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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뒤집고 "사학 보호" 판사가 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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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이 뒤집고 "사학 보호" 판사가 쐐기?

[인터뷰]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장과 함께 되짚어본 허원근 사건

1984년 4월 2일, 전방 부대에서 한 병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몸엔 3발의 총상(머리 1발, 양쪽 가슴 각각 1발)이 있었다. 이름 허원근. 입대한 지 7개월도 되지 않았고, 사건 다음 날 휴가가 예정돼 있었다. 유서는 없었다. 괴팍한 중대장의 가혹 행위에 힘들어하긴 했지만, 성실하게 군 복무에 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허 일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29년. 허 일병의 사망 경위는 여전히 논란이다. 군 당국은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유족은 이를 믿지 않는다. 국가 기관의 판단도 엇갈렸다. 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2년, 허 일병은 살해됐으며 군 당국이 진실을 조작했다고 발표했다. 그간 거듭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국방부는 거세게 반발했다. 특별진상조사단(특조단)을 꾸려 재조사했고, 역시 자살이라는 결론을 발표했다. 2004년, 제2기 의문사위는 재조사 결과 타살이 맞다고 다시 반박했다. 법원도 각기 다르게 판결했다. 2010년 서울중앙지법(1심)은 타살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올해 8월 22일 서울고법(2심)은 자살이라고 뒤집었다.

<프레시안>은 안병욱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82쪽에 이르는 2심 판결문을 검토하고, 허원근 사건의 의미를 짚어봤다. 안 전 위원장은 과거사 진실 규명 전문가로서 제1기 의문사위 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진실화해위원장 시절, 과거사 정리 작업 중 겪은 가장 안타까운 사안으로 허원근 사건을 꼽기도 했다.

다음은 안 전 위원장과 나눈 일문일답의 주요 내용이다.


▲ 허원근 일병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사진은 2002년 9월 3일, 허 일병 의문사 현장 재현 조사 장면. ⓒ연합뉴스

의문의 죽음…자살인가 타살인가

프레시안 : 2심 판결, 어떻게 평가하나.

안병욱 : '죽은 모습을 볼 때 자살로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 '총 3방을 쏴서 자살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게 판결의 핵심으로 보인다. 어떻게 자살했는지를 명확히 증명해야 하는데 '세 발로 자살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식으로 판결한 건 상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형사법에선 심증 이전에 명확한 증거를 갖고 판결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 원칙에도 안 맞는 것 같다.

재판장의 전력도 눈에 들어온다. 강민구 판사는 사학분쟁조정위원을 할 때 기득권 세력의 보루인 사학 법인을 지켜준 공로자로 꼽힌다. 여러 의문을 덮으면서 무리하게 수구 사학 세력을 보호해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강 판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제2기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 시기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 세종대, 동덕여대 등에 과거의 비리 재단 쪽 인사들이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이로 인해 사학 분쟁을 '조정'하는 게 아니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강 판사가 사학 비리로 물러났던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 측과 유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관해서는 <"사분위는 무얼 감추고 싶었을까"> 참조. <편집자>)

이 사건에 주목하는 건 기득권 세력의 의식 구조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게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지려 할 때, <조선일보>가 넘어지는 고목나무 같은 과거의 허위를 어떻게 받쳐 세우는가 하는 게 상징적으로 들어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1심 판결은 비록 누가 범인인가를 밝히진 않았지만 허원근이 살해됐다는 걸 밝혔다. 기득권 세력이 유지해온 허위를 점차 밝혀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범인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타살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사법부로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1심 재판부는) 과도적 의무로서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걸 강 판사가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프레시안 : 이 사건과 관련해 그간 수많은 의문이 제기됐다. 이 중 일반 상식선에서는 두 가지 핵심 의문이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소총으로 세 발(머리와 양쪽 가슴) 쏴서 자살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다른 하나는 '타살임을 증언한 부대원도 있지만 대다수 부대원은 이를 부인하는데 이들이 지금까지 거짓말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타살을 증언한 부대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후자에 방점을 찍었다.

