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강의 요점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수업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스쿨버스 안에서 교장선생님의 음식문화 강의
* 관방제림 길을 걸어가 죽녹원 대나무 숲 탐방
* '민속식당'에서 담양의 향토음식 죽순정식으로 점심식사
* 정자, 시냇물, 연못, 백화가 아우러진 명옥헌 탐방
* 우리나라 제1의 전통 민간정원 '소쇄원' 탐방
* <성산별곡>의 산실 식영정에서 김상윤 선생님의 가사문학 강의
* 비틀어도 비틀어도 다시 우뚝 서는 5.18국립묘지 참배
▲ 담양 대나무숲은 지금 한창 '우후죽순(雨後竹筍)'중 Ⓒ담양군 |
전북과 전남을 가르는 노령산맥의 갈재를 넘으면 전라남도 장성이 나오고, 그 왼쪽으로 담양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담양은 북쪽 노령산맥이 한 겨울 삭풍을 막아 기후가 온화하여 예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담양 곳곳에는 옛 선비들이 글 읽고 시 지으며 풍류를 즐기던 정원, 정자들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정자와 가사문학을 묶어 떠나는 인문지리기행의 단골지이기도 합니다.
[담양(潭陽)] 전라남도의 군으로 군청 소재지는 담양읍 객사리. 담양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조'에 이르면, "본래 백제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는데 신라 때 추성군(秋成郡)이라 바꾸었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담주도단련사(潭洲都團鍊使)를 두었다가 후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나주에 복속하게 되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 3년(1391)에 율원현(栗原縣)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태조 4년(1395)에 국사 조구(祖丘)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시켰다. 공정왕(정종) 1년(1398)에 왕비 김씨의 고향이라 하여 부로 승격시키었다가 태종 13년(1413)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삼았다" 하였다. 현재 담양군 행정구역의 골격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조처에 있다. 이때 담양군과 창평군을 합하여 담양군을 이루고 창평군 관할이었던 옥과면은 곡성군에 이관시키며, 그밖에 현 대전면, 수북면이나 남면을 이루는 지역은 광주시와 장성군의 관할에서 이속받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근세 이전의 담양군을 이루는 지역은 크게 보아 담양과 창평 두 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어 존속해 왔다. 담양의 지형은 동서보다 남북이 길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전체 면적 중 경지면적이 24.2% 임야 60.7%이다. 북부는 노령산맥의 추월산, 산성산, 광덕산 등의 산들이 전라북도와 도계를 이룬다. 서쪽으로는 병풍산 등이 솟아 있다. 남동쪽은 국수봉, 무등산 등이 솟아 있으며, 남서쪽은 전남평야와 연속하므로 분지상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영산강 지류인 용천, 담양천, 증암천 등의 지류가 군의 중앙을 흐른다. 군의 중앙에서 서남부에 걸친 담양천 유역에는 봉산들, 수북들, 고서들, 대전들 등의 평야지대를 이루며, 면적은 전체 면적의 4분의 1이 넘는다. 증암강과 오례강이 합류하여 영산강을 이룬다. 연평균기온은 12.5℃ 내외, 1월 평균기온은 -1.5℃ 내외, 8월 평균기온 26.5℃ 내외이다. 연강수량은 1,290mm 내외 다우지역으로서 대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음나무 등 아열대성 식물이 자란다. 특히 기후와 토질이 대나무가 자라기에 알맞아 대나무 밭의 면적이 전국에서 제일 넓다.
▲ 백일홍 너머 추월산 Ⓒ담양군 |
좀 서둘러 아침 6시 40분까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으로 오시어, 담양으로 떠나는 <음식문화학교> 스쿨버스에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험한 산길을 오를 일은 없습니다. 그냥 트레킹화 등 걷기 편한 신발과 햇볕을 가리기 위한 모자, 여름 날씨에 적합한 시원한 복장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10시 30분, 버스는 담양읍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366호 관방제림 끝 무리에 일행을 내려줍니다. 여기에서 숲길을 30여 분 걸어 죽녹원으로 갑니다. 죽녹원은 2003년에 조성된 대나무 숲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 사이로 난 고즈넉한 산책길이 일품입니다. 죽녹원 가는 도중에 잠시 보물 오층석탑과 석당도 구경할 생각입니다.
