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맞이한 정봉주 전 의원은 '군복' 차림이었다. 해병대 전투화에 군복 바지, 미 해군 특수부대 로고가 찍힌 올리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왁스를 발라 세운 머리카락을 빼곤 '여의도 시절' 옷 잘 입고 다니기로 유명한 그가 아니었다. 보수단체 집회에 나온 예비역 해병대 같은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밀빠'(밀리터리 매니아)라도 된 걸까.
▲ 경북 봉화 비나리 마을에 정착해 '봉봉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는 정봉주 전 의원. ⓒ프레시안(김하영) |
"일부러 이렇게 입는 거예요. 이렇게 입고 다녀야 보수적인 어르신들이 좋아하거든.(웃음)"
여기서 정봉주에 대한 오해 하나. '노무현 대통령 마을로 귀농했다면서?'
정 전 의원이 간 곳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사저가 있는 경남 김해의 '봉하 마을'이 아니라, 경북 봉화군 비나리마을이라는 곳이다. '봉하'와 '봉화'의 발음이 비슷하다보니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왜 봉화일까. 그는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다.
"제가 봉화 정 씨예요. 그래서 어렴풋이 봉화에 대한 관심이 있었죠. 그러다가 감옥에 있을 때 도올 선생 덕분에 맹자와 공자를 공부하게 됐는데, 봉화 정 씨의 시조이자 유학의 대가인 정도전 선생을 알게 되면서 정도전 선생이 학문을 했던 봉화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화에 대한 인연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농업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가 귀촌, 즉 하방을 결심했을 때 트위터를 통해 '어디가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복수의 지인들이 봉화, 그 중에서도 '비나리 마을'을 추천해줬다고 한다. 비나리 마을에는 그 이전에 귀촌을 한 주민들이 5가구 정도가 있어 다른 곳보다 정착이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나리 마을에는 귀촌인들을 위한 다세대 주택이 하나 있어 아파트처럼 세를 들어 살며 일종의 '적응기'를 가질 수 있다. 그는 마을 분들에게 수육에 전북 부안에서 공수한 '뽕주'를 대접하며 마을에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정봉주에 대한 오해 둘. '정봉주가 여의도 정계를 은퇴하고 귀농했다?'
정 의원이 농업에 뛰어든 건 맞다. 그렇다고 전업 농부가 된 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졌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후보가 인품이 부족했습니까? 뭐가 부족했습니까. 문재인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이쪽 진영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였습니다. 민주진보 진영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이걸 먼저 극복해야죠. 그래서 농민들 곁에서 직접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진보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맨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 직접 먹고 살면서 농민들과 부대끼면서 삶을 나누다 보면 해법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가 농사를 직접 짓는 건 한계가 있죠. 생초보인 제가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대신에 제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 하려고 합니다. 20만 미권스(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회원들도 있고, 도시 쪽 네트워크도 강합니다. 이걸 활용해서 좋은 농산물을 직거래를 통해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는 모델을 만들어 보렵니다."
그가 만든 도농상생 프로젝트의 모델은 협동조합이다.
"감옥에 있을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미권스 조직을 처음에는 법인으로 만들까 하다가 협동조합은 어떨까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협동조합법을 가져다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농업 농촌에 대한 고민과 맞물리면서 미권스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 보다는 농업 관련 협동조합을 만들고 미권스 회원들을 여기에 참여시키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출소 후 봉화로 귀촌해 만든 것이 '봉봉 협동조합.' '봉'은 프랑스어로 'bon', '좋은'이라는 뜻이다. 오는 6월 29일 설립총회를 앞두고 설립동의자를 모집하고 있다.
"여기가 해발 300미터예요. 고랭지 배추는 살이 단단해서 작년 김장 김치가 아직도 탱탱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의성 마늘, 영양 고추 등 최상급 김치 양념 산지들이 있습니다. 가을에는 김치 담그기 행사도 해서 프리미엄급 김치를 팔아 보려고 합니다. 아직은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아요. 여기 와서 유기농 쌀도 3000만 원 어치를 다 팔아치웠는데 더 팔 물건이 없어요. 지금도 전남 해남 등에서도 협동조합에 생산자로 참여하겠다는 연락이 오지만 현재로서는 봉화군을 중심으로 생산자 조직을 점점 넓혀갈 생각입니다."
