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가 신년특집으로 <소백산에서...봄을 부르는 노래>를 제21강으로 준비합니다. 답사 키워드는 '금선정-선몽대-병산서원-죽계구곡'입니다.
제21강은 1월 둘째 주말인 8-9일 1박2일로, 풍기 금선정→예천 초간정과 선몽대→안동 가일마을과 병산서원, 하회마을→영주 부석사와 오전약수→순흥 소수서원→소백산 죽계구곡과 초암사→단양 적성산성과 신라적성비를 잇는 코스입니다.
▲부석사에서 바라본 소백산 죽령의 모습ⓒ황헌만 |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 배경 설명>을 들어봅니다.
21세기로 들어서서 10년을 훌쩍 넘기어 11년째 맞이하는 신년.
봄을 기다리는 노래를 옛 사람들은 <대춘부(待春賦)>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러한 노래를 어디에서 어떻게 불러볼 수 있을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주는 자연으로 돌아가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해보고 싶다. 그런데 그 <자연>으로 어찌 돌아갈 수 있을까. 오늘의 국토 형편에서 천연의 자연을 어떻게 찾을지….
문화재청은 문화유산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는 가운데 <자연유산>도 지정하고 있는데 이에는 천연기념물, 천연보호구역 지정과 함께 <명승>을 선정하고도 있다. <경치가 좋은 곳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곳>이 '명승'이라고 문화재보호법은 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대로 하자면 자연경관 못지않게 역사문화경관이 우수한 곳은 배제될 수 있어 선정 기준의 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자연경관' 명승과 '문화경관' 명승으로 세분하여 지정하고 있는데, 이는 명승지에 대한 일반인들의 문화욕구가 그만치 높아지게 된 것과 관련될 것이다.
명승 문화경관은 옛 정자라든가 누각, 별서(別墅) 등의 조경이 빼어난 전통문화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니 자연경관 또한 탁월하지 않을 수 없다. 산수를 제대로 알고 누릴 능력과 자격을 갖춘 자의 원림 조영이 이루어진 곳이며 '가거지지(可居之地)', 곧 가히 사람답게 살만한 곳의 택리지이다.
과연 <산수>란 무엇을 일컫는 것이고 누가 어떻게 찾아내어 누리게 되던 것인가. 자연에게 말 걸기, 말 붙이기, 말 건네기가 곧 <산수>라는 화답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고 우선 짐작해본다. '인격화된 자연'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곧 산수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일 터.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년)는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는 글에서 산수를 아는 자를 천민(天民), 학자(學者), 은자(隱者)의 셋으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의 재야 선비는 대체로 산림(山林), 초야(草野), 암혈(巖穴)의 세 부류로 분간되고 있었다. 산림처사가 곧 '천민'에 해당된다고 하겠으며 초야와 암혈에 든 자들은 그보다 불우한 선비층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유교산수'만 아니라 산문(山門) 입산의 '불교산수', 운림(雲林) 거사의 '도교산수', 풍수 비보의 '도참산수', 그리고 녹림(綠林)패거리, 곧 산적들의 '산채 웅거'들도 있었다.
일신(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오늘이 새롭고 나날이 새롭고 다달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 <소백산 해맞이 등산대회>가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의 1박2일에 걸쳐 단양에서 개최되고 충청북도는 <소백산 눈꽃 여행>이라는 관광 상품을 마련해놓고 있기도 하지만 국토학교는 한 박자 늦추어 1월 둘째주 주말에 소백산 일대 전통산수와 문화역사경관들을 맴돌아 순력하기로 한다.
'산업경관'으로 국토가 개변을 일으키고 있다 할지라도 명승산수를 품어 안은 소백산에게 말 걸기, 말 붙이기, 말 건네기 여로는 아직도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소백산과의 신년 대화>로서 건강하고 보람찬 한 해가 열리기를 기약해보고 싶다.
