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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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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

[알림]<백두대간12걸작선2> 첫 번째 산행은 <속리산 문장대 구간>

백두대간학교(교장 최창남)가 백두대간 <12걸작선1>을 마치고 11월부터 <12걸작선2>를 시작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2>의 첫 번째 산행은 <속리산 문장대 구간>입니다. 11월 26일(토) 당일이며 산행 주제는 <바람 속의 문장대>입니다. 국립공원 속리산 화북탐방지원센터에서 산길로 들어선 후 문장대를 오르고 천왕봉을 거쳐 법주사로 내려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진행해온 <12걸작선1>은 내년 3월부터 다시 출발합니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 전문가이며 작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인문학적 산행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했습니다.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 등 다수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등 민중가요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최창남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아렇게 얘기합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가슴 저리도록 아름다웠던 눈 덮인 지리산, 모진 눈보라에 몸 떨며 황홀했던 소백산, 장엄한 산줄기에 절로 마음 내려놓았던 덕유산, 깊은 산에 자리한 거대한 풍력 발전기 곁을 지나던 선자령, 제비꽃 무성하던 봄의 대덕산, 철쭉 붉게 타오르던 봉화산, 빗줄기와 운무 따라 오르던 함백산, 구름 위로 걸었던 오대산, 무릉도원 풀어냈던 청옥·두타산,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함께 바람과 구름까지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황홀지경을 보여주었던 조령산, 고요히 산길 걸으며 자신을 만날 수 있었던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에 이르기까지 12번 산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백두대간은 더욱 살가워졌습니다. 몸은 대간 길에 머물기 원하고 마음은 대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듣기 원하게 되었습니다. 친밀함은 더욱 가까워지고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런 마음의 길을 이어 나가기 위해 <백두대간12걸작선2>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백두대간12걸작선2>를 시작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왜 백두대간인가?'
'왜 우리는 백두대간을 걷는가?'


백두대간은 이 땅의 시작입니다. 백두대간이 열리며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이어 일어나고 열 개의 큰 강을 비롯한 수많은 물줄기가 흘렀습니다. 생명의 터전입니다. 삶의 출발이고 정신의 뿌리입니다. 또한 백두대간은 하늘의 뜻이 발현된 하늘의 땅입니다. 하늘의 지혜가 머무는 신성한 땅, 거룩한 공간입니다.

백두대간은 '지혜의 머리가 된 산'인 백두산(白頭山)의 '하늘의 연못' 천지(天池)에서부터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인 지리산(智異山)의 '하늘의 봉우리' 천왕봉(天王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하나의 산줄기요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산입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오고가는 생명의 통로일 뿐 아니라 기후와 언어, 삶과 문화를 구분 짓는 큰 산줄기입니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걷는다는 것은 이 땅의 처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첫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바람에 기대어 그 산길을 다시 엽니다.

새로운 산행 코스를 선정하는데 몇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 구간별로 이야기가 있는 산행을 만들어갑니다.
둘째, 근교 산행을 즐기는 분들이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산행 코스를 잡았습니다.
셋째, 숲의 소리를 듣고 나무와 꽃을 느끼며 천천히 산행을 합니다.
넷째, 계절별로 아름다운 구간을 선정하였습니다.
다섯째, 산행 구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구간별 난이도 표시하였습니다.
여섯째, 종주 산행을 하기 원하는 분들을 위해 지리산과 설악산 종주를 넣었습니다(1박2일로 진행 되는 산행으로 난이도 '중상(中上)'의 코스입니다).