그는 5월 말에 도시민 50명을 초청해 봉화군 농민회와 함께 3000평의 밭에 서리태 콩을 심는 행사를 했다. 정 전 의원의 취지에 공감하는 한 농부가 100만 원 어치의 콩 종자를 기부했다.
▲ 비나리 마을 풍경. ⓒ프레시안(김하영) |
그는 협동조합의 정치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협동조합만큼 탄탄한 조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노원구 같은 곳에 주민들이 모여 마을 반찬가게를 협동조합으로 열 수 있겠죠. 1억 원 정도면 가게를 낼 수 있어요. 봉봉협동조합에서 믿을 만한 농산물을 사서 반찬을 만들어 조합원들이 소비도 하고 다른 주민들에게 팔아 수익을 낼 수도 있죠. 이렇게 작은 협동조합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생각해보세요. 협동조합은 생활에서의 문제를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토론하고 해결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조합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조합원들의 의식도 깨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협동조합 조합원들이 1만, 10만, 100만이 된다고 치면 이들만큼 강력한 조직이 어디 있겠어요. 민주당에서도 협동조합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보수 쪽 분들은 협동보다 경쟁의 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협동조합에 적응하기 힘들 겁니다.(웃음)"
정 전 의원은 협동조합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 한다는 사람들 사실 대단한 거예요. 민주주의 교육 제대로 받은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민주주의가 이 모양이긴 하지만.(웃음) 하물며 협동조합은 어떻겠어요. 어디 배워 본 적이 있어야죠."
그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드린"단다.
"이런 일이 있었대요. 한 학급에 6명인 시골 학교에 도시에서 교사가 새로 부임해서 아이들 실력을 평가 하려고 수학 문제를 냈답니다. 시험을 시작하는데 애들이 모여 앉아 같이 문제를 풀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각자 풀어야지 왜 모여 있니'라고 했더니 애들이 '문제가 어려운데 같이 풀어야지 왜 혼자 풀어요' 그러더래요. 어이없어 하는 교사가 달리 반박을 못 하고 '그래도 혼자 풀어야 하는 거야'라고 하니까 아이들이 다시 '우리 동네에서는 논에 물 댈 때도 힘드니까 같이 모여서 하는데요.' 그러더라는 겁니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애들이 대학에 가서 팀 프로젝트를 하면 그렇게 헤맨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 성적순에 따른 무한 경쟁에만 내몰려 있었지 협동이라는 걸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요즘 노후대책 1번이 뭔지 아세요? 자식들과 빨리 연을 끊는 거랍니다. 생존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도 부모에게 달라붙는 걸 막아야 된다고요. 이런 슬픈 농담이 나오게 된 것도 다 경쟁만 가르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한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그가 봉화에 내려간 때가 지난 3월인데 아직 창립 총회 전이다. '더딘 것 아니냐'고 물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죠. 여기 와서 농사를 보니까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없더라고요. 씨앗을 뿌려,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가는 걸 배우고 있어요."
그에게 협동조합은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10년 동안 '여의도'를 떠나서 벌이는 하나의 사업이 아니라 또 다른 현장에서의 정치 활동이었다.
"현재 협동조합기본법에 문제가 있죠. 금융 보험업을 못하게 제한해놨고, 정치 참여도 금지시켜놨어요. 그래도 여기서 협동조합 교육할 때 협동조합법의 한계만 왈가왈부 하는 사람들은 부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제도 안에서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야죠."
감옥에서 텃밭 농사를 하며 자연과 생명의 위대함을 느꼈다는 정 전 의원은 아직 봉화에 땅 한 평,집 한 채 없다. 자기가 내려온 뒤로 갑자기 땅 값이 두 배로 뛰었단다. 그렇지만 농민회의 공동 텃밭에 고추, 고구마, 가지, 토마토, 호박 등 이것저것 잔뜩 심었다. 밭고랑 사이에 선 정 전 의원은 자신이 심은 작물들을 보며 달뜬 표정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심은 고추가 벌써 열렸어. 비 한 번 내리니까 쑥쑥 자라네."
그가 봉화에 씨를 뿌린 협동조합도 초여름 단비를 맞은 고추처럼 쑥쑥 자랄 수 있을까.
▲ 정봉주 전 의원. ⓒ프레시안(김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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