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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를 위한 철학캠프' 2강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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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2강을 듣고

정순혁, 조현민의 수강후기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알렙 출판사 그리고 상상마당이 주최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의 첫 수업이 2013년 1월 2일(수) 서울 홍대앞 상상마당아카데미에서 있었습니다. 이번 철학 캠프는 '문학고전'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두번째 강연 '우리가 사랑에 눈뜰 때 - 에로스와 프시케 : 사랑의 시련'을 듣고 수강생들이 보내온 여러편의 후기중. 두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다른 수강생들도 이 글들을 통해 첫 강의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천상의 에로스는 존재할 수 없다.

조현민

감정은 선하고 악한 것, 천상적인 것과 통속적인 것 같이 일차원적인 기준아래 나뉘기에는 너무 변화무쌍하다. 그것은 개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감정은 그 자체가 형상을 띄거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평가할 때 그 감정이 불러일으킨 결과를 두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감정이 나쁜 결과를 불러오면 부정적인 감정이 되고, 좋은 결과를 불러오면 긍정적인 감정이 된다.

파우사니아스의 주장을 조금 빌려오자면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미추가 판가름 될 수 없듯이 감정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발산 방향이 너무도 다양함에도 그것을 섣부르게 일반화하는 것이 오히려 오류라는 점을 간과했다. 같은 논리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으므로 평가의 잣대가 되는 이상적인 감정 역시 존재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파우사니아스의 기준이자, 절대 미인 '천상의 에로스'도 존재 할 수 없다.

알기 쉽게 예시를 들어보자. 어느 날 예고 없이 등장한 성적표에 학생들은 모두 절망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성적표'라는 사건이 불러일으킨 '절망'이라는 감정의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절망감을 같은 정도로, 같은 기간 동안 동일하고 느낀다고 가정하자.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공부에 대한 투지를 불태울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로 인해 극단적인 절망감에 빠져 우울해 질 수도 있다. 같은 감정을 어떤 방향으로 승화하느냐에 따라 행동은 결정된다. 다른 예로는 사랑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해,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산다면 그것은 좋은 결과라고 인정된다. 그래서 사람들을 그들을 가정을 꾸리는 것을 축복하고 부러워하고 이상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축복받던 사랑이 다른 방향으로 승화되어 열렬한 짝사랑이 스토커가 된다면 그 격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은 부정적이고 심지어는 위법으로 판단되어 처벌을 받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장했다. 사랑에는 좋고 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가 하면, 부당하고 추하고 저속한 사랑이 있다고. 나는 그 말을 처음 봤을 때 황당했다. 그렇게 말하는 지식인들도 저속하다고 여기는 육체적 사랑아래 태어난 인간이다. 자신의 근본, 생명의 근원을 저속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판단했다. 과연 옳은 잣대를 댄 것일까? 육체적 사랑은 그저 욕구를 처리하기 위해 저속하게 사용될 때가 있고, 아름다운 새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감정은 얼마나 격정적이냐의 정도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그 어떤 미추도 구분도 할 수 없다.

"플라톤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감정의 우월관계

정순혁

나는 이번 수업의 논제인 "사람의 감정에 우열관계가 존재하는가"에 대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의 입장에서 논의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완벽히 플라톤은 아닌지라 분명 나의 의견이 들어가는 부분이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이 점은 고려해 주기를 바란다. 자, 이제 논의해 보도록 하자.

