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돌출 사태가 터졌다. 지난 9개월간 지리하게 이어졌던 'NLL 포기 공방'의 진실을 밝힐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실종'이 최종 확인됐다. 여야는 22일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서 대화록 원본을 찾는 재검색을 최종적으로 진행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나흘 간의 작업이 무위로 끝난 셈이다.
정국은 이제 'NLL 공방'에서 초유의 '사초(史草) 증발 사태'로 옮겨간 모양새다. 여야 간 치열한 공방 역시 2라운드에 접어 들었다. 이 와중에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태란 '본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여야의 대화록 검색이 성과없이 종료되면서, NLL을 둘러싼 진실 게임은 이제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도 남는다.
▲ "까보니 없었다". 정치권의 'NLL 포기' 공방이 이제는 초유의 '사초 증발 사태'로 번지는 형국이다. 여야는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 국가기록원에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추가 검색을 실시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이에 따라 국회 운영위원회는 22일 국가기록원에 대화록 원본이 없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더 큰 논란은 '이제부터'다. ⓒ연합뉴스 |
의문 1. NLL 대화록, 누군가 '훼손'했다?
민주당과 노무현 정부 인사들은 '대화록 실종'이라는 예기치 않은 국면을 맞게 되자, 누군가 대통령기록관에 보관된 대화록을 폐기하거나 훼손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참여정부 문서관리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의 '봉인 해제' 의혹이다.
민주당 홍영표 의원은 전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3월26일 노무현재단 사료팀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인 기록을 제공받기 위해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했을 당시 지정서고에 보관돼 있던 봉하 이지원 시스템의 봉인이 해제돼 있었다"며 "시스템에 접속한 흔적도 두 차례 있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인해 기록관에 보관됐던 '이지원' 사본의 봉인이 이명박 정부 하에서 무단으로 뜯기고, 2010년 3월과 2011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무단 접속 역시 이뤄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중 첫 번째 '무단 접속' 시점이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행정관이 대통령기록관장으로 임명된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의혹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0년 3월 야당과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선진 당시 청와대 메시지기획관리실 행정관을 2대 관장으로 선임했다. 참여정부가 임명했던 임상경 초대 관장은 법으로 정해진 5년의 임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이명박 정부에 의해 면직됐다. '사초'를 관리하는 대통령기록관장에 사실상 대통령의 '측근'을 임명한 셈이라, 정치적 중립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22일 '봉인 해제' 의혹에 대해 "지난 2009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수사 필요에 의해 증거물이 돼 사무실을 통제하기 위해 봉인한 것 뿐"이라며 "검찰 수사 종료 후 봉인을 없앴다"고 해명했다. "수사할 때 봉인을 뜯고 들어갔고, 수사가 끝나면서 봉인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퇴임하면서 회고록 집필 등을 이유로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한 '이지원'과 동일한 내용의 사본을 또 하나 만들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갔으며, 이후 같은 해 10월 이 사본을 검찰의 입회 하에 대통령기록관에서 봉인, 이 역시 기록관에 이관했다.
민주당은 '봉인 해제' 등을 근거로 누군가 고의로 대화록을 폐기했거나 훼손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상적으로 이관된 회의록을 이명박 정부가 훼손·폐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사초 실종 국면에서 수세에 몰린 처지를 타개하기 위한 반박성 입장에 가깝다. 이명박 정부가 훼손했다는 직접적인 증거 또한 제시하지 못했다.
의문 2. 여권, 대화록 '실종' 사전 인지했나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대화록 실종'을 사전에 인지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기록물의 유뮤조차도 발설할 수 없도록 한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이자, 여권이 'NLL 정국'을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해온 정황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서 범여권 차원의 '사전 기획설'로도 번질 수 있다.
정황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단 여권 핵심 관계자들의 발언이 미묘하다. 'NLL 파동'의 주역이었던 남재준 국정원장은 지난달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국정원이 보유한 대화록 사본이 '원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대통령기록관의 회의록 보유 여부는 모르겠다"고도 했다. 비슷한 시기 국정원 역시 여러 차례 자신들이 공개한 대화록이 "유일무이한 진본"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국정원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하고, 이에 야당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원본' 열람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기록원에 1부, 국정원에 1부 보관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시기, 이런 발언이 나온 셈이다. 이미 국정원이 국가기록원에 대화록 원본이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보수성향의 일간지 <문화일보>가 대선을 앞둔 지난해 10월17일, 여권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국가기록원에 대화록 원본이 이관되지 않았다고 보도한 것도 여권의 '사전 인지설'을 뒷받침한다.
