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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9> 근대철학의 종합: 칸트 1

칸트의 기획, 세계의 명료화와 계몽된 인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주례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사실 한 주에 2~3시간 맛보기 강좌만으로 다양하게 전개된 서양근대철학사를 한 눈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면 이제 핵심적인 내용으로 바로 육박하는 수강생들의 날카로운 질문공세를 보면서, 매 주 바뀌는 강사 선생님들도 적잖이 놀라는 눈치이다.

제9강에서는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의 강의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철학을 개관해보았다. 칸트는 근대철학 전반부에 첨예하게 개진된 여러 철학적 조류들을 종합하여 계몽주의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자, 인식론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의 사상적 터를 닦았다. 그런 위대한 철학자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사상을 단 2회 만에 속성으로 살펴보고 함께 고민할 문제들에 관해 저마다의 생각들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칸트의 유명한 세 가지 '비판서'를 중심으로 칸트의 철학을 개관하고, 그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접목시키고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였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제10강에서는 칸트가 후반부에 주력했던 실천철학에 관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다 심도 깊은 문제제기와 논의가 이어질 것이다.

강지은 교수는 근대 시민사회를 "인간이 신에게서 벗어나는 시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시대"로 규정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 과정 속에서 철학자들은 신을 배제하고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자연'은 크게 보자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이지만, 근대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말했던 "계몽되지 못한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런 면에서 근대철학은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쟁하고 계몽에 대해 논의하며 인간의 이념을 설정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 배경 위에서 칸트를 "계몽과 의사소통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명백하게 예견한 철학자"로 본다면, 그의 철학적 기획만큼 근대인들이 가졌던 세계 이해의 욕망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자연이라는 세계와 인간이라는 내면을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서로 연결하고 조화시켜서 설명하려는 자유를 향한 꿈 말이다. 칸트의 일관성 있는 비판철학은 근대철학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며 근대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재정립했다. 또한 유럽의 사상계는 칸트를 기반으로 해서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의 풍부한 유산을 낳았고, 이후 신칸트학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칸트는 철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칸트는 '계몽'이 "인간의 보편적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길이며, 다른 사람과의 소통 속에서 사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해하고 사유하려는 자율성을 통해 세계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성립될 수 있고, 그러한 자율적인 도덕성과 반성적 판단력을 통해 인간이 진정 참되고 평화롭게 타인(자연)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원대한 기획. 그것은 베이컨의 우상타파론과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라는 세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의 욕망이 도달했던 어느 근대인의 숭고한 꿈이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객관이 주관에 의해 구성된다

칸트는 자신이 기획한 일련의 비판철학을 통해 그 계몽의 기획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여기서의 '비판(Kritik)'이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삐딱한 자세의 비난이 아니라, 기존의 사상이나 담론을 모두 철저한 사유 속에서 재검토해보려는 시도이다. 칸트는 자신에 앞서 대립되던 합리론과 경험론의 입장에 모두 만족하지 못하고, 두 사상적 경향들은 "자연과학적 진리의 일면만을 설명해 줄 뿐 과학적 지식이 갖는 실질적 진리성을 확고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칸트가 생각하는 실질적 진리란, 뉴턴의 물리학이 그러하듯이 "보편적 필연성과 경험적 객관성의 양면"을 모두 갖추는 것이어야만 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귀납법과 연역법 중 어느 한 쪽에만 의존한 세계 이해 방식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구현하기 위해서 불충분했던 것이다.

먼저 칸트는 무모순성을 진리의 조건으로 여기는 합리론자들의 입장에 동의하여 수학이나 물리학의 기초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의 존재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우주론과 신학 및 심리학을 포함하는 사변적인 형이상학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칸트는 진리의 경험성과 객관성을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론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동의를 표했다. 인간은 경험하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우리의 감각은 인식의 재료를 제공해주지만, 그것을 통해 성립하는 우리의 지식이나 인식은 특정한 상황에 한정된 것이지 사물 자체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에 대해 감각경험으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보편성이나 필연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만약 인간이 경험을 통하지 않는 생득적인 관념을 통해서만 인식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합리론과 경험론의 오래된 논쟁과 대립을 종합하여 칸트는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사물 자체(the thing-in-itself, Ding an sich), '물(物)자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사물에 대한 개별적인 현상은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 자유, 영혼불멸 등은 그것을 실체로서는 인식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 개념화하여 생각은 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칸트는 인간은 경험을 수반하지 않는 "선천적인 인식의 틀"을 갖추고 있으며, "그 틀을 통해 대상을 인식-선천적 종합판단-한다는 획기적인 사유의 혁명을 이루어냈다." 칸트는 인식론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에 맞먹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했다. "종래에는 주관이 객관(대상)에 의거하여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로 객관이 주관의 선천적 형식에 의해 성립된다는 인식방법상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통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체 단지 사변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을 구분하여 기존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궁극적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

당시 사람들은 칸트의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보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나름의 원칙과 신념을 치열하게 준수하는 생활 속에서 자율적인 삶을 구현하고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를 누리려고 했는지 모른다. 칸트가 철학자로 살면서 품었던 궁극적인 물음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런데 강지은 교수는 여기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이다'라는 형식적 규정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간'라는 질문은 "이성적인 인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규정해보겠다는 시도이다." 즉,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나 동의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자신의 이러한 진지한 문제제기인 인간에 대한 규정을 다음의 세 가지 물음으로 구체화하고, 그것에 스스로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체계를 구축했다. (1)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2)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

칸트는『순수이성비판』에서 앞서 말했듯이 자연의 세계가 인간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학문적인 지식으로 정립 가능한지에 대해 철저히 따져 물었다. 이렇게 '인식의 구성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이론이성의 체계를 구축한 칸트는 그것이 가진 한계와 고립성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말하듯이 이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는 실천이성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의 세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 같은 이론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려고 했는지는 그의 다음 비판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 법칙

그는 여기에서 "자유와 도덕 법칙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론철학 후에 진행될 실천철학의 원리적 토대"를 닦았고, 자연과 인간의 정신을 함께 설명하려고 하다가 난관에 부딪힌 근대철학의 난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칸트는 윤리성의 원천을 서양의 전통철학처럼 "자연, 공동체의 질서, 행복에의 희구, 신의 의지 혹은 도덕적 감정" 등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타당성이 검증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윤리학을 다루며, 앞의 이론이성(대상의 객관성을 구성하는 주관성)과 마찬가지로 실천적 영역에서도 객관성은 주체 자신의 자율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하려했다.