"감정의 우열관계가 존재한다."라는 말은 감정이라는 비물질적 존재 사이에서 위아래가 존재한다는 말인데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물질적인 요소와 비물질적인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물질적인 요소만을 보고 살아간다. 비물질적인 요소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어라 판단하기란 곤란한 존재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이 비물질적인 존재를 에이도스(eidos)라고 표현하였고, 이는 다시 이데아(idea)라고 번역되어 우리에게 소개되었다.(나는 내 편의상 이데아라 칭하겠다.) 이 이데아란 현실 세상이 아닌 그것을 초월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근원이다. 이 세상 만물에는 이데아가 있다. 우리 인간에게도 있으며, 우리 앞에 놓인 책상에도 이데아는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비물질적인 요소이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감정은 어찌 보면 그 자체로 이데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볼 수 없을뿐더러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인간을 초월하는 무언가라는 소리인데, 이는 곧 이데아를 말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인간을 초월하는 이데아라는 감정에 우리 인간이 부등호를 붙일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이제부터 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에 대해 서술하고 그에 대해 반박을 하면서 논의를 이어나가겠다.

먼저, 많은 사람들은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부등호를 붙인다. 예를 들어, 슬픔보다는 행복, 낙담보다는 용기가 좋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볼 때는 얼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열관계가 아닌 긍정적 부정적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흔히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의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자주 범한다. 그러나 절대로 긍정은 부정의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부정이 긍정의 위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그저 대립관계이지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는 소리다.

둘째로, 많은 과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감정이라는 것은 본래에 인간에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 신체의 엔돌핀 같은 호르몬들이 분비되면서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감정은 호르몬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지 우리 몸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 한번 플라톤이 되어보자. 플라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호르몬이라는 존재가 이데아의 세계에서부터 우리의 감정을 끌어오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말이다.

셋째(이 셋째 오류에서는 내가 21세기 플라톤이 되어 고대의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해보려고 한다.)로는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을 느끼는 대상의 우열관계에 따라 우열을 가리거나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 간에 우열관계를 보고 우열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플라톤의 대화편중 하나인 <향연>의 한 대목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것 자체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거나 수치스런 게 아니라 아름답게 행해지면 아름답고 수치스럽게 행해지면 수치스런 것이네. 그런데 수치스럽게라 함은 못된 방식으로 살갑게 대하는 것이요, 아름답게라 함은 쓸만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리하는 것이네. 그리고 못된 사람이란 혼보다는 오히려 육체를 사랑하는 저, 범속한 사랑을 하는 자라네. 그는 도한 확고부동하지 않은데, 이는 확고부동하지 않은 을 사랑하기 때문이네.(183d~e)"이는 여기서 "못된 사람이란 혼보다는 오히려 육체를 사랑하는 저, 범속한 사랑을 하는 자라네." 라는 부분은 위에서 말한 첫 번째 경향과 같다. 이는 다시 말해서, 정신보다 열등한 육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 범속하다는 말이다. 그럼 우리가 금을 사랑하는 것이 다이아몬드를 사랑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이는 완벽한 오류이다. 사랑이라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이데아를 고작 대상이 열등하다는 이유로 이데아의 완벽함을 부정하였다.(우열이란 어느 하나가 더 완벽하고 덜 완벽하다라고 본다면 이데아의 완벽함을 부정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듯 싶다.) 자, 이번에는 이 대목을 봐보자. "그런데 범속의 아프로디테에 속하는 에로스는 참으로 범속해서 닥치는 대로 무엇이건 상관없이 해내려 하네. 그리고 이게 바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에로스)지.(181b)" 이 대목을 보면 내가 앞서 말한 두 번째 경향을 알 수 있다. 느끼는 대상이 범속의 에로스라고 해서 그의 사랑은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에로스)라고 말한다. 이는 곧 현세에 대입한다면 깡패들이나 성폭행범들이 느끼는 감정은 모두 저급한 감정이라는 말이랑 다를 것이 없다.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까 첫 번째 경향에서도 말했지만, 이데아란 항상 완벽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한 이데아가, 이렇게 완벽한 상태로 존재하는 감정이라는 이데아가 사람의 성품이나 성향에 따라 어떤 것이 더 완벽하고 덜 완벽하게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중들이 생각하는 세 가지 오류에 반박함으로서 논의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나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이데아는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이며 이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그 완벽함을 부정하는 일이며 타당치 못한 행위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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