안병욱 : 허원근 사건이 일어난 게 1984년이다. 유신 시대부터 5공 때까지 어떤 사회였나. 무지막지한 탄압으로 사람들이 숨을 쉴 수 없는 사회였다. 더욱이 군대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힘이 정의이자 진실인 곳 아닌가. 유독 한국 군대에 그런 측면이 더 있었고, 그때가 유독 심했던 시기다. 여러 군 의문사를 살펴보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부대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현장 목격자들, 힘없는 병사들의 입을 닫고 거짓 진술을 시키는 것이다. 물증 조작은 쉽지 않다. 또 한국에선 양심에 따라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 오랫동안 봉쇄됐다. 독재 정권 치하에선 너무나 심했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허원근 사건이 일어나던 무렵의 군대였다.

목격자들이 왜 공소시효도 지난 지금까지 거짓말하는가 하는 건 그 부분을 평생 업으로 다뤄온 판사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걸 거꾸로 내세워,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라 추론의 추론으로, (즉)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관된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내세운 것이다. 재판부가 얼마나 궁색했으면 추론의 추론을 내세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당시 군대의 억압적인 구조, 조작 정황 등을 감안하면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관련 인사들의 진술이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재판부가 그런 구조와 정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진술 변화'만을 강조하며 의혹을 덮고 있는 것 같다. 타살 의혹에 관한 숱한 의문을, 사건 발생 후 군 수사 기관의 조사가 매우 부실했던 탓으로만 돌리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건에서 가장 비극적인 건 두 가지다. 하나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성실한 청년이 군대 내 폭력 구조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과 똑같이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사건을 목격하고도 사실을 얘기하지 못하고 29년간 거짓 진술을 반복하며 악몽에 시달렸을 10명의 젊은이(의 존재)다. 살아 있는 사실 자체가 그분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그것이 이 사건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의문사위, 국방부, 그리고 <조선일보>

▲ 2002년 11월 28일,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정수성 당시 특조단장. ⓒ연합뉴스
프레시안 :
2002년 1기 의문사위 발표(허 일병은 살해됐다는 내용)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국방부는 특조단(단장 정수성 당시 육군 중장, 현 새누리당 의원)을 꾸려 재조사한 후 '의문사위 발표는 허위'라고 반박했다. <조선일보>도 의문사위 발표를 정면으로 공박하는 보도를 여러 차례 내보냈다.

안병욱 : 몇 사람이 짜고 입을 맞춰 거짓 증언을 하다가도, 설득과 간접 증거 제시 등의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람이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 모의가 깨지는 게 상식이다. 2002년 1차 의문사위 중간발표가 그것이다. 설득하고 앞뒤 안 맞는 부분을 크로스체크하자, 한 사람이 처음으로 속에 있는 걸 털어놨다. (허 일병은 살해됐다는 그 증언은) 우리가 들어봤을 때, 상상에 의한 거짓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그 증언으로 모든 의문이 안개 걷히듯 풀렸다. 그걸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또 이야기했고, (그 결과) 또 한 사람이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전화로 약속했다. 현장 검증 자리에 와서 설명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압력이 가해진 거다. 진술하기로 했던 사람이 뒤집었다. '못하겠다. (증언하면) 신변을 보호해준다고 했는데, 협박조의 전화를 받았다. 그런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털어놓느냐'고 했다. 진실을 털어놓으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 있었던 거다.

내가 특히 문제 삼는 건 <조선일보> 보도다. 허위 진술이 깨지던 그때 <조선일보>가 몇 개 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진실이 드러나려는 순간 분위기를 뒤집었다. 진실을 털어놓도록 사회에서 권유한 것이 아니라 침묵을 강요한 셈이고, 그것이 (사건 당시) 병사들에게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털어놓기로 했다가 뒤집는 일이 생긴 거다. (<조선일보>는 의문사위 발표 직후, 당시 부대원들이 '조직적 은폐 및 조작은 없었다'고 주장했다는 등 의문사위 발표를 부인하는 보도를 거듭 내보냈다.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도 "사회부 기자들은 집단 자살하기로 결의했는가", "고참 기자들도 동반 자살" 등의 강도 높은 표현을 사용하며, 의문사위 발표를 비중 있게 보도한 다수의 언론을 공격했다. 아울러 "조직의 명예를 自力(자력)으로 수호하지 못하는 조직은 무너집니다"라며 군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월간조선> 10월호 '죽은 記者(기자)의 사회'] <편집자>)