소백산(1,439m)은 산북 쪽의 문경, 단양, 영월과 산남 쪽의 영주, 예천, 안동, 봉화 고을을 에두르며 높은 등성이들을 포개고 깊은 구렁들을 흩트려 놓는다. 옛 문자로 표현하자면 <흉중구학(胸中邱壑)>의 고장을 이루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동경해마지 않는 산언덕과 골짜기를 품고 있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물론 후대에 가서는 이를 '관념산수'라 하여 '진경산수', '실경산수', '사경(寫景)산수'의 추구가 나오게 된다.
단양이라는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유래되었는데 '연단'은 신선이 되려는 자들이 먹는 환약이고, '조양'은 햇빛이 골고루 밝게 비치는 고장을 가리킨다. 단양 영춘면의 온달산성과 남천계곡 위쪽의 소백산 자락으로 구문팔봉(九門八峰)이 펼쳐진다고 전해 오는데 여덟 봉우리 속에 아홉 개의 바위 문이 숨겨져 있어 이를 열게 되면 새 세상이 온다는 전설에 따라 지금껏 '도사'들이 이 바위 문들을 찾는다고도 한다.
소백산 죽령을 넘어서면 영주시 풍기읍이 되는데 남사고(南師古)가 <격암유록(格庵遺錄)>에서 언급하였던 십승지 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금계리의 금계촌 마을이 있다. 금계포란(金鷄抱卵), 곧 황금빛 암탉이 품고 있는 계란처럼 아늑하게 감싸인 지형이라 했다.
금계천과 남원천이 합류하는 골짜기인데 이황(李滉, 1501∼1570년)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년)이 마을을 열어놓는 입향조가 되어 평해 황씨 세거지가 되게 하였다. 그가 노닐었던 금선대에 후일 세운 금선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주위 환경은 옛 명성과는 달리 허전하게 되어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한 초간정ⓒ국토학교 |
예천군은 황지에서 발원하는 낙동강 본류와 봉화에서 내려오는 내성천이 굽이치는 곳마다 경승지를 이루어 유서 깊은 전통마을들의 전통산수를 간직해오고 있다. <초간정(草澗亭)>은 권문해(權文海, 1534∼1591년)가 초가 정자를 골짜기 개울(澗) 위에 세운 것인데, 인걸은 간 데 없으나 산천은 의구하게 옛 정취를 오늘에도 간직한다.
용문면 상금곡리 일대에는 <금당실마을>과 <병암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지형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흡사하다 하여 <금당>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남사고가 꼽은 십승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선몽대(仙夢臺)>는 내성천의 백사장을 끼어 울창한 수림 속에 세워놓은 누대인데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 널찍한 물가에 내려앉은 기러기의 형세)라 하고 2006년 11월에 명승 19호로 지정되었다. 상류 쪽의 무섬마을, 하류 쪽의 회룡포 및 삼강주막과 함께 선몽대는 산자수명한 내성천의 대표적인 명승지이다. 하건만 영주시 평은면에 건설 중인 <영주댐>으로 인해 환경 위기에 몰리게 될 것을 현지 주민들은 걱정하고 있다.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일대는 낙동강 본류와 여러 지류 하천들이 풍부한 수자원의 젖줄이 되어주면서 널따랗게 옥답의 평원을 펼쳐놓는 물산풍요의 고장이다. 안동권씨 복야공파의 세거지를 이루어온 가곡리의 가일마을, 그리고 서애 유성룡을 제향하는 병산서원(병산리)과 특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하회리)은 조선 선비정신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반촌(班村)과 전통문화공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심층적으로 이 명가들의 고장을 답사코자 하는데 집성촌의 취락구조와 원림문화를 어떻게 근대공간문화로 전승하고, 접속할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한 탐구가 요청된다. 주택구조-마을공간구조/ 읍치(邑治)공간-국토공간의 유기적인 조화와 균형에 관한 과제를 전통마을에서 숙고해보고자 한다.