▲속리산의 만추ⓒ백두대간학교

[산행지 안내]

속리산(俗離山)은 백두산에서 발원한 한반도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12종산 중 하나입니다. 빼어난 수려함으로 대한팔경에 속한 이 산은 소금강산,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자하산 등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구봉산으로 많이 불렸으나 삼국시대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766년 김제 금산사에 머물던 진표율사가 구봉산에 미륵불을 건립하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구봉산에 들어가기 위해 보은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를 본 농부들이 크게 감화되어 스스로 낫으로 머리를 자르고 '세속을 떠나'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俗)을 떠나(離) 이곳(山)으로 들어오니 그 후로 사람들이 이 산을 '속리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속리산의 이름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의 시인 백호 임제의 시구(詩句)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

사람이 세속을 떠나 속리산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산을 떠나 세속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산이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속이 산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산의 고결함과 정갈함이 세속으로 하여금 스스로 떠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이 떠나고 세속을 떠난 산인 속리산에는 세속의 흔적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린 곳도 이곳이고, 이방원이 왕권을 얻기 위해 형제들을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이곳입니다. 또한 세조가 시를 지었다는 문장대, 세조가 지날 때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그리고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연 후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기쁜 마음을 담았다는 상환암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세속 떠나 정결한 속리산에 세속의 상징인 권력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속이 산을 그리워하고 산이 세속을 불쌍히 여긴 탓이겠지요.

11월 속리산 산행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듭니다. 화북면에서 산으로 들어가 문장대에 올랐다가 비로봉과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지나 세심정, 법주사로 내려옵니다.

▲<속리산 문장대 구간> 산행 지도ⓒ속리산국립공원

문장대의 원래 이름은 '운장대'입니다.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병을 다스리기 위해 속리산을 찾은 세조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문장대에 서면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손을 뻗으면 하늘이 닿을 듯하고 다리를 뻗으면 구름 위를 걸을 듯합니다. 멀리 보이는 가옥들도 품 안에 안긴 듯 가깝기만 합니다.

하늘과 땅과 구름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흐르는 듯합니다. 하나가 됩니다. 그런 경이로운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요? 문장대에는 기묘하고 놀라운 전설이 하나 전해집니다. 이곳에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몇 번이나 문장대에 올랐는지 마음으로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문장대에서 내려와 바위를 그대로 깍아 만든 계단을 차례대로 지나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추고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입니다. 하지만 신선대에 들어서면 아무래도 백학이 깃들고 신선이 머물렀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산 오르느라 지친 이들이 잠시 머물러 쉬는 여느 산봉우리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신선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찾아 왔었다는 고승이 본 것은 신선들이 아니라 산에 들어온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하기야 신선이 뭐 별 것이겠습니까? 사람(人)이 산(山)에 들어왔으니 신선(仙)이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입석대와 상고석문 등을 만납니다. 천왕봉과 입석대, 상고석문은 모두 8봉, 8대, 8석문들 중 하나입니다. 속리산의 절경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됩니다. 8봉은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과 수정봉입니다. 8대는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입니다. 그리고 8석문은 내서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입니다.

8봉, 8대, 8석문 등 모두 숫자 '8'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불교의 실천 수행인 8정도에서 의미를 빌려온 것입니다. 8정도 수행하여 열반에 들듯이 8석문 지나 8대에 올랐다가 8봉의 너른 품에 안기면 그대로 부처님 품에 안긴 듯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한 후 신통력을 얻어 세웠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입석대를 지나고 '부처의 진신'을 의미하는 부처의 산 비로봉을 지나면 상고석문이 가깝고, 상고석문을 지나면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오랜 날들 동안 천왕봉(天王峰) 정상에는 '천황봉'(天皇峰)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석이 서 있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천왕봉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에도 '천왕봉'으로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1918년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지도에서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며 천황의 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배경을 살펴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는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었고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 변경을 고시했습니다. 그 후로도 한 동안 '천황봉' 표지석이 서 있다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 12종산 중 하나이며 백두대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속리산 최고봉 천왕봉은 한남금북정맥을 품어 뻗어내고 있습니다. 한남금북정맥은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칠현산까지 흐르다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집니다. 즉 천왕봉은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13정맥 중 세 개의 정맥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하고 있습니다. 천왕봉의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을 살찌우고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금강과 하나 되며 서쪽으로 흘러든 물은 남한강으로 흘러듭니다.

그러니 이 봉우리, 이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람들은 이 산에 그토록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요?
강을 품어 흐르게 하는 고마움을 알고 있을까요?

