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매우 논쟁적인 영화다. <설국열차>가 매우 재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이 영화의 논쟁성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안에 수 없이 많은 논쟁거리를 심어 놓았다. <설국열차> 안에는 생태주의, 멜더스의 인구론, 마르크스의 계급론, 식인(食人)풍습에서 육식을 거쳐 농경을 관통해 기계문명으로 진화해 온 인류의 역사, 파시즘과 사회적 다위니즘, 체제를 유지하는 담론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생성과 작동방식 등이 담겨 있다. 또한 <설국열차> 안에는 억압과 저항, 숭고와 비겁, 희생과 이기, 기만과 진실 같은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가득하다.
<설국열차>를 기계복제장치로서의 영화로 분석하는 틀 이외에도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생태적, 문명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열린 텍스트인 셈이다. 수다한 해석과 다양한 논쟁이 가능한 개방된 텍스트로서의 <설국열차>.
내게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시스템의 '안'과 '밖'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영화였다. 설사 설국열차 안에서 일어난 봉기 혹은 반란이 성공했다 해도 열차 안의 사람들이 풍요롭고, 평등하며, 자유롭고, 사이좋게 살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혁명의 리더 커티스조차 혁명의 성공 이후의 계획은 부재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건 커티스가 윌포드를 대체했어도, 열차 안에 탑승한 인간들의 욕망의 총합을 한정된 자원과 공간을 지닌 열차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자명하고, 그 때 커티스도 윌포드가 사용한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커티스가 윌포드에 비해 완화되고 유연하게 사용할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포'와 '억압'과 '불평등'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다.
남궁민수의 솔루션은 성공할 수 있을까? 기차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가? 그러나 인류에게 '지구'는 설국열차의 확장에 불과한 것 아닌가? 두번째 아담과 하와가 첫번째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열차로 표상되는 시스템의 '안'과 '밖'이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안'에 비해 '밖'에 한 줌의 희망이, 한 움큼의 가능성이 더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너무 암울할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백곰은 열차 밖에 존재하는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더 중요한 것은 시스템 '안'이건 '밖'이건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이다. 절망과 모욕으로 점철돼 있고, 더 큰 실패가 예정돼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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