선인들은 <양백지간(兩白之間)>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태백산과 소백산의 '양백'에서 뻗어내리는 산줄기와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받아내는 고을…, 곧 경북 북부 산간지역의 미칭(美稱)이었다. 근대교통체계로 따지면 '오지'가 되고 정치경제환경으로 살피면 '낙후'가 되는 지역일 수도 있겠지만, 선인들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지역의 전통경관이 지니는 우수성과 탁월성에 관한 자부와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영주시 순흥면의 초암사(初庵寺)는 소백산 국망봉 산자락에 있는데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에 의상이 먼저 암자를 조성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조영된 초암사-부석사-청량사로 이어지는 산형은 곧 양백지간의 중심 공간벨트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조선시대의 안빈낙도 유림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니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한 서원들과 서당, 사우(祠宇)와 향교, 그리고 종택들과 자작일촌의 연계가 이루어져 왔다. 곧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별칭을 영남선비들은 내세우기도 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금동여래좌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좌향이다. 아침 햇살을 전면으로 받아들이는데 배후에는 광배처럼 소백산이 옹위하고 있다. 양백지간 전망대로서는 최적의 위치가 된다. 신새벽 부석사 해맞이를 기획해보는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고대로부터의 양백지간 문화역사지리를 채근해 보고자 한다.
원삼국 쟁패시대에 고구려 장수왕은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남방정책으로 소백산 이북의 단양 영월만 아니라 이남의 영주 봉화 청송 일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히어 신라를 압박했다. 군사기지로 영월 동강의 고성리 산성, 단양 영춘의 온달산성, 그리고 적성산성에서 계립령(마골참)에 이르기까지 겹겹으로 포진하고 있었는데, AD 550년대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신라의 반격이 시작된다.
부석사는 후일 의상이 창건하지만 당시에는 신라군의 북방진출 총공세를 위한 군사병참기지를 이루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살핀다. 진격 루트는 두 코스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유추한다. 하나는 부석사 일대에서 서쪽의 죽령 방면으로 진군하여 단양 적성산성을 공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석사의 주산인 봉황산 기슭을 타고 넘어 마구령-고치령을 돌파하여 온달산성과 고성리 산성을 탈취하려는 게릴라 작전이다.
경상-충청-강원의 3도가 숨바꼭질을 하는 골짜기가 있다. 남쪽의 경북 영주 부석면 남대리, 서쪽의 충북 단양 영춘면 의풍리, 동쪽의 강원 영월 김삿갓면 와석리에 걸쳐 있는 마구령-고치령-의풍-김삿갓 골짜기 일대이다. 속칭 <삼도마을>이라 하던 이 두메산골에도 자동차 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내륙지역의 가장 깊숙한 산간오지이던 곳의 풍광마저 마침내 들통이 나는 중이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라든가 김하돈의 <마음도 쉬어가는 고개를 찾아서>라는 옛길 탐방 기행의 복습 답사가 더 이상 심오한 것일 수 없게 되었다. 신라군의 게릴라 루트 추적이라든가, 소백산 남녘의 영주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이 소백산 북녘의 영월 청령포에 유폐된 폐왕 단종과 은밀히 거사를 모의하던 비밀 왕래의 유적지, 또는 동학 제2세 교주 최시형 은신처의 사적지들에 대한 학술 답사가 더 늦기 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부석면 남대리에서 영춘면 의풍리에 이르는 마구령은 아직까지는 2차선도 아닌 1차선이어서 버스 진입은 금지되고 소형차들만 왕래할 수 있다.