[담양관방제림(潭陽官防堤林)] 천연기념물 제366호. 담양의 관방제림은 담양읍을 감돌아 흐르는 담양천 북쪽 제방에 조성되어 있으며, 남산리 동정마을에서 수북면 황금리를 거쳐 대전면 강의리까지 2㎞에 걸쳐 길게 이어져 있다. 관방제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는 푸조나무(111그루), 팽나무(18그루), 벚나무(9그루), 음나무(1그루), 개서어나무(1그루), 곰의말채, 갈참나무 등으로 약 4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역 안에는 185그루의 오래되고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큰 나무는 300∼400년 전에 심어진 것이고, 작은 나무는 철종 5년(1854)에 황종림 담양부사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담양의 관방제림은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만들고 나무를 심은 인공림으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재해를 막는 지혜를 알 수 있는 역사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죽녹원(竹綠苑)] 2003년 5월에 조성한 31만㎡의 대나무 숲이다. 숲 사이로 난 2.4km의 산책로는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등 8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죽록원 입구의 돌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 오르면, 그 앞 대나무 숲에서 대나무 바람이 불어 와 지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 주는 진정 힐링의 숲이다. 죽림원 안에는 대나무 생태자료, 대나무 분재, 대나무 제품 등 대나무 관련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대나무 생태전시관도 있다.
12시 30분, 관방제림, 죽녹원 탐방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합니다. 대나무의 고향에 왔으니 점심도 죽순정식입니다. 죽순은 6월이 피크입니다. 가슴에 점을 하나 찍는 소박한 점심이 아니라, 향기로운 갖가지 죽순 요리와 푸짐한 남도 밑반찬이 아우러진 진수정찬의 점심입니다.
1시 30분. 점심을 끝내고 담양의 정원과 정자 문화의 진수를 탐방합니다. 이 탐방을 더욱 알차게 하기 위해 교장선생님과 친분이 깊으며 현재 담양에 살며 담양을 사랑하는 분들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선 1천 3백여 평의 넓은 뜰에 아름답게 자연을 풀어 놓은 명옥헌을 탐방합니다.
[명옥헌(鳴玉軒)]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소재 정원. '명옥(鳴玉)'은 옥구슬 소리라는 뜻으로, 정자의 서쪽 계곡에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정자는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아들 오이정이 지었다. 후산마을은 오희도의 외가 마을로, 그는 어머니 순천 박씨를 따라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그는 1614년(광해군 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치하에서 벼슬할 것을 포기하고 집 옆에 망재(忘齋)라는 작은 서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때 인조가 반정을 계획하며 뜻을 규합하기 위하여 세상을 돌았는데, 그를 찾아와 정사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정자 안에 '삼고(三顧)'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유비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한 것처럼 인조가 이곳을 세 번 찾아왔다는 뜻에서 붙인 현판이라 한다. 또한 인조가 찾아왔을 때 말을 매었다는 은행나무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인조반정 후 세상에 나갈 것을 결심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미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천연두에 걸려 41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오희도의 넷째 아들 오이정이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명옥헌을 짓고 정원을 조성하였다. 명옥헌은 백일홍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해마다 7, 8월이 되면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 정원 전체를 뒤덮는다.
▲ 옥구슬 소리 들린다는 명옥헌 Ⓒ담양군 |
2시. 명옥헌 탐방을 마치고 조선 제1의 민간정원 소쇄원으로 향합니다. 소쇄원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약간의 손질만 더하여 자연과 인공이 너그럽게 조화하는, 조선시대 원림문화의 상징이자 원림건축의 백미입니다. '소쇄원'은 상쾌하고 깨끗한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소쇄원(漅灑園)] 소쇄원은 조선 중엽 15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정원이다. 소쇄원의 주인은 조선 중종 때 사람 양산보이다. 그는 죽을 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정원을 남에게 팔지 말며,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라고 했다. 소쇄원은 건축물 하나하나, 심어진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모두 선비의 마음과 추구하던 이상을 담았다. 중종 때 개혁정치를 펼치던 조광조는 훈구파의 반발을 사 능주로 귀향을 가게 되고, 그를 따르던 양산보는 이곳으로 낙향하여 더 이상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10여 년에 걸쳐 소쇄원을 꾸며 자연을 감상하고 사람 만나기를 즐겼다. 이곳을 드나든 사람은 송순, 정철, 송시열 등 조선 중기 가사문학의 대가들이다. 소쇄원에 들어서면 대숲이 시원하게 우거져 있으며, 소쇄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작은 천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제월당, 광풍각 등의 건물이 있다. 계곡 옆 정자 광풍각은 '침계문방'이라 하여 머리맡에서 계곡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비의 방이라 이름 붙은 곳으로 소쇄원 48영중에서 제2영에 해당한다. 소쇄원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제월당은 '비 갠 뒤 하늘의 맑은 달'을 뜻하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책을 읽던 곳이다.
