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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손내옹기의 이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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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백운면 손내옹기의 이현배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

그는 옹기장이다. 그의 생각은 엉뚱하면서도 깊다. 저 깊은 데서 끌어올린 생각들이 외면화 되었는지 그의 얼굴이나 몸가짐은 청량감이 들 정도로 청정해 보였다. 그 생각의 깊이만큼 그의 외모도 마치 종교인을 닮았다. 스님 같기도 하고 신부 같기도 하고 목사님 같기도 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백운면 마을조사단 단장일 때였다. 지난번 백운면 마을 조사단 단장들의 집담회 때도 1기 단장으로서 그가 어떻게 마을 조사단의 단장으로 일을 시작했고 경과가 어땠는지 쓴 바 있다. 그는 그 후로 만날 때마다 나에게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어떤 땐 마을 조사단장으로, 어떤 땐 옹기장이로, 또 어떤 땐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사람으로.

▲ 진안에서의 아침, 손내옹기에서 옹기장이 이현배를 만났다. 손내옹기는 산 속에 있을 법한데, 의외로 도로 옆에 붙어있다. 왼쪽부터 이현배, 박명학, 오인규, 민병모, 필자

처음 만났을 땐 그가 마을 조사단 단장 일을 관두기를 전후해서여서 조사단 안팎의 일로 여러 가지로 부대끼고 있을 때였다. 2006년인가 당시 처음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부인은 나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도 그리 유쾌치는 않았는데 재작년에 그의 집엘 갔을 때 그 사정을 비로소 알았다. 마을조사단 일로 속앓이를 하던 그 당시 그녀는 마을 조사사업과 관계된 일로 내가 온 줄 알고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나에게도 그 불똥이 튄 것이다. 그 뒤 그녀는 그의 집 마당에서 볶은 돼지고기와 함께 점심을 맛있게 대접하면서 나에게 그 때 일을 사과했다.

그는 여기가 고향은 아닌 모양이다. 장수가 본 고향이다. 젊었을 때 서울의 대형 호텔인 힐튼호텔에서 주방일을 하기도 했다. 거기서 주로 초콜릿 같은 후식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의 글을 보면 젊어서 엿장수도 했다고 하는데, 세상을 알려고 그는 안 해 본 일이 없는 듯했다. 세상을 떠돌던 그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흙 담을 뜯어 먹던 버릇대로 흙으로 다시 돌아 왔다. 1991년 봄, 그는 서울의 호텔일도 다 버리고 흙의 숨결이 살아 있는 흙그릇을 만들려고 전남 벌교의 징광옹기점 박나섭옹과 경북 문경의 영남요 백산 선생한테 3년 동안 옹기일을 배웠다고 한다.

그가 이 곳 백운 정송마을에 들어와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년이 다 되 온다. 이 정송(鼎松)마을은 땔나무(소나무)가 많은 솥(가마)이 있는 마을이란다. 그의 옹기공방은 '솥'을 발음대로 '손'으로 해서 솥이 있는 내, 즉 '손내 옹기'로 부르는 모양이다.

▲ 가마터와 옹기들 전경. 마당에 옹기들이 빼곡해서 따로 간판이 없어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가마에 불을 떼는 것은 못 보았지만, 각양각색의 옹기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는 호흡을 중요시한다. 즉 숨쉬기를 귀하게 여겨 숨 쉬는 그릇을 만들고 싶어 도자기 보다 옹기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또 발효식품이 많은 우리 생활에 이 옹기가 왜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설명했다. "옹기는 발효를 위한 그릇이에요. 도자기와 개념이 다르죠. 우리는 발효 형식이 독특해요. 조건만 만들어 놓고 균을 부르는 식이라 소통의 구조를 가져야 해요. 기후적 조건, 즉 사계절이 뚜렷하고 여름에 고온 다습한 이런 상황에서도 발효가 진행이 되려면 통풍이 잘돼야 해요. 그래서 도자기와는 다른 흙을 써요. 2차 퇴적 점토를 쓰는 거죠. 자기(磁器)는 지구가 형성될 때의 단일한 흙을 쓰고 옹기(甕器)는 지구가 형성되고 나서 비바람에 씻겨온 흙을 쓰는데, 퇴적토라서 성분 구조가 잡스러워요."