또 법에 결정적 증언을 한 사람에게 포상금을 주도록 돼 있었는데, 이걸 두고 돈으로 매수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전형적인 왜곡이다. 부대원 9명을 인터뷰했다는데, 그 인터뷰 자체가 (진실) 증언을 막는 역할을 했다. '부대원 중 A가 이런 식으로(허원근 일병은 살해됐다고 <편집자>) 증언을 바꿨는데 그게 맞냐,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다짜고짜 물으면, 그간 같은 이야기를 해온 사람들 중 어느 누가 '그래 맞다'고 하겠는가. 양심고백을 하기 전이고, 더욱이 공포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충돌하는 조사 결과, 평행선을 달리는 주장들

프레시안 : 논란이 커진 데는,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물증이 많이 사라지고 증언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안병욱 : 사법부 판결을 위한 증거와 과거사 정리 및 진실 규명에 필요한 판단 자료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심증이 있어도 증거가 없으면 형사 사건 사법부는 처벌을 못 한다. 대표적인 예가 O. J. 심슨 부인 살해 사건이다. 형사 사건에선 O. J. 심슨에 관한 명확한 증거를 검찰이 대지 못해 무죄를 받았지만, 민사 소송에선 살해당한 부인 측에 거액의 배상금을 넘겨주게 하지 않았나.

과거사 정리 및 진실 규명은 누구도 다른 얘기를 할 수 없는 증거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오래된 얘기이고, 중요한 물적 증거들이 사라졌고, (적잖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올바른 증언을 하지 않고, 조사 권한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진실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정황 증거를 엮어 여러 사람이 배심원 같은 역할을 통해 판단한다. 그 경우 허원근 사건이 진실 규명에서 과거사 정리의 원칙이 적용돼야 되는 중요한 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방부 발표대로 '허원근은 자살했다'는 명제를 전제로 사건 발생, 여러 증언, 그 이후의 일들을 보면, 모순되고 자연스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허원근은 자살했다'는 얘기가 설명이 안 된다. 그런데 타살을 증언한 부대원의 증언 등을 기초로 ('허원근은 살해됐다'는) 사정을 설명하면, 국방부 발표를 빼놓고는 나머지 모든 부분이 아귀가 맞게 설명된다.

타살을 증언한 부대원 이야기만이 아니라 (타살 정황 증거로 볼 수 있는) 몇 가지 얘기가 더 있다. 새벽에 대대장 운전병이 (현장에 1호차를) 운전해 갔다는 얘기부터 (물이 귀해 평상시 잘 하지 않던) 물청소를 했다는 것, 중대장이 평소에 하지 않던 철책 시찰을 갔다는 얘기(매일 순찰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중대장은 GOP 내 경계 근무를 시작한 후 사건 발생일 전까지 한 번도 순찰한 적이 없었다. <편집자>), 총에 맞은 자리는 세 곳인데 총소리는 두 번밖에 나지 않았다는 얘기, 탄피가 세 개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엔) 두 개밖에 없었다는 얘기(사건 당시 헌병대 수사 기록 및 현장 약도에는 탄피가 2개만 발견된 것으로 기재돼 있고, 탄피를 찾았던 헌병 및 부대원들도 2개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헌병대 조사 보고서에는 '총상은 3곳인데 탄피는 2개'인 점이 의문점이라는 내용과 함께, 재조사 결과 나머지 탄피 1개를 현장 부근에서 정밀 수색으로 발견했다고 기재돼 있다. 그러나 그 발견 장소 및 경위는 기록돼 있지 않다. <편집자>) 등이 그것이다. 타살을 증언한 부대원 혼자만의 얘기가 아니고 단편적인 여러 장치의 설명들인데, 그것들을 하나하나 뒤집은 것이 국방부 조사였다. (부대원들이) 그런 얘기를 했다가 (국방부 특조단 조사를 거치며) 철회한 것이다.

물청소 등 그 모든 증언을, 타살임을 밝힌 부대원 A가 의문사위와 짜고 (여러 사람에게) 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2심 판사는 가정의 가정의 가정, 추론의 추론의 추론을 통해 '자살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그게 과연 진실에 가깝겠는가? 아니면 (타살을 가리키는 증언과 정황들을 통해) 모든 것이 확연하게 설명되는 게 진실에 가깝겠는가?

프레시안 : 2002년 당시 조갑제 씨 등은 "전문 수사 능력도 없는 의문사위"라며 의문사위를 비판했다. 이와 반대로, 의문사위에 없는 건 수사 능력이 아니라 강력한 조사권이라는 반론도 많았다.

