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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크의 시민정부와 재산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6> 자유주의 정치학

지난 15일에는 서양근대철학사 제6강으로 박영균 건국대 HK교수의 존 로크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로크,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주례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의 제6강에서는 박영균 건국대 HK교수의 강의로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정치사상에 대해 주로 살펴보았다. 박영균 교수에 따르면 "로크의 시민정부론을 읽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로크를 '보수적'으로 읽는데 익숙해서 '혁명적'으로 읽지는 않는다." 이러한 로크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는 "대표를 선출하여 통치를 위임하는 대의제적 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로" 간주하고, 인간의 (경제적) 자유를 신장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근대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주권재민의 원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도출하는데,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자유로운 이익 추구 활동을 보장하고 사유재산을 지속적으로 보호하는 장치로서의 '필요악'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당정치의 위기'를 말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로크에게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인간의 일생보다 "사회-정치-경제 시스템의 수명은 훨씬 길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체제를 당연하고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박영균 교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경험을 진리로 간주하는 소박한 유물론자들이기 때문에 역사가 만들어낸 '시대적 간극'을 망각하기 쉽고, 현재의 가치와 욕망, 삶의 양식이 당연한 것이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이므로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이 이후 세월이 흘러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모르듯이, 320여 년 전의 로크도 지금의 사회가 이런 식으로 흘러 갈 것이라고 아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명예혁명의 철학자' 로크를 새롭게 읽기 위해서는 "우선 '근대 부르주아 혁명'의 배경에서 당시 로크의 혁명적인 면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로크가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인 사유를 당대에서 벼리기 위해서는 강의 말미에 박 교수는 전복적인 상상력을 주문했다. 오늘날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민주주의의 현실과 한계를 직시하고, 견고하게 굳어져버린 국가 이데올로기의 틀을 돌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기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새롭게 탄생한 자본주의적 인간, 사회계약론을 구상하다

로크의 정치철학이 집중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정부에 관한 두 가지 논고(Two Treaties of Goverment)』(한국에서는 『통치론』으로 번역)가 출판된 것은 영국 명예혁명 이후인 1689년이었지만, 그가 이 책을 저술한 것은 1683년이었다. 로크는 명예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혁명 이전에 혁명을 선동하고 촉구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는 영국 정부가 유럽 전역에 지명 수배한 84명의 반역자들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로크의 정치철학은 혁명의 기운이 팽배하고 "산업혁명을 목전에 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승리가 이미 명백해지던 시대 속에서 사회-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의 정치 이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성장하던 부르주아적 세계는 더 이상 공동체라는 공간과 경작을 통해 "토지에 긴박되어 있는 개체들"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 세계의 새로운 주인은 "자유롭게 대지를 가로지르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스스로 행동하며, 더 이상 '경제외적 강제력'이 작동하지 않는 인격적으로 자유로운 자들이었다." 이제 안전의 지속과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탐욕스러운 '사적 소유의 욕망'이 되었으며, 생산활동은 '경제적 규칙'을 따라 이루어졌다. 신분 질서를 중심으로 '인신적 구속'이 강하던 봉건적 공동체와 달리 새롭게 출현한 자본주의는 "동등한 개체들이 사적이고 물질적인 유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였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이전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높은 '해체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체의 위험성'에 주목한 사람이 홉스라면, '경제적 유인동기'에 주목한 사람이 로크였다. 이들의 '근대 사회계약론'이라는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이 가진 특징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기인한다. 그 새로운 정치 전략은 더 이상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윤리적 덕성이나 도덕적 가치, 인간적인 유대에 호소하지 않는다." '계약'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로서 '국가와 정치'는 이제 거래 행위의 산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계산'을 통해 '자연상태'가 아닌 '사회상태'를 지향하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근대 합리성의 요체이다.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이성'이란, '옳음'과 같은 진리에 대한 인식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권을 확보하고 확대하는 데 보다 '좋음'을 찾는 계산적인 인식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이성적 능력이란, 식민지역 원주민들의 자연권과 삶의 양식은 가볍게 무시하고 그들을 학살하거나 그들의 소유물을 착취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고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했다면 '그 땅과 그 땅 위의 모든 것은 모두 네 것이니라'라는 암묵적 합의가 이제 새로운 '진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소유권의 정당화'가 로크 통치론의 핵심이라면, 사회계약론은 근대 정치구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善)과 공공성을 위해 정치가 작동하지 않고 최대의 효율성을 내기 위한 합리성으로만 작동되는 정치, 정치 사회에 경제 문제를 삽입하여 경제 운용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정치, '정치에 장착된 경제'를 넘어 '경제를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구성하는 개체가 백성(subject) 또는 신민이었다면, 로크의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자유적 주체로서의 시민(citizen) 또는 공민이었다. 또한 홉스에게서 양도된 다수의 권리는 초월성(군주)에 양도되었기 때문에 그 다수는 계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었지만, 로크는 주권자들의 자연적 권리를 "계약을 통해 위임 받아 대표성(대의제)으로 '외재화'했다." 또한 "로크주의자들은 홉스와 달리 '전쟁상태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공통의 재판관'이 없는 '불편함'을 정치사회로 이행하는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민주 정부 설립의 목적을 밝히기 위한 로크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배타적인 '재산권의 보존'을 향해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사적 이익의 추구와 공동체적 규제가 계속 충돌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사익과 공익, 사사로운 것(res privata)과 공공적인 것(res publica)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상존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을 "단순히 공/사 간의 갈등으로만 다룬다면 우리는 홉스와 로크가 당면했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갈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했었기 때문인데, 자본주의 사회가 제기하는 문제의 독특함은 이런 공/사 간의 갈등이 "처음으로 사회 전체 즉,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경제적이고 사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일반화되었다"는 점에 있다. 소유권에 근거하여 구성된 정치사회는 '근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인 것이다.