마구령의 오지 탐사 대신에 주세붕(周世鵬, 1495~1554년)의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오전(吾田)약수를 찾는다. 그는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43년에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세워 후일 이황의 건의로써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게 하였거니와 오전약수를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 약수를 음용하면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라고 칭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봉화에서 울진으로 통하는 36번 국도 덕분에 산간오지의 약수터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퇴계 이황은 1549년 10월에 단양군수에서 풍기군수로 옮겨 부임을 하는데 다음해 4월 22일 백운동서원에서 출발하여 죽계천을 거슬러 소백산 등정을 하여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이라는 명편의 기행문을 남긴 바 있었다. 그는 국망봉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서남쪽으로는 월악산이 은은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과 청량산, 문수산, 봉황산이 보일 듯 말듯 늘어서 있다" 하고 기록하였다.
특히 이때에 그는 죽계천의 경승지마다 명칭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이 아홉 군데나 되어 그 이후로는 이를 <죽계구곡>이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에는 초암사까지 소형차 도로가 개설되어 <9곡>의 경관은 제 빛을 잃고 있으나, 이를 복원하고 싶은 염원은 되살아나서 제주도 올레길이라든가 지리산 둘레길과 마찬가지로 <소백산 자락길> 조성사업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소백산 새봄맞이 답사 일정표를 작성하면서 이에 마음을 가다듬어 옛 시 한수를 읊고자 한다. 퇴계 이황의 <상화(賞花)>라는 7언율시이다.
한 차례 꽃이 피어 다시 한 차례 새로워지나니 (일번화발 일번신; 一番花發一番新)
차례대로 하늘이 내 가난을 위로하려 함이런가 (차제천장위아빈; 次第天將慰我貧)
조물주의 조화는 무심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며 (조화무심 환로면; 造化無心還露面)
건곤은 말도 없이 절로 봄을 머금고 있네 (건곤불어자함춘; 乾坤不語自含春)
시름 씻고자 술을 청하매 새들이 서로 권주가 부르고 (요수환주금상권; 澆愁喚酒禽相勸)
뜻 얻어 시를 쓰고자 하니 붓에 신이 들린 듯 싶네 (득의제시 필유신; 得意題詩筆有神)
무엇을 택하든 그 권한은 나의 하기 나름이지만 (전택사권 도재수; 詮擇事權都在手)
벌과 나비 어지러이 날도록 그냥 내버려 두려네 (임타봉접 만분빈; 任他蜂蝶謾紛繽)
퇴계의 봄맞이 시편은 '산수를 아는 자의 즐거움'을 노래하는데 한 차례 꽃이 피어 세상을 일신시키니 물질의 가난보다는 마음의 가멸음을 누리게 된 것을 기뻐한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면서도 벌과 나비 어지러이 날도록 그냥 허심탄회로 내버려 두려 한다는 것이니 양백지간의 주인임을 자부하였던 그의 '인심-도심 산수'를 따르고 싶다.
<안내> 소백산 답사에 필요한 학습 자료들을 국토학교 카페에 곧 올려놓고자 하니 많은 활용 바랍니다. 국토학교 카페 바로가기 : http://cafe.naver.com/dadsaschool
이와 함께 제21강에 이르는 국토학교 강의록들은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공동체-지난 강의> 사이트를 검색하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바로가기 : http://www.huschool.com
<답사 일정>
<1월 8일(토)>
07:00 서울에서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유진여행사 <국토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09:30-10:00 금선정(錦仙亭) (영주 풍기읍 금계2리 금선계곡)
풍기(豊基)는 풍요로움의 기본 바탕을 갖춘 고장이 되겠는데 위쪽에 놓인 금선계곡은 소백산 풍요의 첫 동네를 열게 한다. 3봉(峰) 2수(水)라 하는데 도솔봉, 연화봉, 비로봉의 3봉에 둘러싸이고 남원천, 금계천의 2수가 합류되는 길지이다. 전국 10승지 중에서 금선계곡의 금계촌을 제1승으로 꼽았던 남사고(1509~1571)에 의하면 '승지'라 하는 곳은 흉년, 전염병, 전쟁의 세 가지 재난이 들어오지 않는 길지여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는 이러한 세 유형의 재액으로 16세기의 국토와 민중이 황폐해져 있었음을 읽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금계촌은 대표적인 영남 유림의 하나로 꼽던 황준량이 입향조가 되어 평해황씨의 세거지를 이루어왔고 그가 노닐었던 금선대 일대에는 금선정 정자가 남아 있다.
