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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지성은 회의(懷疑)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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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지성은 회의(懷疑)로 끝난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7> 개인주의 인식론 - 흄

"궤변과 망상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책은 불 속에 던져 버려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주례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에서는 '근대'의 지형도를 여러 철학자의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베이컨과 뉴턴에서 시작한 '근대적인 것에 대한 탐사 여행'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대륙합리론을 거쳐 이제 영국경험론 철학의 말미에 이르렀다. 지난 시간에는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중심으로 한 근대 정치철학의 특성에 대해 살펴봤는데, 자본의 운동과 사유재산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국가 체제와 대의민주제의 틀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시간에는 주로 경험론적 인식론을 살펴볼 차례인데 남기호 연세대 외래교수와 함께 만나 본 철학자는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었다.

흄은 경험론 철학을 완성한 계몽철학자이자 회의주의자, 자연주의자, 자유의지와 필연적 법칙의 양립론자,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한 센티멘털리스트라는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 또한 그는 영국에 정치적으로 종속된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식민지 지식인의 자의식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끊임없이 회의하는 삶을 통해 경험론 철학을 완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비교될 수 있다. 데카르트가 "전통적인 지식의 전면적인 부정과 회의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어떠한 회의에도 흔들림 없는 새로운 학문의 기초"를 찾고자 했다면, 흄은 제도화된 교육이나 책이 아니라 "경험과 관찰 속에서 직접 획득할 수 있는 지식만을 참된 지식"으로 간주했다.

일반적인 교육 방식으로 얻는 지식과 앎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혐오감"을 갖게 된 흄은 "교수한테 배울 수 있는 것 치고 책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세상으로 나아가 그 속에서 직접 얻을 수 있는 지식"만을 참된 지식으로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흄에 대해, 남기호 교수는 그에게서 "경험론이 진지하게 추구되고 완결되는 것은 이러한 회의와 자기 학습을 통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어린 시절부터 '쓰여진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의 발견으로서 "사유의 새로운 장면"을 추구한 흄이 법학 공부를 오래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평생 독신으로 살며 살아생전 펴낸 많은 철학 저서들이 무시당하고 많은 비방을 받았지만, "역사적 인물을 습관의 피조물로 묘사한" 그의 역사서 『영국사』는 이후 100여 년간 기본 역사서로 사용되기도 했다.

끊임없이 회의하는 삶, 경험을 통해 얻는 살아 있는 지식

인식론의 근본 물음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어떻게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이다. 그의 주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제목 그대로 인간의 본성을 지성, 정념, 도덕의 세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는 기존 지식에 등을 돌리고 새삼스레 인간 본성을 탐구하려했던 것일까? "수학은 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른 채 계산에만 몰두한다. 자연과학은 자연 사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고 단지 비교하고 수량화하기만 한다. 종교는 왜 믿어야만 하는지 납득시키지 않은 채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친다." 이 모든 학문적 탐구의 견고한 기반을 찾기 위한 흄의 착상은 인간의 모든 학문이 공통적인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본성 자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학문을 '인간학(Science of Man)'이라 부르고, 물리적 자연이 '경험과 관찰'의 방법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면, 인간 본성에 대한 학문도 같은 방법으로 새로운 철학적 지평이 열릴 것이라는 게 흄의 생각이었다. 무신론자라는 공격에 대한 흄의 대응에서도 그의 관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드러난다. 남기호 교수에 따르면, 흄이 고민한 것은 "자연 전체의 조화로운 틀을 창조한 지성적인 저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 본성은 그 자연의 인과 관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흄은 비물질적인 정신이 세상 속의 물질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늘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 정신은 육체를 통해 직접 획득한 지식을 갖고, 비물질적인 지식을 간접적으로 발전"시켜 보다 추상화된 고급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흄이 말하는 '경험(experience)'이란, 바로 물질적인 외부 대상에 대한 비물질적인 인간 정신의 직접적인 지식 획득이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지각(perception)'을 가져다주는데, 이것은 다시 외부 대상과 직접 대면하여 우리 내면에(in) 찍힌(press) '인상(impression)'과 생생함이 사라지고 인상의 흔적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관념(idea)'으로 나뉜다. 흄이 보기에 그 생생함에 있어서는 인상이 언제나 관념보다 선행하며 더 강하고 더 많은 지각을 포함한다. 여기서 남기호 교수는 "흄의 이 설명이 설득력이 아주 강하지 않더라도, 그의 설명에서 분명한 것은 언제나 인상이 관념에 앞선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듯이 흄의 경험론은 직접 지각을 통한 인상에 기원을 두지 않는 관념이란 어느 것이나 허구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인과관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그 관계의 필연성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자연스럽게' 불러들이는 '관념 연합(association of ideas)'의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인간은 지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흄의 논리를 따르자면, '비를 맞으면, 옷이 젖는다'는 것도 우리가 반복적 경험을 통해 둘 사이엔 필연적인 인과성이 있다고 습관적으로 믿어왔을 뿐이며, 그 필연성 자체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흄에게는 인과 관념의 필연적 관계라는 것도 반복적 경험이 습관적으로 만들어낸 "항상적인 결합"일 뿐인 것이다.