욕망에 봉사하면서 욕망을 조절하는 이성적 국가는 가능한가

지난 강의에서 살펴봤듯이 홉스는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코먼웰스(commonwealth)'를 사용하는 반면 로크는 이 용어를 사용하는 데 단서를 달았다. 홉스의 '코먼웰스'가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위해 조직된 국가로서 사적 주권이나 이해보다 '공공적 이해와 공공적 질서'를 보다 중시한다면, 로크의 '키비타스'적 의미가 강조된 국가는 "'공공적인 것'이 '사사로운 것'을 압도할 가능성을 경계하면서 '공적 이성'을 지닌 자로서의 시민의 자율성에 우선권"이 있는 정치공동체였다.

이처럼 로크는 홉스와 달리 인간의 욕망이 충분히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조절'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 그를 홉스를 뛰어 넘은 근대 부르주아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대표자'로 만들었다. 물론 로크는 다수결을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 결정 방식을 '다수의 지배'라는 형식 속에서 처리하면서, 누군가의 자연권과 소수자의 권리를 억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소유권에 대한 보호와 인류 보존의 의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크는 이념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사적 소유권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공공의 부와 선을 우선시하는 '공화주의' 사이를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그의 정치철학을 특별히 모순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로크의 이론에서 인민의 주권을 대표하는 최고의 권력인 "'입법부'에 의해 이 모든 모순은 결국 '소유권'의 혼란을 법적으로 막고 그것을 보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로크의 문제의식이 지닌 특성과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의 정치철학은 "인간의 욕망에 기초하여 사회 전체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려는 근대적 기획인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로크의 정치철학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지만 그 사회는 감성이 배제된 사회가 아니라, "가장 강력하고 보편적인 욕망에 봉사하고 그 욕망을 인도"하는 길을 모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로크는 '재산권(소유권)의 보존에 근거한 부의 축적이 사회 전체의 부를 증가시킨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또한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전체 다수의 최대 쾌락'이라는 공리주의적 논리를 암시하면서 "근면한 노동이 사회 전체의 부를 키워 더 많은 사람들의 부를 만들어낸다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로크의 믿음처럼 인간의 이성은 순전히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공적 이성'의 성격을 통해 사회의 공공성을 확보할 수도 있는가? 만일 홉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기보존의 욕망'이 공공복리에 대한 이해보다 더 커서 사회 전체의 해를 무릅쓰고라도 사적 이익을 취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가 대의제의 형식이 인정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로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시민정부의 정치적 형태를 구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네그리는 근대적 주권 개념의 두 가지 노선 -홉스적 모델과 로크적 모델- 이 서구 정치학의 작동에서 전자는 공화주의로, 후자는 자유주의 전통으로 발전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근대 사회계약론의 귀결인 "루소의 민주주의 공화제도 결국 '총체성의 대표제'로 귀결된 것"은 홉스적인 모델을 닮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영균 교수는 이에 더해, "홉스는 공화주의자는 아니지만 공화주의자 루소의 전신으로 어쩌면 자유주의자 로크의 '외설적 이면'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박 교수가 지젝의 용어를 빌려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주의 혹은 공화주의' 사이의 어떤 정치적 형식을 외피로 한 현대 자본주의가 도달한 것은 결국 '1 대 99'의 사회라는 점이다.