아랫동네인 금계1리에는 <풍기인삼 시배지>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식민시대에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도참설에 따라 집단 이주한 이들이 남녘땅에 처음으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던 사연을 알려주고 있다. 문화재청의 문화재 위원을 역임한 김덕현 교수(경상대 지리학)에 의하면 금선정 일대를 <명승>으로 지정코자 했으나 주변 환경에 정돈되지 못한 점이 있어 보류되었다고도 한다. 근대화시대는 더 이상 도참시대의 <풍수지리>에는 관심이 없게 된 탓일까, 아니면 생태환경에 아랑곳을 않았던 탓일까.
10:30-11:00 초간정(草澗亭) (예천 용문면 죽림리)
중국 당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간변유초(澗邊幽草)'란 시구에서 정자 이름을 따온 것인데 1582년 권문해가 세웠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산골짝 시내에 숨은 그윽한 지초(芝草)임을 자처하는 것인데 소백산 지맥의 용수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의 암반 위에 올려놓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백과전서라 할 20권짜리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하고 <초간일기>라는 문집도 남긴 권문해는 자연에게 말 붙이기, 말 건네기를 통해 <산수>를 찾아내게 된 기쁨을 토로하기도 했다.
"긴 벌판, 넓은 언덕의 한 모퉁이에 숨어있어 조금도 스스로 광채를 드러내지 못하여 모두들 길옆에 내버려두고만 있었던 곳"을 권문해가 찾아내어 정자를 짓고 보니 방치돼 있던 풍경이 빼어난 명승 경관으로 변모되더란 것.
11:20-11:50 선몽대(仙夢臺) (예천 호명면 백송리)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 1538~1581년)가 1563년에 세운 정자인데, 그는 퇴계의 둘째 형 이하(李河, 1482~1544년)의 손자였다. 현판의 글씨는 이황이 직접 찾아와 써준 것이었고, 목판시들은 정탁, 류성룡, 김상헌, 이덕형 등의 친필 작품들이며 후일 정약용도 부친과 함께 이곳을 심방했다. 지명이 백송리인 것은 이 마을을 개창할 적에 기이하게 생긴 흰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뒤편의 우암산에는 몇 백년짜리 소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등의 노거수들이 지금도 울창하다.
무엇보다도 내성천의 휘어져 도는 평사십리(平沙十里)의 백사장이 정자 앞으로 탁 틔어져 산과 물의 어울림, 곧 산수미(山水美)의 상쾌함을 누리게 한다.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신선이 꿈속에서 노닐던 누대라는 '신선경'의 경관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더 요청될 듯.
▲선몽대 앞으로 탁 트인 산수미(山水美)의 상쾌함 ⓒ국토학교 |
12:20-13:00 점심식사 (안동 풍산면 한정식집 <풍전>에서 안동비빔밥(헛제사밥) 또는 간고등어밥)
13:20-14:00 가일(佳日)마을 (안동 풍천면 가곡리)
'세제기미(世濟其美)'라는 문자가 있다. 전대가 이룩한 미덕을 후대가 계승하여 전해주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안동권씨 복야공파 세거지를 이루어온 가일마을에서 '연년세세'라는 어휘와 '대대손손'이라는 어휘를 새삼 되새긴다. 연년세세 6백년의 시간층을 간직해오고, 대대손손 가학(家學)의 의리전통을 지켜온 마을인데 그 역사의 날줄과 씨줄이 모두 장중하다.
