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익 |
우리가 믿었던 선(善)한 세계는 모두 사라졌다.
동트는 새벽 곤한 잠을 떨치고 밥 한술 허겁지겁 밀어넣으며 회사로 출근하던 아버지는 지금 어디로 갔나.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통통한 손가락을 흔들며 작은 참새처럼 짹짹거리던 어여쁜 아가는 지금 어디서 불안의 포대기에 맑은 두 눈망울을 감추며 자라나고 있는가. 알뜰하게 돈을 모아 가족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하고픈 엄마의 소소한 기쁨은 어느 거리에 송두리째 내팽개쳐졌는가.
쌍용차에서 한진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아야 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청문회에서 정동영 의원이 한 말처럼, "이들이 원래 죽을 운명이었는가, 조 회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아이들의 아빠로 살아 있을 사람"인 것이다. 그들이 죽인 것은 단지 한 사람이 아니다. 그와 함께, 삼포를 견디면서 취업에 목숨을 건 20대 청년들, 스스로를 위해 한 번도 푹 쉬어본 적 없는 30, 40대 가장들이, '열심히 살면 잘되겠지'라고 비루한 일상을 견디는 우리의 신념이 목을 매달고 죽어간다.
대량해고는 회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구조적 해법'이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정작 경영상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털끝만큼의 책임도 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부(富)를 갖는데, 작지만 소중한 미래를 꿈꾸었던 선량한 사람들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훅 꺼져간다. 이제 나는 콩쥐팥쥐 유(類)의 권선징악 따윈 휴지통에 처넣어야겠다.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해고노동자들은 외친다. 현대의 일급살인자들은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세련된 말씨로 '사직'을 권고/통보하고, '희망'을 앗아가며, 해고된 사람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도록 세뇌한다. 그러한 것들은 '신자유주의'라는 기기묘묘한 엉터리 패턴의 포장지로 덮여 있다. 그러면 우리들은 처음에는 분노하고, 항의하다가,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지쳐 조용히 지상을 떠난다.
'쌍용차'로부터 출발하여 '한진'으로 이어진 이 길은 노동자의 길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장래 희망란에 '아빠, 엄마와 같은 노동자'라고 적을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노동자의 천릿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옷도 변변히 없는 구두수선공 세몬이 벌거벗은 청년 미하일에게 낡은 외투를 서슴없이 벗어주는 대목을 통해 '사랑'을 그 대답으로 내놓고 있다. 톨스토이가 지금 다시 쓴다면, 그는 희망버스에서 그 '사랑'의 현현(顯現)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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