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살고 있는 최승운 씨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로 아이를 잃었다. 대학원 졸업 뒤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아이를 잃은 뒤 우을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고, 결국 올해 2월 다니던 연구원을 나왔다고 한다.
그의 분노는 "가해자인 기업, 정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미 2년 전 가습기 살균제가 폐 손상과 사망의 원인이란 역학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 사이 문제의 살균제 제조업체는 기업명을 바꾸고 비영리단체와 함께 극빈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 회사의 제품으로 아이를 잃은 최 씨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소 호흡기를 착용한 신지숙 씨는 '산모 환자'다. 취재진 앞에 마이크를 잡은 그가 처음 한 말은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였다. 힘겹게 입을 연 신 씨는 "오는 길에 보니 개나리가 활짝 피었던데, 전엔 걸어서 완주했던 남산 산책로를 이젠 걸을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담담하게 발언을 이어가던 신 씨도 "가해 기업과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을 다하도록 해 우리를 지켜 달라"던 대목에선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 손엔 그를 더 이상 걷지 못한 게 만든,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병을 꼭 쥐고 있었다.
▲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들이 지난 1월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살균제 피해 사진전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4일 국회를 찾았다. 피해자 구제를 위한 국회 특위 구성과 피해구제 법안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몇몇 '운 나쁜 사람들'의 희귀 사례는 아니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현재까지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의심 사례는 총 357건. 이 중 사망자만 무려 112명에 이른다. 사망자 112명 중 7세 미만 영유아는 64명(57%), 20~30대는 18명(16%)으로 아이를 둔 젊은 부부나 산모로 추정된다.
최근에서야 불거진 사건도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3년 전인 2010년. 정부 역시 이듬해인 2011년 역학조사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폐 손상의 원인임을 밝혔고, 같은 해 11월엔 가습기 살균제의 인체 독성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피해자 구제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교 교수는 "피해자의 전체 규모가 얼마인지 조사위원회도 잘 모르고 있다"며 정부 차원의 의학적 건강 피해 조사와 가습기 살균제 노출조사를 시급히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살균제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이다. 천문학적인 폐 이식 수술 비용과 보험 적용도 되지 않는 약물 치료 비용으로 경제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거대 로펌을 내세운 살균제 제조업체와의 지난한 소송 역시 고스란히 피해자 가족이 떠 안아야 한다. 무엇보다 좀 더 위생적인 환경을 위해 무심코 구입했던 제품이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절망감은, 그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할 고통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민주통합당 장하나 의원은 "이제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민주당은 장 의원의 제안으로 지난 2일 의원총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법안과 특위 구성을 당론으로 정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장 의원은 "민주당의 당론으로 두 가지 의안이 확정된다면 입법 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라며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 과제가 '국민 안전'인 만큼, 새누리당도 이 두 가지 의안에 대해 적극 협조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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