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요약하는 글에서 문제의식이 있는 글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요약하는 글에서 문제의식이 있는 글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3강 후기 수상작 및 강평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 상상마당이 공동 주최한 '18세를 위한 철학캠프' 3강을 듣고 8명의 학생이 수상 후기를 보내왔습니다. 이 가운데 최소영, 심상욱 학생의 글이 수상작(우수상)으로 결정됐습니다. 심사를 맡아주신 김성우 선생님(상지대 교양학부 겸임교수)의 강평과 함께 두 글을 싣습니다. 수상 학생에게는 소정의 책을 부상으로 드립니다. 편집자

요약하는 글에서 문제의식이 있는 글로: 18세의 철학 3강 후기 강평

김성우(상지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우리는 흔히 글쓰기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으로서의 글쓰기 관(觀)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자신의 글쓰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의심의 여지없이 나와 같은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얼굴을 갖지 않기 위해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세요. 그리고 내게 동일하게 남아 있도록 요구하지 마세요."

이 말의 의미는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려는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이렇듯 글쓰기는 자신을 죽이는 행위가 됩니다.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기존의 고정 관념에 물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머물지 않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의미하지요.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이로 인해 문제의식이 생겨납니다. 문제의식이 있어야 글도 생동감이 넘치게 됩니다. 이 글쓰기가 갖는 생동감에 의해 자기혁신과 사회혁신도 가능해집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바로 세우고 사회도 바로 세우는 단련과정입니다.

이번 3강 후기들은 지난 후기들에 비해 대체적으로 글의 형식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발전을 보여줬습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여전히 부족한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글은 어문규정을 잘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단락 구성과 문장 연결성도 대단히 좋아졌습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강의내용을 충실하게 정리한 점에서는 상당히 발전한 글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한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는 글은 요약에 불과합니다. 강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세우려고 시도했어야 합니다.

또한 정의와 사회정의, 정의감과 정의의 원칙이라는 기본 개념들이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내용이 혼란해진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의내용을 정리하면서 이로부터 발전시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충실한 전달을 하기에는 분량이 적은 글들도 있었습니다.


이상의 지적으로 개별학생들의 글에 대한 강평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번 후기 공모에는 최우수작으로 선정할 만한 글이 없는 대신 대부분의 글들의 수준이 비슷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문제의식이 좋은 두 편을 우수작으로 선정하겠습니다. 최소영 학생의 글은 사회정의에 대한 예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정의가 필요한 사회현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사회정의의 개념을 정의한 후 강의내용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세워보려고 시도한 점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흔한 감상문 스타일로 끝나버린 점이 아쉽습니다. 심상욱 학생의 글도 동일한 구성을 가지고 강의내용을 잘 정리한 점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문제의식이 덜 드러난 점과 마찬가지로 결론이 피상적인 것으로 그친 점이 아쉽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서두에서 사회정의에 대한 개념 정의에서 여러 관점들과 그 관점들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회정의에 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벤덤이나 노직)의 관점, 진보적 자유주의자(칸트와 롤스)의 관점, 보수적 공동체주의자(유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진보적 공동체주의자(샌델, 매킨타이어, 테일러, 왈저)의 관점 및 혁명적 사회주의자(마르크스)의 관점 등을 제대로 정리했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이해하면서 강의를 한 교수님의 입장을 정리하고 동시에 본인의 입장을 정리한 후에 두 입장의 일치여부에 따라 교수님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찬성이나 반대를 논증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을 가지려면 그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표시한 지적인 지도를 가지고 그 주제가 요구하는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강렬한 문제의식이 생겨야 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정의감(正義感)이 발동이 그것이겠지요. 한마디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혁신하는 실험입니다.

최소영

5.18 민주화 운동에서부터 현재의 반값 등록금 시위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시위의 역사는 정의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 5.18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반값 등록금 시위는 대학생들은 물론 부모님들까지 억압하는 과다한 등록금에 대해 반대한다. 이처럼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따라서 시위를 하고 그들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체 이 '정의'라는 것, 특히 '사회정의'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이처럼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이다. 하지만 사전적인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정의에 대해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전적 의미가 아닌 진정한 정의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지금까지 내려오는 철학적인 논쟁을 따라간다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의 그들 자신만의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한 정의에 대한 이번 철학캠프는 그 수많은 정의들 중 하나인 '홍길동의 정의'에 대해서 박민철 건국대 외래교수님께서 강의해주셨다.

