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현 감독의 영화 <파수꾼>(2011) |
그러나 윤성현 감독과 같은 새로운 신인들이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구성하는 새로운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지난 20세기의 정신적 상처(트라우마)가 있다. 그것은 지난 20세기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사회와 그 사회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폭력적으로 발버둥치고 있는 초중등교육과 대학 교육의 현장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만들어진 식민지성과 미국에 대한 종속의 근대성이 결합하여 구성된 "식민지 근대성"은 끊임없이 한국 사회로 하여금 선진국을 해바라기하는 후진국을 강요하며, 또한 한국 교육을 영어 식민지로 만들어 미국의 대학을 해바라기하는 식민지 대학과 교육을 강요하고 있다.
<양철북>(독일, 1979)에 등장하는 "오스카"가 나찌 치하에서 스스로 성장을 멈추고 난장이로 남아있는 것처럼, "식민지 근대성"은 한국 사회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멈추고 일본과 미국의 권력을 해바라기하는 난장이 국가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식민지 근대성"은 이 세계와 인간과 자연을 주인과 노예, 혹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서열주의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우정을 구성하는 일대 일 상호관계의 느낌과 감각을 지닌 윤성현과 같은 새로운 감독들에게 그들의 자유로운 성장을 가로막고 한국사회를 난장이로 만드는 정신적 상처이다. 그래서 윤성현 감독은 그의 사춘기, 혹은 청소년 시절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파수꾼>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우리 관객들도 영화 <파수꾼>을 통하여 지난 20세기에 만들어진 "식민지 근대성"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과 우정의 일대 일 상호관계의 느낌과 감각으로 구성된 21세기의 한국사회가 지니는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사유하게 된다. 그 역동적 생명의 힘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모두 서열주의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우정을 구성하는 일대 일 상호관계를 구성하는 역동적 생명의 힘이다. 영화 <파수꾼>은 일대 일 상호관계의 느낌과 감각의 힘이 "식민지 근대성"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한국사회를 미래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힘을 잘 보여준다.
II. 죽음을 강요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와 교육
▲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
근대 인문학의 문명과 야만, 그리고 근대 사회과학의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으로 구성된 "식민지 근대성"은 야만과 후진국의 식민지 지역이 문명과 선진국의 제국주의 지역에 대한 열등감으로 구성된 식민지인의 자의식이 만드는 근대적 "이성"이다. 사랑과 우정의 일대 일 상호관계를 배제하고 오직 주인과 노예,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서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근대적 "이성"은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성"의 "이성"은 제국주의 지배를 위하여 근대적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강요되기도 하고, 또한 열등감을 지닌 식민지인 스스로 취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지 근대성"의 열등감은 이미 지리적이거나 역사적으로 문명과 야만이거나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분법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자부심으로 전환되거나 서열구조의 최고에 이르는 승자에 도달할 수 없는 의식의 구조이다. 그 구조 속에서 자부심을 획득하거나 승자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다. 그래서 영화 <파수꾼>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에 다니는 대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처럼, 혹은 자살률 세계 최고라는 대한민국 자살공화국의 실상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영화 <파수꾼>은 한 소년의 죽음을 추적하는 것으로 "식민지 근대성"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식민지 근대성"이 지배하는 식민지 근대 한국사회의 최고 정점이기 때문에, 서울의 강북과 지역 중소도시에서 그토록 우러러보는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기태"(이제훈 분)의 죽음은 "식민지 근대성"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식민지 근대성"을 삶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조성하 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다. 그것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자라난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의 차이는 영화에서 "기태"의 아버지가 아들 "기태"의 죽음을 추적하는 것과는 달리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과 같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자라난 한국사회의 식민지 근대권력은 죽음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와 교육이 지니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본질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본질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과는 달리 소시민의 "식민지 근대성"을 경험한 "기태"의 아버지는 "동윤"(서준영 분)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라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기태"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기태"의 아버지는 그 책임감을 다하기 위하여 오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고 싶을 뿐이다.
