 구조입니다.

▲ 동학교당이 있는 마을 ⓒ고을학교

남장사 아래 동네엔 곶감마을

상주의 북서쪽으로는 남장사(南長寺), 우복종택(愚伏宗宅), 그리고 동학교당(東學敎堂)이 있습니다. 상주 노악산 자락에 자라잡고 있는 남장사는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머물다 돌아온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절의 유래와 관련한 기록이 최치원이 쓴 사산비문 중 하나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비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 따르면 처음 세워질 때의 이름은 장백사(長柏寺)였으나 고려시대 각원국사(覺圓國師)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인 남장사로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보광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철불좌상(鐵佛坐像)과 목각탱(木刻撑)이 있습니다.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까지 금동불이 아닌 철불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남장사 철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철불 뒤의 목각탱은 후불탱화(後佛撑畵)로서 그림으로 그리지 않고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남장사 아래 동네는 곶감마을로 유명합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학(退溪學)의 정통을 계승했고, 선조 때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영남학파의 4세대 대표자로 추앙받았던 분으로 이황(李滉)의 학문를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 김장생(金長生)의 주기론적(主氣論的) 예학(禮學)에 맞서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사상적 지주였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나 우산(愚山)에 은거하며 주자학(朱子學)의 연구와 차세대 인재 양성을 위해 저술과 강학에 매진하였으며 무엇보다 그는 퇴계학에 뿌리를 두었지만 기호학파 준재들과의 학술적 대화를 마다하지 않았고, 남인에 속하면서도 서인계 명사들과의 공조를 모색했던 개방과 포용의 리더십을 지닌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우복이 은퇴 후 머물렀던 우복종택은 넓은 산등성이에 동향으로 지어졌으며 집의 구조는 튼 ㅁ자 형태로 ㄱ자형 안채, ㅡ자형 곁채와 함께 ㄷ자 형으로 구성되었고 그 앞쪽에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복종택은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솟을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높은 단 위에 서있는 사랑채를 마주하게 되는데 안채로의 출입은 별도의 중문을 두지 않고 사랑채를 돌아 안채로 들어가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내외 구분이 경상도의 다른 집과 달리 심하지 않다고 보여 집니다. 우복종택으로 올라가는 길 우측에는 작은 초가집과 커다란 누각 건물이 있는데 작은 초가집은 계정(溪亭)이라 불리는 건물이고 뒤에 있는 누각건물이 대산루(對山樓)입니다.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운동은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의 기포령(起布令)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이 상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100여 명이 학살당하고, 마침내 김석중의 유격대에 체포되어 모두 처형당하였으며 영남소모영의 해체로 끝이 났습니다. 그 이후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 남접 접주 김주희는 1920년경 상주 화북에서 동학청립교(東學靑立敎)를 세웠고 다시 상주 은척면에 동학경천교(東學敬天敎)를 세우게 됩니다. 동학경천교의 교당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곳에는 동학군들이 사용하였던 각종 문건과 깃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을학교 제1강은 10월 12일(토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제1강 여는 모임(버스 안)→남상주IC→상주향교(10:00-10:20)→흥암서원(10:30-10:40)→임란북천전적지(10:50-11:10)→경천대(11:30-12:10)→자전거박물관(12:20-12:40)→점심식사 겸 뒤풀이(13:00-14:00. <지천식당>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고추장석쇠구이요리)→양진당(14:10-14:30)→남장사(15:00-15:30)→우복종택(15:50-16:10)→동학교당(16:30-17:00)→ 화서IC→제1강 마무리모임(버스 안)→서울(20:00 예정)입니다.

▲ 고을학교 제1강 상주편 답사로 ⓒ고을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식수,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식사비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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