지식도 자아도 모두 회의뿐이니, 신념을 가져라

궤변처럼 들리기도 하고, '저게 다 뭔 헛소린가'하고 수강생들이 혼란스러워 할 때쯤 남기호 교수는 흄의 경험론 철학이 가지는 존재론적인 성격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저기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는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양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흄은 '한 그루의 나무'로 규정될 수 있는 동일성을 유지하며 경험과 무관하게 독립된 '실체(sub-stance)'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모습, 오직 그것만이 존재한다. 무수한 속성과 양태로서 나타나고 재현되는(re-presented) 대상만이 오직 '있다'는 것이다.

흄이 생각하는 '인간'이란 존재자도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허구일 뿐이다. '나'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인간이 보증될 수 없다면, 그가 가진 의지와 사유, 욕망도 모두 한 대상의 것이라고 확증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동일성을 지켜주는 단순 불변의 자아가 허구라면, 스스로를 '순수하게' '나'라고 부를 수 '없는'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밥 먹는 나, 향기를 맡는 나, 분노하는 나, 눈물 고인 나는 항상 어떤 특정한 지각을 지니는 것으로만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행위를 하는 '나'라는 자아와 주체가 보증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흄은 급기야 "인간은 영원히 유동적이며 흔들리는 상이한 지각들의 다발"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이 지금의 나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는 있어도, 한 번도 나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남기호 교수는 결국 흄이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이란 것도 그렇게 쉼 없이 흔들리는 지각 속에 있는 영혼의 능력이며, 스크린에서 어룽거리는 화면처럼 "일종의 극장" 같은 것이다. 또한 인간이 알 수 있는 것도 그렇게 흘러가고 운동하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뿐이다. 이처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흄이 도달한 곳은 결국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회의적인 세상이다. 이쯤에 이르면, 사람들은 흄의 이러한 세계관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불안하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런데 "흄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 이성이 처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건전한 지성이여, 회의하라!

"그렇다고 불안에 떨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지식이 궁극적으로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라면, 어떤 것을 맹신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어떤 진리라고 주장되는 것도 영원히 옳을 수 없고, 그것에 반대되는 진리가 언제든 나올 수 있으니, 오히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요?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한 줌 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실험하며 경험에 기초한 신념을 쌓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마치 흄이 남기호 교수의 입을 빌려 말하듯이 강의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부당한 사태와 오류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그것의 거짓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는 세상이다. '닥치고 한미FTA 발효'에는 '닥치고 투표로 응징'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갑갑한 정치 현실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 절대적인 진보와 보수가 없다면, 회의하고 생각하고, 깨닫고, 분노하고, 다시 회의하는 이 과정 속에서 비로소 '신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때의 신념은 남기호 교수가 말하듯이 "맹종의 대상에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열린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그 기초가 다져지는 신념"일 것이다. 헤겔의 말처럼 "모든 신실한 철학은 회의주의와 하나이다."

열린 감각, 열린 사고, 열린 경험에서 올바른 습관이 길러진다. "그렇다면 습관은 인간 삶의 위대한 안내자"일 수도 있다. "건전한 지성은 언제나 회의할 줄 알며", 그럼에도 비관에 빠지지 않고, 현실의 경험에 기초해 올바른 습관과 삶의 신념을 열심히 다지는 지성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이란, 박사학위가 있거나 대학교수를 오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남기호 교수가 옮긴 다음과 같은 흄의 말을 마지막으로 적어 본다. "내 생각에 나는 좁은 강어귀를 지나며 많은 여울에 부딪히면서 가까스로 난파를 모면하고 나서도, 여전히 비바람에 시달려 물이 새는 똑같은 배를 타고 무모하게 바다로 나아가려는 사람과 같다. 심지어 이 사람은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지구를 횡단해보겠다는 드넒은 야심을 지니고 있다."

2012년 첫 강의인 8강 자유로운 주인이 되는 이성국가를 꿈꾸다 : 사회계약론 넘어가기 - 루소 (김광호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는 1월 5일(목)에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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