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재발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마련된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에서 세 번째로 만나볼 철학자는 스피노자(1632-1674)였다. 지난 11월 24일(목)에 있었던 제3강에서 조현진 숭실대 외래교수는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주장들과 그 현대적 의미'라는 방대한 이야기를 불과 2시간 만에 쉽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수업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통합된 이 세계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면서 독특한 세계관을 창조한 스피노자의 사상에 흥미와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늘날 사회정치철학 분야에서 전복적이고 혁신적인 사유의 맹아를 품고 있는 철학자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사람은 단연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현대철학에서 들뢰즈와 네그리 등에 의해 재발견된 철학자이기도 하지만, 근대 인식론 중심의 기존 철학사에서 가장 곡해된 철학자이기도 했다. 수강생의 질문에서도 나왔었지만 중고등학교 도덕윤리 시간에 잠깐 등장했던 스피노자는 흔히 범신론(汎神論)의 주창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현진 교수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왜곡과 단순화는 수 백년 간 계속되어온 오해에 불과하다."
제2강에서 살펴본 데카르트는 세계의 중심을 '생각하는 자아'로 놓고, 기계론적 세계관과 근대인식론의 문제를 제기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데카르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려했다. 조현진 교수가 강의 제목으로 선정한 물음도 바로 "자연과 자유의 화해는 가능한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분리에 대한 통합적 설명, 과학과 종교의 상호 인정, 법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통섭, 인식론과 정치철학의 화해가 가능하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에 대해 합리적이고 통일적인 지평에서 설명 가능한 세계관을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된 철학자, 종교와 과학을 화해시키다
스피노자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속한 유대인 공동체의 엄격한 규율과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순종적이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24살의 나이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후, "의례의 준수만을 게을리 했을 뿐인데도 '혐오스러운 실천과 그밖의 흉악무도함'이라는 죄목으로 자신을 고발했다"며 유대교 원로들을 비난했다.
기존 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생각은 이후에 금서로 지정되었던 <신학정치론>에서도 이어지는데, 조현진 교수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신(神)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생산하는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고 했다. 이러한 면을 '신의 자연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이른바 기독교의 '의인론적 신관'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의인론적 신관이란 "신이 인간처럼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욕구와 정념 등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신관이 신을 인간중심적 사유의 특징인 '목적론' 속에 집어넣고, "신을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존재로 만든다"고 보았기에 기꺼이 거부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법칙을 깨뜨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적'을 행하는 신은 스피노자가 보기에 완전하지 않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결코 자신이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신은 "법칙에 입각해 무한히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이며, 그가 보기에 "자연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거나 오묘한 설계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오만하다.
이런 면에서 스피노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과학과 종교, 서로 충돌하는 두 세계관에 대해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그 목적과 방법, 관심 대상을 달리하는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에 서로 마찰하거나 대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종교는 자연을 그 설명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도덕적 기능"에 집중하면 된다. 그래서 오늘날 "종교의 눈으로 과학을 읽으려고 하거나, 과학의 눈으로 종교를 읽으려는 시도"들(창조과학-지적설계론, 리처드 도킨스, 테리 이글턴 등)은 서로 다른 언어의 문법을 혼동한 것이며 전혀 무익하다. 스피노자의 생각을 이어 받은 S. J. 굴드의 설명도 과학과 종교는 서로 충돌할 이유가 없는 중첩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스피노자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다만 그는 기성종교를 신뢰하지 않고 "신의 뜻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철학적 종교"를 믿을 뿐이다. 조현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열과 반목을 부추기고 물질주의에 종속된 종교인들, 그들이야말로 신을 팔아먹고 사는 진짜 무신론자들이다."
완전성을 거부한 철학자, 생태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다.