교수님의 강의에 따르면 정의의 시작은 '반발'이라고 하셨다. 즉, 지배자들에 의해 정당한 사회적 금지사항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당하지 못한 것이 될 때 그에 대한 반발을 하는 것이 정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5.18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의 억압에 반발하였다. 반값 등록금 시위도 경제적인 억압에 대해 반발했다. 홍길동은 적서차별에 반발하였다. 아주 단편적인 부분이지만 이처럼 정의는 뭔가 불편한 상황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의가 가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내용도 정말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정의라는 것은 딱딱하고 논리적인 사유과정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와는 다르게 생각한 철학자들의 주장은 나에게 교훈을 주었다. 흄은 감정적인 요소도 정의로움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의감'을 내세웠고 솔로몬은 정의를 지키려면 감정적으로 느껴야한다고 했다. 마르크스 또한 사회적 차별로 인해 느끼는 절망감이 정의로움을 찾게 되는 중요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감정에서 정의가 시작된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그에 대한 혐오감, 복수심 같은 감정이 느껴져야 반발로 인한 정의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과거에 비해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열정이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정치인들의 비리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잘못됐다고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한 나라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비리에 대해 몸과 마음이 지쳐서 반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가 더 걱정스럽고 우울하다. 정치인들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정의로운 사회가 현실이 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금기사항을 가르치는 '아버지란 이름'의 상징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홍길동의 경우 아버지가 가르쳐주시는 사회적 금기사항을 배울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르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이 때문에 정의에 더 가까이 서 있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홍길동이 사회적 금기사항인 도둑질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내용이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또한 현실로 적용해볼 때 정의를 홍길동처럼 약자인 사람들의 저항수단이자 차별의 극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역차별로 이어지지 않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심각해진다면 '정의'라는 가면을 쓴 약자들이 사회정의를 악으로 물들이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강의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교환정의와 분배정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절대적 평등을 중요시하는 교환정의와 현실적으로 생각하여 상대적 평등을 중요시하는 분배정의는 정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했다. 지금까지 정의라는 것은 항상 모두에게 평등하며 똑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분배정의에 따르면 완전히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강의가 거의 끝나갈 쯤에 분배정의에 대한 시선을 바꾸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모두들 물질적인 교환만 생각하는데 정신적인 교환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정의에 대한 궁금증들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정의가 대체 무엇이길래 사람들은 정의를 그토록 열망하는지, 그들의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나의 의문은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그들의 정의를 실현함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적인 만족감, 승리감을 추구하는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든 첫 번째 생각은 나만의 '정의'를 세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정의에 의해 살아가고 희망을 가지며 어떤 고난이 닥쳐도 나의 정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그런 것. 좀 더 나아가자면 모든 이가 그들만의 정의를 가져서 말 그대로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에게도 현실은 대부분 부정과 부패로 가득한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또한 극복할 수도 있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에 부패를 척결할 희망이 없지는 않아보인다. 모두의 정의가 하나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심상욱

"부자는 세금 적게 내고 가난한 사람만 굶어죽는 세상.", "목욕탕 인종차별논란, 피부색 다르다는 이유로 출입거부.", "모 대학교수, 초등학교 딸에게 욕설 문자를 보낸 친구 폭행" ... 등 요즘 심심치 않게 일들이 터지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이러한 문제들의 근원엔 사회 정의가 있다. 그렇다면 사회 정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바른 사회 정의가 쓰일 수 있을까? 이 강의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정의에 대해 폭넓게 알아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올 것이다. 요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정의'에 대해 올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정의(政義)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전에서는 정의에 대해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정의에 대한 의견이 많아서 하나의 말로써 설명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의에 대해 알기 위해서 정의가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의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광범위한 개념으로 대립하는 개념들 간의 조화로운 상태에서 찾았다. 그러나 16~18세기로 오면서 정의는 단순 조화를 넘어서 인간 행위의 기준으로 적극적,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된다. 19세기 이후 현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사회적 제도들이 문제가 많아지자, 정의는 사회와 제도에 대한 적극적 평가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때 말하는 정의가 '사회정의'라고 할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정의에 대한 탐구를 통해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이번 강의에서는 사회정의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홍길동전에서 찾아보고 오늘날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교수님께서는 일단 홍길동전에서 사회정의가 드러나는 핵심적인 부분을 5가지로 나누셨다.
첫 번째 장면으로 <홍길동전>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평생에 서러운 것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못하는 것입니다."가 나오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 나타난 사회정의를 알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가지는 역할을 알아야 한다. 철학자 자크 라깡은 아버지는 '나'를 사회적 존재로 진입 시키는 존재라고 말했다. 사회적 존재가 된 '나'는 사회 속에서 질서와 규율인 사회적 금지와 금기사항을 몸소 느끼게 된다. 문제는 사회적 금기가 때론 강자에 의해 바뀌곤 한다는 것이다. 강자에 의해 바뀐 사회적 금기는 '인간답게' 사는 삶을 방해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적 금기는 억압과 강요로 바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홍길동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르지 못함으로서 사회적 억압과 강요로부터 멀어진다고 볼 수 있고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홍길동은 '정의'와 더 가까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적 억압 과 강요를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이 '정의'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장면은 홍길동이 자신을 죽이러온 자객을 만나고 그 자객에게 분노와 복수심을 보이는 부분이다. 홍길동은 재물을 탐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이유로 자객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복수를 한다. 이는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주는 홍길동의 행동은 정의와 연관된다. 교수님께서는 정의의 근원을 가슴이라고 말하셨다. 부정의를 보고 가슴에서 나오는 분노와 복수심을 느끼는 것이 정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며 정의로움의 실현을 위한 원동력을 얻게 된다.