칸트는 도덕의 원천을 "자율(Autonomie), 즉 의지의 자기 입법성"에 두고, 스스로 규칙을 세워서 지켜나가는 자율적인 인간성을 긍정했다. 강지은 교수는 이러한 칸트의 도덕철학을 "모더니티 철학의 핵심 명제인 '주체의 확립'을 철학적으로 논증"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체의 자율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Freiheit)와도 연관된다. 강지은 교수에 따르면, 근대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자유'는 "칸트에 의해서 철학적 토대를 얻었으며, 그런 점에서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근대 철학의 기초를 닦은 저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 개념을 바탕으로 경험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이념들과 인간으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을 아우르려고 했다.

칸트에게 있어 자유의지를 가진 도덕적 인간은 선천적으로 가능한 존재이다. 윤리 교과서에 나왔던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법'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 법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도덕성이 인간에게 의무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스스로 생각해낸 도덕적 준칙을 지키려는 행동을 통해서, 즉 유일하게 그 자체로 선한 것인 '선의지(善意志)'를 가진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도덕적 실천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선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율성이다. 인간은 착하게 살아가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로봇이 아니며, 정해진 법칙과 경향성에 따라서만 행위하는 좀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강지은 교수는 칸트가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던 것처럼, 실천적으로도 세계 속에서 인간을 도덕 실천의 중심에 위치시켰다"고 평가했다. 칸트는 도덕감도 인식의 틀처럼 하나의 법칙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으며 내적 체계를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칸트가 바라보는 세계는 보편적인 인과율에 따르는 순수하게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기계적인 체계로만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행위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인간 내면의 체계를 통해 인간은 자연 속에 있지만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며, 자연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실천만이 이 세계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칸트에게 있어서 내 머리 위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빛과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 법칙은 완벽하고 필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세계의 조화로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이성비판』의 작업은 결국 『순수이성비판』에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당위의 세계, 인간의 내면, 자유의 영역을 체계화시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보다 일관된 답변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주체는 세계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칸트는 이제 남은 과제로서 자연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감성적 영역과 인간의 자유와 도덕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초감성적 영역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칸트에게 이 문제가 중요했던 것은 두 세계를 매개시켜 줄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게 도덕이나 자유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실천하지도 못할 자유라면, 선택할 수 없는 도덕적 행위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실천할 의지를 가진 인간은 난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은 어느 지점에서는 만나야" 하는 것이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가 말하는 '판단력'은 인간의 다른 인식 능력인 지성(자연의 영역)이나 이성(자유-도덕의 영역)과 달리, "고유의 입법영역"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판단력은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법칙을 탐구하기 위한 자기의 원리를 갖는다. 칸트는 그것이 "주관적 원리이면서 동시에 선천적 원리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추론해가며, 그 원리를 '규정적 판단력'에 대비되는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규정적 판단력은 이론 인식의 영역에서 "보편이 주어져 있는 경우, 특수를 이 보편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을 말하며, 반성적 판단력이란 실천 영역에서 "오직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이 특수에 대하여 보편을 찾아내야 할 경우"의 판단력을 말한다.

법칙에 포섭되지 않는 우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통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칸트의 필사적인 노력은 이러한 반성적 판단력을 "체계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매개체로 사유하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자연에 무규정적으로 남아 있는 다양한 것들에 법칙을 제공하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인데, 강지은 교수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판단력의 매개 작용을 통해 감성적인 자연의 세계는 지성적인 자유의 세계로 향하게 되고, 자유의 세계에 자연의 세계가 종속됨으로써 두 세계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자연에 대한 자유의 우위, 이론이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우위를 통해 두 세계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고 하나의 세계로 융합된다."

그런데 그 융합의 순간은 심미적 체험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라는 인간 정신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연결되는 그 순간은 반성적 판단력이 작동하여 '미적 체험'을 하게 되는 때이다. '칸트 미학'은 그 사상이 내적 체계에서 자연 세계와 자유의 영역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는 예술작품은 인간의 판단력을 통해 무한한 이념의 세계(신, 자유, 도덕, 최고선 등)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과 자연의 근원이 일치함을 느끼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자신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것들에서는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칸트에게 있어 인간이란, 도덕과 아름다움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의 의지를 자연 세계에 펼쳐나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주체는 '공통감(sensus comunis, common sense)'이라는 선천적인 소통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느낀 이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칸트의 공통감이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며,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지, 결국 우리는 칸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지, 보다 흥미진진한 문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과 선함을 사랑하는 것은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미적이며 도덕적인 인간은 "결코 홀로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 전혀 유사성이 없는 영역에 거주하는 대상들인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이 결국 하나의 세상을 이루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 눈으로 보는 서양근대철학사 제 10강 박지용 경희대 객원교수의 '세계시민은 가능하다 : 근대에서 현대로의 변화 이념 : 칸트2'는 1월 19일 저녁 7시 30분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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