제1강에서 살펴봤던 '근대적인 것'의 공통점이 어떤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는 특권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에 있었다면, 스피노자야말로 완전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조현진 교수가 말하는 스피노자의 인간의 완전성이란 "정신을 가진 존재로서 사유하는 힘과, 몸을 가진 존재로서 활동하는 힘"이다. 또한 불완전성도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은 없다." 이러한 생각이 가져올 결과는 참으로 혁신적이고 생산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완전하며" 미리 주어진 정답이나 모델이 없기 때문에 사물들을 차별적으로 보고, 수직적으로 줄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 제시된 본질이나 원형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사물들이 드러내는 그 자체의 "본성과 역량"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세계. 그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을 이용하고 지배할 권리를 가진 특권적 존재가 아니라, 들판의 쌀알과 사자와 쥐와 상호보완적이며 수평적인 지위를 가진 신의 현현(顯現)이 된다.
"자연이 인간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는 발상"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현대 생태주의에 새로운 대안 윤리를 제공했다. 그런데 조현진 교수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인간의 행복과 구원을 목표로 했으며, 이것은 인간에게만 좋은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사상이 생태학의 극단적 형태인 '생태중심주의'에 가깝다고 보기는 힘들다." 즉, 스피노자는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라는 양 극단을 모두 극복하고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등급과 서열을 거부한 철학자, 인권의 정치를 말하다
스피노자는 앞서 말한 대로 존재의 등급과 서열에 기반을 둔 완전성과 불완전성 개념을 거부한다. 조현진 교수는 "이런 주장은 자의적이고 규격화된 기준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규정'하려는 추상적 사고방식을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며, 그것의 "정치적 억압 기능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199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멘추 여사는 동성애에 관해 기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모든 건 자연스러운 거에요."
스피노자가 보기에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욕망과 정념에 대한 통제권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처럼 상정하면 안 된다. 조현진 교수는, "유해한 정념(슬픔)의 효과를 줄이고, 더 강한 완전성을 주는 유익한 정념(기쁨)을 증대시켜서 우리의 힘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가 스피노자 윤리학의 과제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가진 "자기보존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conatus)"인 욕망에 대해서도 '금욕주의적 모델'이 아니라, "욕망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절제하는 제욕주의"를 제시한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가능하려면 능히 그럴 만한 사회적 환경이 조성될 수 있는 정치적 해법이 요청된다. 그래서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윤리학의 완성은 정치학이다."
스피노자는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 이후의 근대철학자들과 달리 '사회계약론'에 의지하여 국가의 안정성을 강조하지 않고, "불안정성과 항상적인 해체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의 발생"을 설명한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국가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힘의 균형"이며, "국가의 안정성이라는 것도 개인들이 가진 힘의 연합이 가져오는 결과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특정한 정치체제,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규칙"이 아니라, "국가의 본질 그 자체로서 하나의 원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군주정이든, 귀족정이든, 민주정이든 간에 국가의 정치체제는 언제나 "공통의 이해에 기반한 힘의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 하에서만 지속가능하다. 그래서 그가 보는 민주주의는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힘의 균형과 정치적 안정을 '일시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유동적인 질서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아직도 국가의 안정, 국익, 자유민주주의적 정통성, 법질서 수호 같은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사탕발림과 호통에 속고, 쫄고 있습니까?"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그 모든 권위와 힘의 근거는 무엇인지 시민들이 늘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내게 철학할 자유를 달라"
안경 렌즈 깎는 일로 생계를 이어 가면서도 스피노자는 "철학할 자유가 침해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철학교수직을 거절할 만큼 자신만의 삶의 원칙과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를 중시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넓고 깊은 사유를 펼치면서도 자신의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과 행동이 따로 돌아가거나 사상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온 몸으로 자신의 지적 성과물을 밀고 나갔었기에 그들의 어려운 책을 읽고 토론하는데 소중한 젊음의 시간을 쏟아도 덜 억울하리라.
아, 그런데 스피노자만큼 철학책을 쉽게 쓴 사람도 흔치 않다. 물론 쉽게 읽힌다고 해서 저자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소통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철학은 자기만족에 들떠서 남 앞에서 주워섬기는 지식, 실용적으로 써먹기에 급급한 지식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의 주인이 되어 생각해보는 생동하는 활동 그 자체이다. 그래서 철학은 어렵지만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 12월 1일에는 김성우 상지대 겸임교수가 제4강 '이성의 꿈을 완성하다-논리와 컴퓨터의 유토피아: 라이프니츠'를 강의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