안병욱 : 명확한 증거를 못 찾아낸 데는 조사권이 강력하지 않았던 것이 영향을 줬겠지만, 허원근 사건의 경우 현재까지 조사된 것만으로도 진실을 확정하는 데 미흡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조사권이 있었더라도, 국방부가 자료를 모두 제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4년 국방부 특조단 출신 군 수사관과 제2기 의문사위 조사관들 사이에 벌어진 가스총 발사 등의 해프닝을 보더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1984년 당시 조사가 이뤄졌다. 터무니없는 발표였기에 유족이 탄원을 했고 그 결과 군에서 다섯 차례의 조사가 이뤄졌다. 매번 결론이 똑같았다. 그다음에 의문사위에서 2번 조사했고, 그 사이에 국방부 특조단에서 조사했다. 그 후 두 번의 판결이 있었다. 10번에 걸친 조사가 이뤄졌지만, 진실이 아니라 처음에 만들어진 조작된 조사 결과를 굳혀가고 있다.

처음으로 공정한 조사를 할 수 있었던 게 의문사위였다. 조사 대상자들이 특별한 심리적 압박 구조 속에서 16년간 지냈기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게 하기까지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다. 미약한 조사권으로 겨우겨우 진실에 접근했다. 핵심 자료를 제공한 사람에 대한 포상 역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참으로 아쉬운 건, 2002년에 <조선일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허원근 사건의 진실은 아마 그때 규명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프레시안 : 의문사위가 차분하게, 끝까지 조사할 수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란 뜻인가.

안병욱 : 진실 규명에 언론이 협조했다면 그랬을 거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뒤집히면서 목격자들은 진실을 털어놓을 기회를 영원히 놓친 셈이다.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건 전문가들의 문제다. 전문가들의 지식이 진실을 왜곡하는 무기로 활용됐다. (예컨대) 강기훈 사건 때 필적 감정 문제, (전두환 정권 때) 평화의 댐이나 (이명박 정권 때) 4대강 사업에 대해 토목 기술자들이 이야기한 것들을 보면, 전문 지식을 무기로 사회를 농락하지 않았나. 이 사건의 경우 그렇게 자살할 수 있다고 하는 (일부) 법의학자의 말이 전문가 견해로 제시되면서 왜곡의 단초를 제공했다. 장준하 사건, 최종길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의문사에서 검안 기록이 사건을 헷갈리게 하는 단초가 되는데,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한 젊은이의 죽음과 조직의 명예

프레시안 : 의문사위 발표 내용 중 '첫 총상과 그다음 총상 사이에 약 7시간의 시차가 난다'는 대목은 적잖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1심 재판부는 총상 간의 상당한 시차를 인정했지만, 국방부 특조단과 2심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신 이동 여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판단이 엇갈렸다.

안병욱 : 국방부 이야기는 고인이 아침에 중대장한테 야단을 맞고 오전 10시경 자살하려고 쐈는데, 안 죽으니까 또 쏘고 또 쏘고 해서 세 발을 연속으로 쐈다는 거다. (그런데) 초소 사람들은 두 발밖에 못 들었다고 말한다. 국방부 말대로 세 발을 쏴서 자살했다면 총소리가 세 번 나고 탄피가 세 개 있어야 한다. 그런데 두 발 소리밖에 못 들었다는 것 아닌가. 탄피도 (처음에 헌병대에서 조사했을 때는) 두 개밖에 없었다. 왜 탄피가 두 개밖에 없냐고 하니까 뒤늦게 탄피를 조작한 것 아니겠나.

7시간 시차 부분은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오전 10시에 옮겨 총으로 쏴 죽이라고 얘기했다는 거다. 그게 어디서 나왔냐 하면, 검안의가 (의문사위 조사 때) 처음 총을 맞은 자리와 두 번째 맞은 자리의 총상 색깔이 다르다(고 한 것이다). 살아 있을 때와 죽은 상태일 때 총상 색깔, 피 응고 정도 등에 차이가 있는데 그게 사진으로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검안 기록을 전제로 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 검안도 사건 발생 이틀 후 이뤄진 것이었다.

당시 난 의문사위에서 소수 의견을 냈다. '술 마시고 싸우다가 총을 쐈고, 그때 (허원근이) 그 방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내무반에서 너무나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고, 그 후 은폐 작업에 주력하다 시차를 두고 추가로 쐈을 것이란 말이다. 총을 맞고 살아 있었다면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그 순간 살리기 위해 헬기를 부른달지 의무병을 부른달지 해야 하는데, 어느 정황에도 그게 없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했던 거다.