세속이 떠난 산 속리산의 깊은 산길을 지나 세 개의 큰 산줄기와 강을 품은 생명의 땅 천왕봉을 마음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산행코스 : 속리산국립공원 화북탐방지원센터→문장대→문수봉→신선대→입석대→비로봉 →석문→속리산(천왕봉)→상고암갈림길→세심정→법주사
-산행거리 : 약 12.4km
-소요시간 : 약 8시간 (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난 이 도 : 중(★★)

[산행계획]

여유 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 두 분이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산악가이드 이철승 선생님은 백두대간 종주 등 산행경력 29년의 공인 등산안내인이고, 엄재용 선생님은 백두대간을 3회 종주한 공인 등산안내인입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스쿨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4152-1055번입니다.

01: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01:30 사당역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01:40 양재역 출발(지하철 3호선 8번 출구)
02:00 경부고속도로(하행) 죽전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00 송암산장(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054-533-5659) 도착/아침식사 및 도시락 싸 기(아침 메뉴 : 황태와 콩나물이 어우러진 시원한 해장국)
07:00 화북탐방지원센터 출발, 산행 시작 -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맘껏 호흡하며 산행
07:40 성불사
09:30 문장대
10:20 신선대
11:00 비로봉
11:10 석문 - 점심식사
12:30 천왕봉
12:50 상고암 갈림길
14:00 세심정
15:00 법주사. 산행 마감. 법주사 관람
15:40 속리토속음식점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043-543-3917) 도착
토속 버섯전골과 막걸리로 뒤풀이
17:00 서울로 출발
19: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 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렌턴, 그리고 반드시 빈 도시락과 수저를 가져오세요.

[산행자료]

[보은군]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한 분지형 지세이다. 대표적인 산으로 속리산, 구병산, 금적산 등이 있으며 군의 북서부에서 시작되는 보청천은 군은 심장부인 보은읍을 가로질러 금강에 합류한다. 보청천 주변은 군내에서 최대 곡창지대를 이룬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으며 삼국 형성기에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으로 두 나라의 요충지였다. 백제의 침공을 물리친 신라는 470년에 오정산성(지금의 삼년산성)을 쌓았고, 553년에 의신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최초의 무저항 시위라 일컬어지는 동학교도의 대규모 보은집회를 비롯해 동학농민전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신라 지증왕 3년에 삼년산군이었다가 조선조에 보은현으로, 고종32년 이후에 보은군이 되었다.


