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철학자들의 산실인 파리8대학은 원래 '실험대학', '대안대학'이었다. '68혁명'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세워진 이 대학은 '교육의 기회균등과 자유롭고 비형식적인 학문연구'를 기치로 내세우며 기존 대학들의 입학 전형 방식을 거부했다. 대학입학 자격고사는 물론 고등학교 졸업장도 요구하지 않았다. 교수들은 학생들을 '가르칠'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공부하는' 대상으로 봤다.
'한국의 파리8대학'을 꿈꾸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지식순환협동조합 노나메기 대안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9월 27일 설립 발기인대회를 연데 이어, 10월 25일 창립총회를 갖는다. 추진위는 8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노나메기 대안대학의 설립 취지와 목표,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들의 설명을 몇 가지 키워드로 분류해 살펴본다.
대안: 대안 초중고교 다 있는데, 대안 대학은?
최근 대학 사회를 술렁이게 한 사건이 있다. <중앙일보>의 대학 평가에서 성균관대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제치고 종합대학 중 1위를 차지했다. 교수들은 겉으로는 "제깟 중앙일보가 뭔데 대학들을 평가하느냐"면서도 한 가지 우려 점을 나타냈다. 이번 대학 평가에서 중앙대학교도 10위에서 8위로 상승했다. 재벌 기업이 투자하는 대학들의 순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 특히 최근 대학의 시장 경쟁이 강화되면서 '재벌대학'들이 각종 평가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대학 교육을 피폐화시킨다. 교수들에게 논문을 강요해 표절이 횡행하고, 어떤 대학은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이사장 소유 기업에 학생들을 장부상으로만 임시로 취직 시키는 경우도 있다 한다. 영어 강의를 강제해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 모두 말이 없어졌다는 말도 들린다. 대학이 이미 취업 학원화 된지 오래다. 최근 각종 사설 인문학 강좌에 대졸자들이 몰리는 이유도 대학이 인문학 교육 기능을 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교육의 몰락이 비단 대학 뿐만은 아니다. 초중고등 교육 시스템도 수십 년 째 방황하고 있다. 시민들은 스스로 '대안'을 찾아나섰다. 각종 대안학교들이 늘어났다.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국문학)는 "대안을 찾는 부모들이 공동육아를 하고 초중고등 대안학교를 만들어 애들을 보내고 있지만, 왜 대안 대학은 없느냐는 물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대안 교육을 실시해도 고등학교 졸업 후 갈 수 있는 대학은 제도권 대학 밖에 없는데, 대안학교 학생들은 제도권 교육의 경쟁 시스템에서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대안대학에 대한 전망이 없으니 초중고 대안학교 진학은 '모험'이 된다. 대안대학이 필요한 이유다.
통섭: 경쟁에서 협동으로
'노나메기'는 '나누어 먹인다'는 뜻이다. 노나메기 대안대학의 교육 이념은 '통섭', '협력(협동)', '순환' 등이다.
이들은 "분과학문으로의 분화만 있고 학문 간 통섭이 없을 경우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흐름의 전체상을 학문적으로 조망할 길이 없다"며 "개별 교수나 연구자들은 부분적 지식에만 매몰돼 회 전체의 대안적 흐름을 학문적으로 제시하거나 새로운 학문연구의 경로를 발견하는 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안대학은 기존 대학과 패러다임이 다른 강의를 개설할 계획이다. 전공 간의 벽을 허물어 '정신분석과 인지과학',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과 같은 이론 강좌를 여는가 하면, '기본소득', '민중의집', '도시농업', '민중생협' 등과 같은 실천강좌, '성찰적 글쓰기와 토론'과 같은 워크숍 강좌 등의 체계를 갖추고 수강생들로 하여금 이론-실천-순환 강좌를 순환적으로 수강케 할 계획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테마는 '협력'이다. 이들은 "지식순환협동조합은 협동조합운동의 목록 위에 단순히 이름 하나를 추가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다"라면서 "분절된 지식들을 통합하고 대중적인 경험들을 연결시켜, 협력사회로의 전환을 주도할 새로운 주체을 형성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정치학)는 "요즘의 협동조합 운동은 경제적 영역에서의 운동에 그치는 경향이 있는데, 교육과 삶의 영역으로 개척하고자 한다"고 노나메기 대안대학의 의의를 설명했다.
학습 공동체: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량 산실
한 노교수는 "독재정권 시절 대학에는 각종 학회와 동아리가 이론 학습과 사회 연구의 주무대였다"며 "교수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민주화의 역량은 사실 강의실이 아니라 학회운동과 거리에서 키워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 대학에서는 더 이상 이런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노나메기 대안대학은 이런 자발적인 학습의 전통을 살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이론과)는 "지금도 대학에는 훌륭한 강의가 개설돼 있고, 민간에서 개설되는 좋은 인문학 강좌도 유행이지만, 파편화돼 있는 학습 욕구를 하나의 체계화된 흐름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도권 대학의 '교수 중심' 체제도 거부했다. 심광현 교수는 "교수들의 독재를 지양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생겼을 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살 청년부터 50대 중년까지 한 강의실에서 수강을 했는데, 학생들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을 봤다"며 "진정한 교육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 학생과 학생들 사이에 토론하고 함께 연구할 때 이뤄진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노나메기 대안대학에서는 수강한 학생들은 스스로 강의 계획을 짜서 심사를 통과하면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개설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대학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자치 활동을 위해 CM(Commune Manager) 제도도 둔다.
▲ 범주별 강좌 유형 예시. |
비정규직 교수들을 위하여: 수강료 1만 원, 강사료 15만 원
노나메기 대안대학은 "누구나 양질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수강료를 1강당 1만 원으로 책정할 계획이다. 6강 짜리 강의 하나를 수강하면 6만 원이다.
다만 강사료는 시간당 15만 원으로 책정했다. 이명원 교수는 "일반 대학의 강사료(7만 원)의 2배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식생산자 조합원을 위해 안정적인 연구와 새로운 강의 개발이 가능하도록 점진적으로 강사료를 30만 원으로 조정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강의 기회와 소득을 제공하고자 한다"며 "이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해 대학 교육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이한 점은 노나메기 대안대학이 교수들의 생산자 협동조합이 아닌 수강생이라는 소비자 조합원이 결합된 다중이해자 협동조합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일반 수강생들의 경우 3만 원 이상 출자금에 월 1만 원 이상의 조합비를 내면 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교수들만의 협동조합이 아닌, 교수와 학생(수강생) 등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해 대안대학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다.
노나메기 대안대학은 올 11월 무료 시범강의를 개설하고, 2013년 1월 정식 강의를 개설을 목표로 세우고 있다. 정식 강의가 개설되면 1년 4학기제로 운영이 된다. 커리큘럼과 학제 등은 창립 총회 이후 시범강의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다.
설립추진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이광일 한신대 교수(정치학)는 "교육은 이래야 되지 않겠느냐는 공명을 일으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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