안동지역의 진산인 학가산(870m)에서 검무산을 거쳐 내려오는 산줄기는 가일마을의 주산인 정산(井山, 289m)을 지나 하회마을의 주산에 해당되는 화산(花山, 328m)에 이르는데 두 마을의 전통취락구조를 비교 연구해봄직하다.
가일마을 입구에는 가일지(池)라는 저수지가 있고 학자수(學者樹)라는 나무가 있는데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모이던 나무라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수곡(樹谷) 종택은 1792년에 이 가문의 중흥조라 할 수곡 권보(權䋠, 1709~1778년)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고가이고, 시습재(時習齋)는 연산군 시대에 참담한 사화를 만났던 권주(權柱, 1457~1505년)의 생가 자리에 축조된 19세기의 건축물이다.
이 마을의 근현대사는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의 애환을 간직하는데, 신간회 결성과 6.10만세운동 당시에 좌파의 대표자로 활약했던 권오설(權五卨, 1899∼1930년)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추모사업을 일으키고 있다. 경북 북부권에서는 전통마을들을 순회하면서 <유교문화의 산업화>를 위해 '세계유교문화축전'을 벌여왔는데 가일마을에서도 야간 고가(古家) 공연이라든가 미술전시회가 열렸다.
14:30-15:20 병산서원 (안동 풍천면 병산동)
병산서원의 홈페이지에는 <자연과 사람이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서원건축의 백미>라는 로고가 떠 있다. (바로가기 http://www.byeongsan.net/)
'예제건축(禮制建築)'이라는 용어가 있다. 종묘, 사직, 궐루, 종루, 강학소 등의 건축물들을 가리키는데 천지인 삼원사상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위엄을 높이려는 권위적인 공간구성이다. 병산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보이는데 앞쪽이 학문연마의 강학공간이고 뒤쪽의 높은 지대에 제향의 사당공간이 배치된다.
서원의 정문은 외삼문의 3문이 보통이지만 이 서원의 솟을삼문은 가운데만 판문(板門)이다. 이어서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晩對樓)의 공간 구성이 되는데 이 누각은 휴식과 강학 겸용의 복합공간이다.
1986년 여름, 리영희 박현채 김진균 강만길 고은 등 기라성 같은 학술-예술-언론인들이 병산서원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한 일이 있었다. 모두 함께 만대루에서 숙박하며 뜨거운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에 과열되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아마도 조선 선비들의 모임 자리는 더 치열했으리라.
15:40-17:00 하회마을 화천서원-옥연정사-부용대-겸암정사 (안동 풍천면 하회리)
별신굿 탈놀이 전수관-삼신당 신목-양진당-충효당-돌담길-마을 숲을 일주하는 하회마을 탐방은 다른 기회에 갖기로 하고 이번에는 마을의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부용대 일대를 찾아간다. 유운룡-유성룡 형제가 학문 탐구하던 정사(精舍)는 고택이기는 하지만 여느 살림집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무엇보다도 건너편으로 물돌이 동네 하회마을 전경을 광각(廣角) 으로 조망할 수 있는데 명품의 문화경승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년)이 그의 형님 겸암(謙唵) 유운룡(柳雲龍, 1539~1601년)을 그리워하여 겸암정사를 배회하며 읊은 시를 여기에 인용한다. 오늘의 방문객들이 이러한 낙동강 경관 풍류와 선비정신을 어찌 자기 마음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발끝에 향기로운 풀 냄새 모이고 (遊從芳草合)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는데 (仙路白雲生)
그리움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떨어지니 (愴憶空垂淚)
강물도 덩달아 흐느끼며 밤새도록 흘러가네 (江流夜有聲)
하회마을 바로가기 http://www.hahoe.or.kr/
▲김억 화백의 목판화 작품 <하회마을> |
18:30-19:20 저녁식사 (영주 부석면 <종점식당>에서 산채백반과 청국장)
19:30 숙박 (영주 부석면 코리아나호텔)
1월 9일(일)
07:00-08:20 부석사 무량수전 새벽 탐방 (영주 부석면 북지리)
소백산에서 청량산으로 뻗는 산줄기의 한 복판에 놓인 봉황산(818m)은 오지랖이 넓은 산이어서 부석사를 번쩍 안듯이 받아들이는 품새조차 너그럽다. 산사(山寺)는 산이라는 수직공간에 사원이라는 수평공간을 조영시키게 마련이지만 부석사는 마냥 상승공간으로 부상되어 무량수전을 올려 세워놓고 있다. 속세로부터 벗어나 <걸어서 하늘까지> 닿게 되는 듯한 비상(飛翔) 탈속의 상쾌함이 있다.