[속리산]<지리>천왕봉(1,057m)이 주봉이며 무수한 봉우리들이 기암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천왕봉에서 가지 친 한남금북정맥은 서산 안흥진으로 빠지는 금북정맥과 김포 문수산으로 빠지는 한남정맥의 분기점이요 시발점이다. 또한 속리산은 해동팔경의 하나이며 전에는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다. 속리 서북릉 최고의 위엄을 갖춘 문장대-문수-청법-경업-신선-입석-비로-천왕석문 지나 천왕봉까지 1,000m의 고산준봉들이 줄지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수백 년 된 노송들이 운치를 증폭시키고 백미의 암릉 아래 고산의 조릿대들이 온산을 뒤덮고 있다. 서북릉 문장대의 위엄과 조망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발길을 잡아매어 둔다.
속리산은 선유동계곡을 경계로 대간 등줄기를 월악산에서 넘겨받는다. 산세가 지리산이나 설악산만큼 크지는 않지만 암릉과 암장의 연속으로 그 위엄을 드높인다. 중부 내륙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크게 속리산 주능선과 대야, 청화산 능선 등 두 개의 산줄기로 형성되어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 대부분이 속리산 주능선의 주변에 집중돼 있으며, 대야산 지역의 봉우리들은 900m를 넘나드는 정도다.
법주사(法住寺)를 중심으로 4km 가량의 반경으로 북쪽에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이어 문장대(文藏臺)·신선대(神仙臺)·입석대(立石臺)·비로봉(毘盧峰)·경업대(慶業臺)·천왕봉(天王峰. 1,058m) 등 해발고도 1,000m 이내의 산봉이 솟아 있는데 최고봉은 천왕봉이다. 속리산국립공원의 입구는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舍乃里)이며 법주사의 사하촌(寺下村)으로 발달하였다. 이 사하촌은 속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옛 마을이 철거되고 청주나들이골이라는 곳에 새로이 관광촌이 조성되었다.
<역사>속리산은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산의 이름은 원래 아흔아홉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구봉산 혹은 소금강으로 부르다가 신라시대에 들어 지금의 속리산이 되었다. 우리나라 8경 중의 하나인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다'는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속세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제2금강(金剛), 또는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광명산, 지명산, 미지산, 구봉산, 형제산, 소금강산, 자하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특히 9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구봉산으로 많이 불렸으나, 삼국시대부터 속리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속리산은 '세속이(을) 떠난 산'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곳도 이 산이고,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즉 태종이 왕권을 쟁취하게 위해 형제를 둘씩이나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여기다. 이뿐이 아니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 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瀑)과 그 때마다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등 가장 세속적인 얘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지명>1. 신라의 승려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그 전 이름)에 오르기 위해 보은에 다다랐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으며 이를 본 농부들이 줄줄이 '속세를 떠나'(俗離) 출가해 여기서 '속리산'이 되었다 한다.
2.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는구나. 산은 사람(俗)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위의 시(詩)를 신라 말기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었다고 하여, 이 시를 속리산 이름이 지어진 연원으로 보기도 한다. 속리산이 속한 보은군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쯤 되는 '금(金)돼지'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최치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백호 임제의 것이다.
분방이 지나쳐 스무 살이 넘도록 스승을 구하지 않던 임제는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어느 날, 벼슬을 멀리하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 1497-1579)을 만나 3년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따라서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 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고 한 데서 차운(次韻)을 한 것 같다.
임제의 이 시는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이고, 근년에 간행된 <백호집>(白湖集)의 번역본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속리산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위의 시를 최치원의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최치원도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문을 쓰면서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새길 수 있겠다.


<속리산 팔봉팔석문팔대 (八峰八石門八臺)>
여덟개의 봉우리 : 천왕봉(天王峰, 1,058m) 비로봉(毘盧峰, 1,032m)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1,031m) 보현봉(普賢峰) 관음봉(觀音峰, 982m) 묘봉(妙峰, 874m) 수정봉(水晶峰, 566m)
여덟개의 돌문 : 내석문(內石門) 외석문(外石門) 상환석문(上歡石門) 상고석문(上庫石門) 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 비로석문(毘盧石門) 금강석문(金剛石門) 추래석문(墜來石門)
여덟개의 돌 : 문장대(文藏臺, 1,054m) 입석대(立石臺) 경업대(慶業臺) 배석대(拜石臺) 학소대(鶴巢臺) 은선대(隱仙臺) 봉황대(鳳凰臺) 산호대(珊瑚臺)


[문장대]해발 1,054m. 문장대는 법주사에서 약 6km 지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석대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규모이다. 이곳 북서쪽 바위틈에는 가물 때가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는 석천이 있는데, 이를 감로천이라 한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로 불렸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병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로 불린다. 이곳에서는 천왕봉과 관음봉을 비롯해 속리산의 고봉들이 한눈에 보여, 속리산의 정상인 천왕봉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문장대 안내판에는 문장대를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을 전하고 있다.


[문수봉]속리산 8봉 가운데 하나로 그 모습이 매우 단아하다. 문장대와 마주 바라보고 서 있으며, 남서쪽 암릉 아래에는 청법대가 있다.

[상고석문]이곳을 지나면 비로봉과 상고암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상고암으로 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상고석문'인 듯하다. 상고암은 신라 성덕왕 17년(72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주사를 지을 적에 천왕봉에서 벤 소나무를 이곳에 저장해 두었다 하여, 上庫(창고 고)라 한 것으로 보인다. 암자에는 어지간한 속병은 씻은 듯 고쳐내는 신비한 약수가 하나 있는데, 늘 마르지 않는다는 상고암의 팔공덕수가 바로 달래강의 발원 샘이다.

