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명확한 국정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국가 발전 전략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기시 노부스케가 활약한 만주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박정희는 빠른 경제성장을 최우선 순위의 국정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발전국가 모델을 채택했다. 세계 시장과 적극적 결합, 내포적 공업화 정책의 기각, 관치 금융, 국가-재벌 주도의 경제성장, 중화학 공업화, 노동과 농업 부문에 대한 배제, 불균형 성장 전략 등을 내용으로 하는 발전국가 모델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지만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 이후 스스로 종신 대통령, 어쩌면 황제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정희 왕국'이 공작 정치와 폭압과 공포만으로 지탱됐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력한 폭압 체제라도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존재와 물적 토대의 확대재생산 없이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왕국'도 그러했다. '박정희 왕국'이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경제성장 제일주의 같은 지배 담론과 완전고용 달성 같은 물적 토대 없이 물리적 폭압에만 의존해 18년 동안 지속하지는 않았다.
박정희의 생물학적·정치적 계승자라 할 박근혜는 박정희처럼 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어려워 보인다. 최근 행보를 보면 박근혜는 '공포'와 '권위'만으로 대한민국을 다스릴 작정을 한 것처럼 보인다. 국정원을 다른 헌법 기관과 국가 기관 위에 두고 국정원을 통해 정치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공포'의 상징이라면,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야당의 합리적인 요구를 단박에 거부하는 오만불손은 권위적 태도의 극단을 대변한다. 대통령이 지닌 막강한 법적·물리적·상징적 권력에다 메인스트림의 전폭적 지지, 과점 언론들의 상징 조작, 콘크리트 지지층의 존재 등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박근혜의 시도는 현재까지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앞으로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지 않고, 각 부문 간 양극화가 더 심화하며, 실소득이 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들의 삶이 임계점에 도달하며, 주거난이 극심해지고, 복지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박근혜가 지금처럼 '공포'와 '권위'만으로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가두거나 고문할 수도 없다. 결국 박근혜의 정치적 활로는 아버지 박정희처럼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개선하는 것뿐이다. 그러자면 재벌 개혁을 포함한 경제 민주화 의제들을 전면적이고도 비타협적으로 관철해나가야 한다.
일종의 수동혁명 혹은 보수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알량한 성취에 도취한 박근혜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긴 지금 이대로도 대한민국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박근혜가 무엇 때문에 메인스트림과 힘겹게 싸워가면서 경제 개혁을 관철하겠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박근혜의 몰락이 시작될 것이다. 결국 지금 박근혜가 거두고 있는 쥐꼬리만 한 정치적 성공은 머지않은 장래에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재난을 초래하는 독약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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