2시 30분. 소쇄원을 나와 도보로 식영정으로 향합니다. 식영정은 송강 정철의 가사 <성산별곡>의 산실입니다. 어려울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광주와 함께 한 김상윤 선생님께서 우리 가사문학에 대해 구수하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식영정(息影亭)]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정자.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이라고 불린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 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식영정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으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속에 잠겨버렸다.
3시 30분. 식영정 탐방과 가사문학 강의를 듣고 5.18국립묘지로 향합니다. 5.18국립묘지는 담양에서 차로 20여 분 걸리는 곳에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의의를 비틀어 국민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책동을 넘어, 이제 5.18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실상조차 조작하려는 망동이 설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5시. 담양 기행과 5.18국립묘지 참배를 모두 마치고 서울로 향합니다. 고속도로가 크게 정체하지 않는다면 8시 전후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죽녹원 풍경 Ⓒ담양군 |
음식문화학교 제32강의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 (교통비, 강의비, 입장료, 식사대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좌석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나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하시면 됩니다.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특히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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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문화학교 제32강 답사로 Ⓒ음식문화학교 |
김학민 교장선생님은 유명한 음식칼럼니스트로, 음식 칼럼집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와 술 칼럼집 <태초에 술이 있었네>를 펴냈으며, 네이버 블로그 '김학민이 꿈꾸는 세상'에 음식, 술, 건강, 문화, 시사 관련 글을 활발하게 올리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음식문화학교를 열며> 이렇게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
최초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 그대로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의 발견을 계기로,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슬기를 발휘하여 서서히, 또한 독특하게 식생활 체계를 세웠으니, 이것이 음식문화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요리하는 동물'로 진화되어, 각기 살고 있는 곳의 기후와 풍토에 따라 제각각의 음식문화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음식문화의 자연스런 분화와 발전이 있었으므로,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규범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한, 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먹든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또 특정한 먹을거리를 특별하게 먹게 된 것도 그 공동체 고유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 역사의 소산이므로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밀어 왈가왈부할 일도 아닙니다.
흔히 "모두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원초적 과제들을 의·식·주로 나누어 그럴 듯하게 분화하였지만, 그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기의 이야기이고, 사실은 식(食)의 문제, 곧 먹을거리 문제가 인간 실존의 근원입니다.
먹을거리 문제는 질서와 규범 속에서 평화롭게 조절돼 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사회면 기사의 행간을 뜯어보면 그 이면에는 모두 먹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국가 사이의 전쟁, 민족 사이의 분쟁도 땅과 자원의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 끝을 파보면 결국 먹는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맛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먹을거리 문제의 극단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먹을거리의 질과 독점을 둘러싸고는 계속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거대 식품산업이나 외식사업 등에서 양산되는 각종 인스턴트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 도전해 오고 있고, 세계 각국의 먹을거리들도 그 나라의 문화요소들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먹을거리의 홍수 속에서 음식문화학교는 우리 전통 먹을거리를 낳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특정 먹을거리와 그를 갈무리하는 맛깔스런 음식점, 그리고 그 주인과 공동체에 얽힌 이야기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곧 '먹을거리 이야기'를 넘어 '이야기가 있는 먹을거리'를 찾는 여정이 음식문화학교가 가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문화유산 답사의 개척자 유홍준 교수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유 교수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음식도 아는 만큼 맛있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음식문화학교는 요리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음식문화학교는 문화 속의 음식, 음식 속의 문화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음식문화학교는 음식의 현장을 찾아가 문화를 즐기거나, 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음식을 즐기는 기행의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곧 '금강산과 식후경의 조화'가 저희 음식문화학교의 교훈입니다.
앞으로 김치, 젓갈, 된장, 두부, 등심, 갈비, 불고기, 육회, 토종닭, 홍어, 비빔밥, 산나물, 막걸리 등 숱한 우리 전통 먹을거리의 명품, 명소를 찾는 기행이 쭉 이어집니다. 전문가 또는 교장의 음식문화 강의 후 맛있는 음식을 즐기게 되며, 재래시장 장보기, 산나물 뜯기, 쭈꾸미 잡기, 콩 털기 등의 체험행사도 함께 하며 유명 음식축제 여행으로 변화를 꾀하기도 하겠습니다.
음식문화학교는 월 1회, 매월 셋째 토요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명절, 연휴, 장날, 음식축제 등)에 따라 날짜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수도권은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당분간은 당일 코스로 한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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