"옹기가 질그릇과 오지그릇이 합친 말이거든요. 질그릇은 토기인거고, 오지그릇은 오짓물을 입힌 거예요. 오지가 까맣다는 뜻으로, 잿물을 오짓물이라 그래요."

그는 옹기와 불가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 그는 이 숨 쉬는 그릇인 옹기 만들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자지고 있다. 그리고 이론과 이치에 대해서도 빠삭하다. 가히 장인의 반열에 오른 것 같다.

▲ 옹기 흙이 잡스러워서 민감하기 때문에, 옹기 만드는 작업장은 입구를 최소화 시켜서 음침한 움집 형태를 띤다고 한다. 토굴 같은 작업장 안 역시 마무리 손길을 기다리는 옹기로 빼곡하다.

내가 이번에 새로 완역되어 나온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고 연암이 중국의 가마가 조선의 가마 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더 효율적이고 좋다고 연암이 말했다고 하자, 그는 벌써 연암의 글을 읽었는지 연암의 지적은 우리 가마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못 박으며 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옹기 흙이 잡스럽다 보니까 건조과정과 굽는 과정이 까다로워요. 연암 선생이 놓친 게 그 부분인데, 흙이 잡스러워서 공기층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불을 서서히 길게 때줘야 해요. 발효의 메커니즘과 비슷해요. 뜸들이듯이 지그시 때줘야 해요. 가락이 산조가락이나 재즈처럼 그래요. 불 때는 템포를 서서히 하다가 휘몰아쳤다가 이렇게... 익히기만 한 그릇과 뜸들이듯이 구운 그릇하고는 발효의 기능이 달라요. 발효에 유익한 그릇이지 자기로서는 취약한 그릇이죠."

그의 작업실에서는 지금 엄청 큰 옹관 작업이 한참이다. 등신대 보다 더 커 보인다. 옹관은 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체를 넣는 옹기로 된 관이다. 마한시대부터 쓰였고 영산강 유역에서 많이 발굴된다. 이현배에 의하면 옹관은 환골이 잘된다고 한다. 숨 쉬는 옹기로 된 관이니까.

▲ 제작중인 옹관은 크기가 상당히 컸다. 영산강 유역의 사람들이 백제로 편입되기 전에 옹관을 대형화시켰는데, 시체를 넣는 대형 옹관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새가 갖는 신앙관과 관련된 영생관이 작용하여 알 형태의 옹관 모양이 나온 것 같다.
아마 박물관에서 부탁을 받고 옛날 옹관의 실제 크기와 똑같이 제작하는 모양이다. 무게도 5~600kg 나간다니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 옹관을 익힐 때는 이 크기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가마도 새로 쌓아야 하는 모양이다.

진안군에서는 그에게 백운면을 중심으로 한 문화활동의 중심에 서도록 자꾸 요청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조심스러워 한다. 마을조사단 단장을 할 때 이런 저런 갈등도 경험했지만 옹기일이 많아지고 여기저기서 옹기쟁이 이현배를 찾는 데가 많아져 강연도 요즈음 자주 다녀야해서 그는 정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사업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날도 진주에 초대 받아 강연을 하러 가야해서 우리와 헤어져 떠났다.

그는 만물의 이치를 유연하게 깨달아 가고 있다. 그 이치가 마을 주민들과의 소통을 이루는 일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 아마도 백운면은 그를 품고, 그는 백운면을 품고.... 더불어 같이 잘살아가길 바랄뿐이다.

▲ 이현배씨는 조용하지만 소신 있게 옹기에 대한 이야기를들려주었다. 마을 안에서 그가 고집 있는 옹기장이로서또 조화로운 마을 주민으로서 더불어 나아가길 바라며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까페http://cafe.naver.com/yem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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