"미국의 월가 시위와 유럽 젊은이들의 시위는 단순히 빈부격차의 확대나 높은 실업률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저항'은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통치 권력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다. 이제 사람들은 기존의 여당과 야당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지목하는 것은 '대의제' 그 자체이다." 박영균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은, 주권자의 의지와 판단을 대표에게 위임하는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대의제에 의해 선출된 국가의 지배층이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포기했기 때문이다. 명실상부하게 '자본의 시녀'가 된 서구의 국가에서는 이제 공화주의적 전통도 모두 무너져 내렸고, 사민주의 전통을 가진 유럽의 국가들조차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렇다면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대의제라는 자유주의 정치체제 자체의 위기", 아니 그것 배후에 있는 소유권을 위해 도출된 자유가 가진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로크는 "공공성의 훼손과 사적 소유의 이기성이 가지는 탐욕의 함정"을 간과했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자본에 완전하게 종속시키면서 사회적 시민권의 제약, 대의제 시스템의 불안정화, 정당체제로의 이탈을 유발한 것이다. 이 첨단 자본주의의 현장에서 낡은 공화주의의 이념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결국 박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보완재' 또는 '대리재'로서 회자되는 "'공화주의'도 자유주의라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체제의 질주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영균 교수는 이러한 비판적 인식의 배경을 이렇게 요약했다. "문제는 단순히 정치의 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소유권 자체가 파산하면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로크는 폭압적 정부에 대항하는 인민의 저항권을 말하면서도, 그것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인민의 재산에 대한 침해"를 들고 있다. 박 교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로크의 정치철학이 제안하는 국가란, 오직 부와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소유 욕망을 따라 인류에게 공동으로 부여된 자연권조차 넘어서 향락의 길을 걷고 있는 '외설적 아버지'가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마치 새로운 기대주인 것처럼 담론을 만들어내는 공화주의도 "탐욕스러운 '부의 욕망'만을 질주하는 '외설적인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감추는 또 다른 이면"이라는 생각은 공화주의 담론에서 아주 논쟁적인 물음이다.

결론적으로 박영균 교수는 탁월한 근대의 합리적 정신이자 근대 부르주아의 대변자인 "'로크의 시민정부론'에서 오늘날의 정치-경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로크를 새롭게 읽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자유주의의 화신이자 자유지상주의자,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로 읽을 때 나타날 편협함을 제거해야 한다.

웰컴 투 '신자유주의적 세계'!?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두 가지 인식이 결합한 '근대의 꿈'은 테크노피아(기술 유토피아)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꿈은 끊임없이 결핍감을 자극하며 여기 와서 소비하며 이 풍요를 함께 누리자고 손짓한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누군가는 공공성이 사라지고 전 세계 극소수의 자본가를 위해 대다수 가지지 못한 자의 삶이 불행해진다고 염려하지만, 어느 수강생의 질문처럼 매달 받는 월급으로 그럭저럭 나름의 행복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생활인들은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도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지도 모른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포함된 우리의 희망과 기대가 무너졌을 때, 곧 국가와 정부가 자본에 투항하여 부끄러움 없이 백기를 흔드는 것을 보았을 때, 그 희망은 반대편에 서 있던 '이명박'이라는 이름에 집약되어 있는 가치로 퇴행했다. "가장 큰 표차로 이겼지만 실질 득표울은 가장 적었다"는 점에서 그 선거는 대의제 자체가 가진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제는 '악몽'이 된 '고소영'이 다시 '유령'처럼 '노란 손수건'을 불러낸다. 이런 얘기들이 이제 와서 다 쓸데없는 뒷담화일지라도,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역사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가 생산하는 식량의 양은 전체 인류 60억 명의 두 배에 이르는 1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60억명 중 절반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며, 그 중 12억 명이 하루 1달러 이하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의 재산은 제3세계 45개 국가의 총생산량에 맞먹으며, 오늘날 토지와 금융자산을 통한 부의 축적은 대부분 탈법과 불법 속에서 행해지는데도 심지어 국가가 이를 보장하며, 설혹 파탄의 위기에서도 국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적 자본'을 투입해 대자본을 다시 살립니다. 이것이 애초에 로크가 가정했던 '하느님이 인간에게 공유물로 준 자연권'으로서의 소유권이며, 근면한 노동과 직업적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입니까?"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강의와 질의응답이 이어지자 박영균 교수의 얼굴에는 운동장을 몇 바퀴 뛴 사람처럼 땀이 흥건했다. 처음에는 시니컬해보이는 강사였지만, 그의 진지한 열정은 수강생들의 마음을 열었고, 강사의 논조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수강생들의 숨어 있던 문제의식을 자극하는 이번 강의는 논쟁적이고 몰입도가 높았다. 서양의 근대철학사를 살펴보는 이 강좌가 진행될수록 필자는 점점 오늘날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선명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앞으로도 독자분들의 많은 성원과 질책을 바라며 다음 강좌를 기대해본다.

다음 강의는 7강 건전한 지성은 회의로 끝난다 - 개인주의 인식론 : 흄 - 12월 22일 남기호 (연세대 외래교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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