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알렙 출판사 그리고 상상마당이 주최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의 첫 수업이 2013년 1월 2일(수) 서울 홍대앞 상상마당아카데미에서 있었습니다. 이번 철학 캠프는 '문학고전'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첫 강연 '보다 자유롭게 꿈꾸기 위해 - 오이디푸스왕 : 운명의시련'을 듣고 수강생들이 보내온 여러편의 후기중. 두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다른 수강생들도 이 글들을 통해 첫 강의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현대 사회대의 운명-생물학적 운명
정순혁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것이 믿어지기는 할까? 현대사회는 많은 첨단 과학과 의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과거에 비해 종교에 덜 의지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운명이라는 개념은 우리 삶 속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아직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운명은 "유전자"다. 유전자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 다르게 존재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무슨 병을 얻을 지, 나의 두뇌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또 내 성격은 어떤지가 다 입력되어 있다. 즉 이 유전자라는 것은 "종교적 운명"이 아닌 "생물학적 운명"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두뇌 능력과 성격이다. 학교라는 작은 범위의 사회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경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작은 사회에서 우리는 저 두 가지 운명을 알아볼 수 있다. 일단 두뇌 능력, 쉽게 말해서 머리가 좋냐 나쁘냐이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수업을 듣는다. 같은 시간 같은 수업을 같은 선생님에게 듣는다. 그러나 시험을 보면 등수는 나오게 되어있다. 왜 그럴까? 바로 우리들은 모두 각기 다른 두뇌능력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같은 수업을 들어도 받아들이는 양이 다른 것이다. 사교육이나 개인적 능력이 보태졌을 수도 있다. 여기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다.
또 우리는 학교라는 사회에서 우리의 성격 또한 알 수 있다. 우리는 학기 초에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려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들은 숨기려고 하는 자신이 타인에게는 어쩔 수 없이 보이게 된다. 완벽하게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본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다 보이게 된다. 이렇듯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신의 성격이다. 즉 운명이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몸 속 유전자에 저장되어 있다. 거스를 수없는 숙명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유전자를 운명이라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까 내가 말하려다가 말았던 것인 바로 노력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능력을 뛰어 넘기 위해 노력이란 것을 더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했던 사교육이나 개인적 노력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공부를 할 때 절대로 학교수업에 100%로 의존하지 않는다. 사교육이나 개인적으로 문제집을 더 풀면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한다. 이러한 노력은 운명을 거스르기도 한다. 또 교육 방송에서 전국 상위권 학생들을 소개할 때 보면 전부 원래부터 상위권이었던 사람들은 드물다. 한번쯤은 바닥이었던 적이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저런 사람들은 원래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그런거야."라고 자기위안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들은 원래부터 머리가 좋았던 것일까? 우리들의 말처럼 그들의 두뇌능력은 뛰어 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격이라는 운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닥을 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게으르고 끈기가 없다. 위에서 말한 바닥을 쳐봤던 전국 상위권 아이들도 처음에는 모두 게으로고 끈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노력했다. 그들의 성격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로 하여금 그들은 전국 상위권이라는 운명을 거스르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노력을 하면 운명이라는 것을 바꿀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대사인 "아아 이제야말로 무서운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고, 그래도 기어이 들어야겠다"처럼 우리는 이제 운명을 받아들일 필요 없다. 운명을 거스를 정도의 노력만 있다면 우리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점쟁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이 자의 운명이 바꿨어!"라고 말이다.
확실히 선택권이 주어진 한 가지
조현민
예전에 오이디푸스 왕에 관련된 신화를 읽었을 때, 나는 그를 동정했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부터 피하려 발버둥 쳐도 결국 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그가 불쌍했다. 얼핏 보면 신들의 유희를 위해 인간이 사는 것처럼 보여 분하기도 했고,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을 보고 실망하기도 했다. 운명이 정해진다면 인간에게 애초부터 선택권과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데 2일, 수요일의 강의가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그 시발점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소포클레스라는 이름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특유의 색을 알 만큼 그의 관점은 분명했다.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의 시각으로 비춰진 세계를 그리는 데 능숙하다. 신들의 능력을 찬미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생존하면서 투쟁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린다. 소포클레스에게는 강의 내내 들었던 '아름다운 비극'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비극적인 운명이 주어짐에도 피하려 노력하는 간절함이 처음 내 마음을 끌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자라온 곳을 떠나고 권력 있는 양아버지에게서 멀어져 타지로 향하는 와중에 안심하는 청년. 폐륜임을 알기에 마지막까지 벗어나려 노력했던 오이디푸스 왕이 가련하지만 강인한 인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멋진 비극은 의연하게 다가온 운명을 받아들이는 오이디푸스 왕의 자세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말하는 자세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이미 내려진 신탁과 운명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결과라고 말하는 왕. 숨길 수 있었음에도 모든 것을 밝히는 지배자. 극 중에서 그는 말한다. "아아 이제야 말로 무서운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없고. 그래도 기어이 들어야겠다." 다가오는 진실이 무서운 것임을 아는 데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자신의 죄 값을 받는다. 게다가 '기어이' 들어야만 하는 자세를 보인다. 이 대사를 읽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주어진 운명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죄 값을 치르고 난 후에 그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질 것이 틀림없다. 아무도 예언하지 않은 스스로만의 인생이. 오이디푸스 왕은 두 눈을 잃었을지언정 새로운 삶과 그 의지를 선물 받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고대 그리스의 비극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모를 결정할 수도 없고 물려받을 유전자를 고를 수도, 능력을 결정할 수도 없다. 심지어는 자라는 환경조차도 선택권 없이 그저 태어날 때 부여 받는다. 그리고 주어진 요소들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가치관을 형성한다. 마치 갓난아이였던 오이디푸스 왕이 신탁을 받은 것처럼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결정되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형태만 희미해졌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확실히 선택권이 주어진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혹은, 환경과 타고난 것을 탓하는 수동적으로. 그것 하나만은 태어나는 인간들에게 선택권과 자유가 모두 평등하게 주어졌다. 남을 탓 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상벌을 주며 스스로 발전한다. 이미 결정된 결과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후 그 다음을 생각하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 그것이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 남긴 최대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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