부석사의 내부공간 못지않게 외부공간을 살펴야 하는데 곧 소백산 전망대로서의 부석사 문화경관이다. 화엄 만다라의 장엄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의 견고함에 의지하여 이 사원이 창건되던 676년(문무왕 16) 당시의 '시원공간' 내지는 '원초공간'의 구성과 설계를 심호흡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무량수전 내부의 금동여래좌상 미소 배견(拜見)만 아니라 외부의 뜬돌(부석)-석등-3층석탑 일대를 마냥 서성거려 나 자신의 미소를 지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08:30-09:10 아침식사 (영주 부석면 <종점식당>에서 해장국백반)
09:40-10:10 오전약수
철분 성분 함량이 가미된 탄산수로 청정지역의 청정수가 깊은 산 속 옹달샘 물맛보다도 상큼하다. 백두대간의 선달산(1236m) 구간이 되는데, 고치령-마구령-갈곶산-선달산-박달령-도래기재 종주의 산꾼들이 쉬어 넘는 곳이기도 하다.
11:00-11:40 소수서원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부석사가 뜬돌 숭배의 샤머니즘 신성공간이던 곳을 불교도량으로 전환시켰듯이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불교산수'의 터전이던 곳을 '유교산수'의 예제건축 공간으로 개편시킨 것이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최초의 사액서원 창건은 두 가지 큰 뜻을 갖는다. 관립학원(향교) 중심에서 사립학원(서원) 중심으로 전환시키게 하였다는 점, 그리고 중앙 부패권력에 맞서는 영남유림의 근거지를 장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왕위 찬탈의 세조(世祖, 1417∼1468년)는 아우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년)만 아니라 순흥 고을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고 대대적인 살육을 감행하여 피살자들의 피가 죽계천 하류까지 흘러 <피끝>이라는 마을 이름까지 생겨났는데 바로 그 일대에 소수서원을 세웠던 것.
특히 대량 학살된 순흥안씨들의 선조가 되는 안향(安珦, 1243~1306년)을 '성리학의 시조'로 섬기어 제향하는 국립 사액서원 건립 허가는 훈구파들에 맞서온 사림파들의 '도학정치시대'를 예고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옛 선비들의 바른 정신을 계승하고 유교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서원 맞은편에 조성한 <영주 선비촌 테마파크>는 특히 경북 선비마을 고택들을 그대로 재현하여 숙박할 수 있게 하는데, '명가한옥박물관'의 역할도 한다.
11:50-12:30 점심식사 (순흥면 <선비촌종가집>에서 선비촌삼계탕 또는 소고기국밥)
12:40-14:10 소백산 죽계구곡∼초암사 걷기
<소백산 자락길>은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서 충북 단양 장림리까지 이어지는 총 40.7km의 녹색길이다.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스토리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 중 하나인데 3개의 코스로 구성된다. 이중 한 시간여 죽계구곡에서 초암사 사이를 걸어본다.