[비로봉]해발 1,032m. 비로(毘盧)란 비로자나불을 줄인 말로서, 인도말로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을 일컫는 말이자, 광명을 의미한다. 진표율사가 속리산에 온 다음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췄다.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띄고 사방팔방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해 구름을 타고 떠났다 한다. 이곳을 비로봉이라 이름 하였다.

[천왕봉]해발 1,058m.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天王峰)이다. 2007년 12월 중앙지명위원회가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는데 동의한데 이어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 변경을 고시했기 때문이다. 일제 때 붙여진 천황봉이란 이름이 일본 왕을 뜻하는 일제 잔재라는 게 개명 이유였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돼 있다.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에까지 천왕봉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1918년 지도(근세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이 천황의 식민지로 그 이름을 따서 '황(皇)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말 경에야 이르러 '천왕봉'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 졌다.
천왕봉은 우리나라의 십이지종산의 하나이자,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이다. 정맥은 말티고개를 지나 청주의 산성고개, 괴산의 모래재, 음성의 행티고개를 지나 안성의 칠현산까지 이어진다. 천왕봉은 세 갈래의 큰 물, 한강(달래강-남한강) 낙동강 금강의 물길이 갈리는 곳(三派水)으로, 삼파수봉으로도 불린다. 삼파수는 달천수, 우통수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명수로 알려진다. 조선시대에 이행(李行)이라는 선비는 우리나라에서 "충주 달천의 물이 천하에 으뜸가는 물맛이고 한강의 우통수(牛筒水)가 둘째이며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가 셋째"라고 그 품격을 매겼다. 여기서 삼타수는 달래강 상류 속리산의 삼파수가 변한 말이니 달래강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석권한 셈이다.
달래강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 길을 북쪽으로 흐르다가 충주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흘러드는 강이다. 달래강 인근 지명에 아직도 남아있는 '달천' '단월' '단호' '감물' 등은 모두 그 물맛이 달다는 뜻으로 달래강에서 말미암았다. 그 물길의 발원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렇게 적었다.
"속리산 산꼭대기에 문장대(천왕봉이 맞다)가 있는데 천연암벽이 하늘로 치솟아 그 높이를 알지 못한다.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한 넓은 암반 한 가운데 가마솥만한 샘이 나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와도 늘지 않는다.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한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가 금천(金遷, 남한강)으로 들어간다."
한반도에는 '천황'이란 이름을 가진 산(봉)이 계룡산 등 20개 가까이 있는데 대개 일제가 바꾼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어쨌든 그동안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나서 개명운동을 펼친 결과로 지자체와 정부 관련기관이 뒤늦게나마 천왕봉의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다.


[법주사] '부처님의 법이 머무는 사찰'.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이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14년)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의신조사는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인도)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흰 나귀 한 마리에 불경을 싣고 신라로 돌아왔다. 의신조사는 귀경길에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고 있었는데, 나귀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범상치 않은 생각이 들은 스님은 주변을 살펴보고 수려한 산세가 가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 여겨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절 이름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고 한다.
776년(혜공왕 12)에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 영심(永深) 등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후 법주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고려 숙종이 1101년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태조와 세조도 이곳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2)에 벽암(碧巖)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1624년에 중건된 대웅전, 1605년에 재건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 1624년에 중창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일주문·금강문·천왕문·조사각·사리각, 선원(禪院)에 부속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법주사의 중심법당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안치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근대조각가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요절했다는 시멘트로 된 미륵불상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불상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石蓮池.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보물 제848호)·괘불탱(보물 제1259호)과 지방지정문화재인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8호)·석조(石槽.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괘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9호)·철확(鐵鑊.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등이 있다.


<백두대간12걸작선(傑作選)2>① <속리산 문장대 구간>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3회 식사와 뒤풀이,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 (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세요(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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