당시 이 신문은 익명의 여권 고위 관계자가 "2007년 당시 회담록은 국정원 원본과 청와대 사본 등으로 두 군데에서 동시 보관해 오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말인 2007년 말~2008년 초 폐기를 지시했고, 이 지시에 따라 청와대 보관용은 파쇄돼 폐기됐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이에 따라 대통령기록관으로 옮겨져 보관돼 있어야 할 회담록 사본은 없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노 전 대통령 측은 이 주장을 전면 부인했지만, 이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기록원에 대화록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새누리당과 이명박 정부가 인지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더욱이 당시는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의혹을 제기하고, 박근혜 캠프의 핵심 요직을 맡았던 김무성 의원이 부산 지역 유세에서 대화록 내용을 '그대로 읊던' 시기였다. 사상 초유의 '대화록 증발' 의혹이 새누리당에 의해 이뤄진 '대화록 유출 의혹'과 맞닿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여권이 '대화록 증발' 사태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정치적 비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의 대화록 '사본'이 공개된 뒤 야당이 적극 반발하자, 기다렸다는듯이 '원본 열람'을 주장하고 재석 의원 전원의 찬성표로 원본 공개를 추진한 것이 새누리당이다. 대화록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이런 일을 벌였다면, 사실상의 '국민 기만'이다.
특히 '대화록 없음'이 확인되자마자 새누리당이 공세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폐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대화록 공개를 둘러싼 여권의 공세가 '사전 인지'를 넘어 '사전 기획' 하에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의문 3. 盧 정부, 대화록 기록원에 안 넘겼나
새누리당은 대화록이 애당초 기록원에 이관되지 않았을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공세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이른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초 폐기' 의혹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인사들, 민주당은 거센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기록물은 2007년 4월 공포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기 전까지 기록원에 이를 통보하고 이관해야만 한다. 그런데 참여정부가 유독 정상회담 대화록만 '폐기'했다면, 이는 현행법을 어긴 '사초 폐기' 행위가 되는 셈이다. 때문에 여권에서는 검찰 수사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먼저 세 가지 의문점이 풀려야 한다. 첫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할 때 참고할 수 있게 하라"며 국정원에 사본을 넘겼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의 주장대로 노 전 대통령이 대화록 공개의 '후폭풍'이 두려워 이를 폐기했다면, 굳이 넘기지 않아도 될 사본을 국정원에 넘긴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의원이 이번 '대화록 원본 공개'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대화록이 참여정부에서 폐기됐다면 비서실장을 지낸 문 의원이 이를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낮을 뿐더러, 이를 알고도 '원본 공개'를 주장해 문 의원이 얻을 정치적 실익도 별로 없다. 국정원의 사본 공개를 거세게 비판하며 참여정부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대통령 기록 관리'의 중요성을 오랜 지론으로 여기며 755만 건의 방대한 기록을 이관했던 노 전 대통령이 과연 정상회담 대화록을 폐기했겠느냐는 '상식 수준의' 의문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7년4월 공포됐고, 이후엔 대통령기록관도 공식 출범했다. 남긴 비밀 기록물 역시 방대해, 비밀등급 최고 단계인 대통령지정기록은 총 34만 건을 남겼고, 비밀기록물은 9700건을 남겼다. 이명박 정부가 지정기록물을 24만 건, 비밀기록물을 0건 남긴 것에 비하면 압도적 수치다.
물론 <문화일보>가 공개한 익명의 '여권 고위 관계자'의 주장대로, 노 전 대통령이 대화록의 폐기를 지시해 국가기록원에 대화록이 이관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국정원의 경우 노 전 대통령의 지시를 어긴 채 '사본'을 남겨두는 '항명'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정원 사본의 생산 시점이 2008년 1월인 점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다음 정권의 '줄대기' 용으로 사본을 남겨두고, 이를 활용했을 가능성이다. 문재인 의원 역시 국정원이 대화록을 공개하자 "대화록이 작성된 시기는 회담 직후 일주일 이내"라며 "공개된 대화록은 2008년 1월에 생산된 것으로 돼 있는데 국정원 누군가가 인수위 또는 MB(이명박)정부에 갖다주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의문 4. 정상회담 대화록, 여전히 '못 찾은' 것?
수 차례에 걸친 검색 작업에도 여전히 대화록을 '못 찾은' 것일 수도 있다. 여야는 뉘앙스가 다르긴 했지만 이날 대통령기록관에 대화록이 없다는 점을 최종 확인했다.
그러나 야권 일각에선 '이지원'을 재구동시켜서라도 대화록을 계속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참여정부가 이관한 외장하드의 용량과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물 관리 시스템인 '팜스(PAMS)'의 용량이 차이가 난다는 점도 미심쩍은 대목이다. 일부 문서가 이관 과정에서 '누락'됐다면, 누군가가 폐기하지 않았더라도 대화록을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장 민주당은 국가기록원의 '부실 관리'를 지적하며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해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대통령기록물과 별개인 빈부격차해소위원회의 일부 기록물이 제목 건에 등록돼 있으나, 첨부물이 '팜스'에 탑재되지 않아서 생긴 차이"라고 해명했다.
다만 여야가 '대화록 실종' 결론을 내린 만큼, 대화록을 '못 찾았다'는 가정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은 나흘에 걸친 추가 검색을 끝으로 대통령기록관에서의 검색 작업을 모두 종료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대화록 유실을 둘러싼 여야 간 거센 책임 공방이 가열될 것으로 보이며, 검찰 수사 등 더 큰 논란이 예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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