▲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
"기태"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 "동윤"이다. 그는 이미 "식민지 근대성"을 유지하려는 서열구조의 교육에서 스스로 벗어나 있는 자유인이다. "동윤"이는 중학교 시절에 주먹으로 학교를 제패하는 서열구조의 "짱"을 경험하였지만, 그것이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 속에서 결코 영속적으로 지속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지닌 21세기의 자율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년이다. 그래서 그는 서열구조의 "짱"과 그 똘마니들이라는 식민지적 서열구조에서 벗어나 "기태"와 "희준"(박정민 분)이와 함께 상호 일대 일의 친구관계를 구성하는 우정의 역동적 생명의 힘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삶의 단위는 단지 우정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소년들에게 다가오는 낯선 사랑은 식민지 근대성을 넘어서는 우정보다도 더 큰 힘이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자율적인 생명의 존재로 성장하기 위하여 일대 일 관계를 맺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생명성이다. "동윤"이와 "기태" 그리고 "희준"이가 만드는 "식민지 근대성"을 인위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우정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등장하면서 그 본색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참하게 깨어진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 근대성"의 교육구조가 온 몸에 배어있는 "기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기태"는 고등학생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의 "식민지 근대성"이 만든 21세기의 전형적인 기형아이다. 그는 이미 자신의 언어마저도 잃어버리고 영어를 모국어처럼 생각하는 "식민지 근대성"의 초중등교육의 희생자이며, 서로 동등한 사랑과 우정을 만들 줄 모르는 식민지 근대 권력의 구조와 동일하게 사유한다. 자신의 적과 싸우면서 이미 적과 동일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 교육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랑과 우정마저도 "식민지 근대성"의 폭력과 강요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 "동윤"이와 "희준"이는 각각의 자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하여 사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태"는 사랑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사랑을 할 줄도 모르는 불구자이다.
그래서 "기태"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희준"이가 좋아하는 "보경"(정설희 분)이가 부담스럽고, "보경"이 때문에 점점 멀어져만 가는 "희준"이가 언짢다. "식민지 근대성"의 한국사회와 교육이 "기태"를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만들 줄 모르게 만들고, 심지어 사랑과 우정의 관계조차도 폭력적 서열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태"는 사랑과 우정이 산산조각이 난 후에 비로소 스스로 "식민지 근대성"의 화신이 되어 산화하는 것이다.
III. 사랑과 우정의 관계 재영토화하기
"동윤"이는 "기태"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21세기를 살고 있는 파릇파릇한 "기태"라는 소년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태"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교육을 이끌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장례식이어야만 한다. "기태"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동윤"이는 혼잣말로 "그래, 네가 최고야!"라고 말한다. 오직 "최고"만이 살아남는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와 교육, 그리고 그 "최고"는 단지 언어의 허상일 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식민지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그 "최고"를 달성하는 길은 오직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길일뿐이라는 사실을 "동윤"이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 사라져버린 "기태"에게 "그래, 네가 최고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동윤"이의 몫이다. "기태"가 "식민지 근대성"의 한국사회와 교육구조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식민지 근대성"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과는 달리 "동윤"이와 "희준"이는 "기태"만을 남겨놓고 그 구조에서 도망쳤다. 그래서 "기태"의 외로운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알고 있는 "동윤"이는 "식민지 근대성"의 완전한 죽음이 오지 않는 이상 "기태"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구조나 교육구조 내부가 아니라 그 구조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
영화의 "동윤"이는 윤성현 감독이 된다. 그래서 윤성현 감독은 영화 <파수꾼>의 영상 이미지 속에서 "동윤"이가 되어 영화 관객들과 함께 "기태"의 장례식과 더불어 우리 사회와 교육에 만연되어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장례식을 치르자고 제안한다. 그 장례식에는 "식민지 근대성"의 삶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는 "기태"의 아버지도 있다. 영화 속에서 거의 아무 말도 없는 "기태"의 아버지는 영화 밖에서 관객들과 함께 "식민지 근대성"의 장례식을 치르는 대열에 함께 할 것이다.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장례식을 치루는 것만이 이미 죽음을 선택한 카이스트의 학생들이나 수없이 많은 청소년들과 더불어 "기태"의 진정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태"의 아버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성"에 대한 장례식은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구조 속에 내재해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를 타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열구조의 타파는 지난 20세기의 세대들이 아닌 새로운 21세기의 세대들이 등장하고 있는 교육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성"의 서열구조를 타파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것은 "기태"처럼 "식민지 근대성"의 망령을 뒤집어쓰고 스스로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동윤"이나 "희준"이처럼 "식민지 근대성"의 사회와 교육에서 탈영토화하여 사랑과 우정의 사회와 교육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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