세 번째 장면은 홍길동이 자신이 겪은 적서차별을 한탄하는 부분이다. 홍길동은 자신의 능력과 자유를 펼칠 수 있는 용꿈이라는 존재 조건을 갖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노비의 자식이라는 존재 조건은 그의 능력과 자유를 제한한다. 그의 능력을 방해하고 그의 인생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노비의 자식'이라는 칭호는 적서차별로 인한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홍길동이 살던 시대의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적 차별문제를 통해 차별의 극복수단, 약자의 저항수단으로서의 정의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요즘 시대의 사회적 차별은 우리 주변에 많이 존재한다. 이 차별의 피해자인 사회적 약자가 생긴다. 이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격차를 줄여가는 것에서 오늘날의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네 번째 장면은 홍길동이 탐관오리의 재물을 뺏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번 정의는 분배정의와 교환정의로 나눌 수 있다. 분배정의는 절대적 평등, 즉 절대적으로 동일한 조건의 사람들 사이에서의 교환으로 보며 법에 의존한다.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조건이 사회 속에서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분배정의는 어떤 것인가. 분배정의는 상대적 평등이다. 즉 산술적 평등이 아닌 비례적 평등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홍길동의 행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홍길동은 교환 정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당하지 못하고 분배정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옳은 행동이 된다. 그럼 어떤 쪽에 더 큰 가치를 두고 그의 행동을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장면은 홍길동이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건설하는 부분이다. 그 곳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으로 그려졌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곳, 즉 유토피아적인 삶의 목표로서의 정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해 질 수 없는 정의 속에서 시대의 흐름과 각자의 상황을 고려해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에 다가갈 수 있다.

지금까지 <홍길동전>을 통해 그 속에 드러난 사회정의에 대한 강의 내용이었다.
교수님께서 강의의 마지막에 우리에게 던지신 질문이 있다. "이 5가지 정의 중에 가장 인상이 깊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질문을 듣고 바로 떠올랐고 듣는 내내 가장 공감하고 주의 깊게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인 네 번째 교환과 분배의 기준으로서의 정의가 생각났다. 교수님께서는 교환과 분배 정의에 대해 설명하실 때 농아의 손수건을 산 경험을 말해주셨다. 실제로는 1000원정도의 가치 밖에 되지 않은 손수건을 5000을 주고 사셨다고 하셨다. 이는 교환정의를 위반한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이 5000원을 주고 산 것은 1000원 정도의 가치인 손수건 뿐 아니라 4000원의 만족을 사셨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살면서 자란 배경과 큰 관련이 있다.


초등학생시절 아버지께서 무료 진료를 하러 가시면 가끔씩 따라가곤 했었다. 그럴 때면 그 곳 사람들의 아버지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 나에게 까지 전달될 정도로 느껴졌고, 내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좋은 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의 가치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의 그 신선한 경험은 나에게 있어 봉사와 기부를 일방적인 도움의 개념이 아닌 교환정의 분배정의를 초월한 만족과 행복의 공유로서 여기게 했다. 어떤 사람은 100억을 기부한 사람의 행동을 대단 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로 혹은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매우 적다고 생각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이런 큰 돈을 기부한 사람들이나 거창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의 폐해일 뿐이다. 작은 일이라고 여기는 일을 한 사람이나 스케일 크게 한 사람이나 그들이 얻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생각마저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자신의 여력과 관계없이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던 중 교수님께서도 다섯 번째 정의에서 언급하신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이 떠올랐다. 전에 읽어본 책이었고 이 책에서 내가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백성 모두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올바로 행하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지금 내가 맡은 일을 올바르게 행하는 것, 즉 학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이다. 냉철하게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나는 그것이 사회정의 실현의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에는 다섯 번째 내용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번 강의를 통해 사회 정의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내가 했던 경험이나 생각들 그리고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고, 마지막으로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민해 보고 앞으로도 나 스스로 사회정의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봐야한다고 느꼈다. 한 가지 이 강의에서 아쉬웠던 점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이상 국가에 관심이 많아 전에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 읽어 본적이 있는데 이번에 시간이 부족해서 다섯 번째 이상 국가에 대한 내용에 대해 직접 들어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재미있게 수업을 이끌어 가시고 '생각'을 깊이 있게 할 수 있었던 시간이 돼서 좋았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돈으로 얻을 수 없는 30프로에 대해 느끼고 온 시간이 된 거 같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