1코스 : 소수서원-금성단-죽계구곡-초암사-달밭골-비로사 삼가리(12.6km)
2코스 : 비로사 삼가리-금계호-금선정-풍기온천-소백산역(구 희방사역)(16.7km)
3코스 : 소백산역-죽령옛길-단양 용부원리-죽령역-장림리(11.4㎞)
14:40-15:20 적성산성, 신라적성비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 춘천방향)
적성산성(赤城山城)은 남한강 본류와 죽령 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죽령천, 그리고 삼선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 방향에서 흘러드는 단양천의 세 갈래 물길이 한 꼭짓점으로 모여드는 절묘한 삼각주 지대에 삼각형의 형태로 솟은 성재산(324m)에 축조한 삼국시대의 고성이다(사적 265호).
더구나 이 산성에는 1979년 5월 국보 198호로 지정된 '단양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가 있다. 하지만 2001년 12월에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는 이 사적지와 국보를 아랑곳 않고 관통하도록 하여 고속도로 휴게소 경내에 껴묻게 하고 있으니 단양군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빼어난 자연유산의 경승지이자 역사문화유산의 명승지를 보존할 수만 있었다면 세계문화유산의 값어치를 톡톡히 해내는 문화관광의 명소가 되었을 것인데 이를 앗기고 말았으니, 과연 이 시대의 반달리즘을 어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뒤늦게나마 단양군과 영주시는 <소백산문화특구>를 기획하고 있는데 편리해진 교통의 이점은 최대한으로 살리되 문화콘텐츠를 새롭게 작성하려고 한다. <중앙>이 벌여놓은 졸속 위주의 국가사업에 대해 지자체와 지역시민들이 이의 뒷설거지를 떠맡으면서 지역문화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는 정성과 열의를 통해 <소백산문화>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될 것이다.
15:30 서울로 향발
국토학교 1월 참가비는 18만원입니다(교통비와 숙박비, 4회 식사와 뒤풀이,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국토학교는 2009년 4월에 개교하여 국토답사를 매월 해왔는데 국토강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2009년>
제1강 (4월):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
제2강 (5월): 영남 전통마을 순례 (답사 키워드 - 산은 책이다)
제3강 (6월): 호남의 누정문화 원림문화 (풍경의 발견과 재발견)
제4강 (7월): 북강원의 요산요수 (동해안 풍류길 되살린다)
제5강 (8월): 내포지방에 부는 바람 (백제의 미소와 제2의 지중해)
제6강 (9월): 금강문화권의 초대장 (옛이야기 재잘대는 실개천 휘돌아)
제7강(10월): 낙동강 따라 가야 달빛기행 (우리 땅의 고고학 상상력)
제8강(11월): 만추의 호남 단풍길, 침엽수길 (대자연 소자연 합자연)
제9강(12월): 동해에서 묵은해 보내기(동해용왕과 수로부인과 해신당)
<2010년>
제10강 (1월): 임진강의 봄, 한탄강의 봄(분단유목문화 가로지르기)
제11강 (2월): 얼쑤! 대보름 달마중 가세(봄맞이 카니발 : 아산 공주 청양 부여)
제12강 (3월): 순천만에서 섬진강으로(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제13강 (4월): 남한강 상류 녹색체험(주천강, 영월 동강, 정선 아우라지)
제14강 (5월): 북한강의 흐르는 강물처럼(홍천강-소양강-파로호-내린천)
제15강 (6월): 호남평야 황톳길 순례 (동학의 지평선과 하늘)
제16강 (7월): 신(新)택리지-안성(安城) 탐구(고은 시인, 이반-김억 화백 현지 특강)
제17강 (8월): 강화만-경기만 서머플레이스 탐방(스토리 간직한 황해문화를 위하여)
제18강(10월): 호남 가을 풍광...빛의 축제, 흙의 축제(광주비엔날레, 강진도자기아트프로젝트)
제19강(11월): 만추(晩秋)에 찾는 경주지역 세계문화유산(서라벌 아고라의 사랑이야기)
제20강(12월): 남해 바닷가의 겨울나그네(진주-남해-고성-통영 블루투어리즘)
▲ <국토학교 제21강 답사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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