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꼬리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젊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꼬리칸 사람들이 앞쪽 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다. 전진은 쉽지 않다. 무수한 희생을 낳는다. 앞쪽 칸을 사수하는 군인들과 충돌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간다. 물리적으로 팔다리가 잘리는 고통까지 따른다.
순전히 비유적으로 말해, 지금의 프로야구는 설국열차와 비슷하다. 단일리그에 한정된 팀이 한정된 수의 자원을 갖고 같은 궤도(1년 128경기)를 계속해서 빙글빙글 도는 폐쇄적인 체계. 고도로 발달한 이 시스템 안에서는 좀처럼 혁명이나 전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허술했던 초창기 프로야구처럼 1할 타자에서 단숨에 3할 타자로 올라서는 '갑툭튀' 스타나, 전년도 꼴찌에서 이듬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도깨비 팀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는 꼬리칸에 속한 평범한 선수나 약체팀이 앞쪽 칸으로 진출하려면 상상 이상의 의지와 인내가 요구된다. 2할 타자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단박에 3할 타자가 되지 못한다. 시즌 초반 잠시 3할을 칠 수는 있어도, 금방 전력분석이라는 군인들과 128경기 장기레이스의 압박에 원래 있던 칸으로 쫓겨간다. 팀 순위표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최근 6년 사이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는 매번 삼성, SK, 두산처럼 올라갈 팀만 올라갔다. 몇몇 팀이 끈덕지게 순위표의 전복을 꾀하기는 했지만, 시즌이 끝나보면 결국 순위표는 원래 순서 그대로였다. 시스템의 저항이 생각보다도 훨씬 강력한 탓이다.
프로야구의 '앞쪽 칸'으로 가기 위한 과정은 험난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넥센의 홈런왕 박병호가 대표적이다. 박병호가 프로에 입단해서 홈런왕이 되기까지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유니폼만 입으면 바로 앞쪽 칸으로 직행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할 타자였던 시절이 있었고, 2군에서 보낸 시간도 길었다. 그 사이 군대도 다녀왔다. 트레이드를 거쳐 2011년 넥센에서 타율 .254에 13홈런으로 처음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2012년 비로소 31홈런을 터뜨리며 스타로 올라섰다. 2009년의 신데렐라였던 KIA 김상현, 올해 NC에서 주전으로 자리잡은 모창민과 조영훈, 김종호 등도 하나같이 오랜 시간을 앞쪽 칸을 향해 돌진하고 밀려나기를 되풀이한 선수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돌진을 거듭했고, 그 결과 벽처럼 보이는 문을 열고 주목받는 자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야구팀 역시 마찬가지. 올 시즌 현재 한국시리즈 직행까지 노릴 기세로 질주 중인 LG는 지난해까지 10년 연속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 사이 수없이 많은 감독을 바꾸고, 선수를 영입하고, 구단 수뇌부를 물갈이하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빙하가 녹을만한 시간을 보냈다. 그 중 몇 해는 아슬아슬하게 4강에 들 뻔한 시즌도 있었지만, 그토록 원하는 4강 진출은 될 듯 말 듯 하다가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해만 해도 '그 사건' 이전까지 LG는 유력한 4강 팀이었다. 4강으로 가는 '문'은 하도 오랫동안 닫혀 있어서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 앞쪽 칸으로 올라서고 있는 LG트윈스. ⓒ연합뉴스 |
올해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암흑기 기간 동안 미래를 생각해 기울인 노력과 투자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례로 현 10개 팀 중 LG만큼 스카우트 팀에 많은 물적, 인적 투자를 하는 팀도 없다. 처음에는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드래프트에서 뽑은 젊은 선수들이 하나둘씩 1군에 올라와 주전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올해 맹활약 중인 정의윤, 문선재, 오지환, 우규민, 신정락 등이 모두 LG 자체 생산 선수들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같이 입단하자마자 바로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꾸준한 기회가 주어지자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선수들로 성장했다. 그 결과 벽처럼 보이던 문이 열렸다. 올해 LG는 4강 수준을 넘어 그보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삼성이나 두산도 원래부터 '앞의 칸'에 속했던 건 아니다. 한 삼성 라이온즈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구단 운영 시스템을 갖추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고 밝혔다. 198-90년대 내내 우승 조급증에 수시로 감독을 갈아치우고, FA 먹튀를 영입하고, 세대교체 실패로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현재의 삼성은 프로야구에서 가장 선수 발굴과 육성, 관리에 뛰어난 구단으로 꼽힌다. 대형 FA 영입 없이 자체 생산한 선수들을 데리고 매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고 있다. 두산 역시 지금의 '화수분 야구'가 자리 잡기 전까지는 단골 중하위권 팀에 속했다. 프로야구에서 가장 먼저 2군에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눈에 띄는 수확을 거두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이후부터다.
혁명은 결코 하루아침에,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럽고 때론 굴욕적인, 거듭되는 도전과 실패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자리바꿈이 가능했다. 올 시즌 LG 트윈스와 (어쩌면) 넥센의 반란은 그런 노력과 인내의 결과이고,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꼬리칸'의 한화 이글스는 언제? ⓒ연합뉴스 |
하지만 뒤늦은 투자와 노력이 겨우 1, 2년 만에 성과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어두기를. 그 정도 투자는 이미 다른 구단들도 다 하고 있다. 지난해 그랬듯이 FA 한 두 명 영입해서 바로 4강에 들어갈 거란 기대도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 요즘 프로야구는 꼴찌팀이 일년만에 4강에 들 만큼 만만하지 않다. 냉정하게 보면 한화 전력은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계속 하위권이다. 당장의 성적 욕심에 무리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면, 앞쪽 칸까지 가는데 드는 시간은 길어지고 희생만 커진다. 5, 6년이면 끝났을 LG의 암흑기가 11년까지 늘어난 것도 그래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송강호는 "저게 하도 오래 닫혀있으니깐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라고 했다. 계속해서 부딪히고 도전하면 언젠가는 문은 열린다. 지금 한화에게는 그 고난의 과정을 버텨낼 수 있는 굳은 의지와 인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신생팀으로 가세한 NC, KT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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