프레시안 : 의문사위가 이 사건의 가해자로 특정 인물을 지목했던 것이 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1심 판결처럼,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리더라도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는 방법은 없었나.

안병욱 : 불가능하다. 목격자가 없었다면 '평소에 감정이 나빴던 누군가가 죽였을 것 같다' 같은 방식으로 했겠지만, 이 사건은 목격자가 12명이다. 타살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 안에 (쏜 사람이) 있다(고 봐야 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면, 사건 자체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 된다. '모든 사람이 명확하게 증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사람을 범인으로 확정하는 건 형사법 원칙에 비추어봤을 때 곤란하지 않느냐'는 건 얘기가 되지만, 우리는 처벌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진실 규명을 이야기한 것이다.

프레시안 : 의문사위 조사와 관련해 당시 국방부는 '필사적'이란 말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안병욱 : 1984년 조사 후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2000년까지 왔다면, 국방부가 그렇게까지 이 사건에 달려들진 않았을 것 같다. 여러 번 조사해 똑같은 결론을 냈는데 의문사위 조사 결과를 인정하면, 그 시기에 군대와 관련됐던 사람들은 반인륜적 집단으로 매도당한다고 본 거다. 군의 명예가 걸렸다고 본 것도 그 때문이다.

조직 논리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정원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이나, 검찰이 사력을 다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에서 뒤집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진짜 신뢰는 잘못을 털어놓고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데서 나오고, 그 신뢰에 의해 명예가 생기는 것이다.

역사학자 안병욱의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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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고'에 자식 시신 보관하는 부모들

프레시안 : 군 의문사는 허원근 사건만이 아니다. 군에서 생명을 잃은 자식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 시신을 '냉동고'(병원 영안실)에 보관하고 있는 부모들도 여전히 적잖다.

안병욱 : 자식 잃은 부모 심정은 어떤 이성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멀쩡한 자식이 군에 가야 된다고 해서 갔다가 죽었을 때, 백이면 백 자살했다고 해도 부모는 믿을 수 없다. 군대 발표 가운데 실수가 있거나 뭔가를 은폐하기 위해 말을 꾸민 게 드러났을 때, 혹은 부모나 가족들한테 그렇게 느껴졌을 때는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 그게 군 의문사의 특징이다.

권위주의 정권 때는 군대에서 사고가 많이 났다. 사망 사건이 일어나면 지휘관이 문책을 당하고 진급에 지장이 생겨 군대 내 생명이 끝난다. 그게 군 조직이다. 그래서 사건이 나면 상급자들은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게 우선이다. 그 때문에 자살도 자살이고 타살도 자살이 된 거다.

군 의문사 중엔 의문사위에서 진실을 밝혀 자살이 사고사로 뒤집힌 경우, 신뢰할 수 있는 조사를 통해 자살로 밝혀지자 유족이 의혹을 접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사건들이 있어 노무현 정부 시절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따로 만들었다. 거기서 진상이 드러난 것도 있고, (진상 규명) 불능으로 남은 것도 있다.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했다. 유족이 문제를 제기하고 '내 자식 죽인 군대가 책임져라'라고 하면서 '냉동고'에 넣어놓은 것도 군 선진화에 영향을 줬다. 의문사 사건들이 군대에 중요한 교훈을 준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알기론 현재 군대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맨 먼저 하는 게 유가족을 불러 그들이 보는 상태에서 수습해 의혹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정리 발언 부탁한다.

안병욱 : 독재 정권 시절 사법부는 기득권의 편을 든 경우가 많았다. 현재도 삼성에 대한 판결 같은 걸 보면 그런 의혹을 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번 판결을 보면서 그런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허원근 사건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했을 때 내 결론은 강 판사와 다르다. 비리 사학 재단에 관해 강 판사가 판단했던 것 등을 비춰 봐도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다. 대법원이 진실을 규명하길 바랄 뿐이다.

내부 고발이 적고 양심에 따라 진실을 증언하는 문화가 굉장히 미약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목격자가 없거나 인간으로서는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사건도 있지만, 허원근 사건 등은 현장 목격자가 살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증언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이 우리 사회에 있다. 허원근 사건은 그 모든 게 상징적으로 집약돼 얽혀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힘으로 (상황을) 뒤집어엎는 일이 일어나는 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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