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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1991년 노태우 정부를 돌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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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1991년 노태우 정부를 돌아보라

[민교협의 정치시평] 노동자의 죽음은 공화국의 죽음이다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이 열린다. 이전의 대통령 취임식과 달리, 이번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많은 노동자들이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삶의 끈을 놓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으며, 박근혜 정부는 대선이 끝났기 때문인지 손을 놓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박근혜 정부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이러한 일련의 절박한 사안들에 대해 제한된 해결책이라고 할지라도 '최소 해결책'을 위해 진지하게 나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럴 때, 노동 진영에서도 개방성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듯이, 대선 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벌써 수 명의 노동자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12월 21일 한진중공업지회의 최강서, 22일 현대중공업의 이운남과 청년노동활동가 최경남, 25일 한국외국어대의 이호일, 1월 28일 기아차의 윤주형 등이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 울산, 평택, 전주에서는 죽음을 무릅 쓴 철탑농성이 이어지고 있고, 유성기업, 콜트·콜텍 노동자 등의 절박한 시위들이 이어지고 있다. 도무지 마음이 정돈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민주노총 등이 구성한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조파괴 긴급대응 비상시국회의'는 2월 투쟁을 선포했다. 시국농성, 전면적인 선전전을 행함은 물론, 23일 대규모 범국민대회를 하고 이것도 여의치 않으면 25일 취임식을 반대하는 시위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마주보고 열차가 달리는 아슬아슬한 느낌마저 갖는다.

나는 지금이라도 박근혜 당선인과 새누리당이-현장을 단지 방문하는데서 머물지 말고-관련 기업들과 즉각 적극적인 논의를 해서 해결의 방책을 찾았으면 한다. 나는 수년 동안 싸워오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를 취임 전에 해결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 문제가 되는 사안들을 모두 취임 전에 해결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대선에서 범진보 진영은 패배를 했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어도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의제들을 박근혜 정부에게 당장 해결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휴머니즘적 각도에서 '극한의 투쟁'을 하는, 그리고 그 극한의 투쟁을 통해 제기되는 의제들이 있다. 최소한 이런 문제들에서 전향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보자. 박근혜 당선인이 취임 이전이지만 경제계와 재벌들, 그리고 몇몇 문제가 된 악덕 기업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말이다.

먼저 최강서 열사의 장례를 원만하게 치르도록 하자. 자식의 시신에 얼음을 퍼 넣으면서 부패를 방지하는 이러한 안타까운 사정은 인륜적 관점에서도 더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한진중공업에 갇혀 있다시피 한 동지들을 자유롭게 해 타협적 해결책을 모색해보자. 158억 원이라는 거액의 손배소로 최강서 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한진중공업은 이제라도 개방적으로 나서야 한다. 현대자동차처럼 여력이 있는 재벌들의 경우, 그리고 법적 판결이 끝난 최병승 씨와 유사한 사내하청 문제는 적극적으로 현대를 압박해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병승 씨가 철탑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 이런 류의 사태는 현대자동차처럼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기업이라면 부끄러워해야 한다. 쌍용자동차의 경우에도 희망퇴직자는 제외하더라도 해고자들의 복직에 대해서 기업노조와 쌍용자동차가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 당선자는 적절한 지원을 약속하면서 이러한 타협을 도와야 한다. 반대자가 절망감으로 취임식을 지켜보게 해서는 안 된다.

더 큰 문제들은 박근혜 정부 취임 이후에 또 격돌하자. 그러나 대선에서의 승자가 정해진 이 상황에서, 일단 제한된 매듭을 상호간에 시도할 수도는 있다고 본다. 박근혜 당선인도 축복받는 취임식, 최소한 범진보 진영이 절망감과 혐오감으로 취임식을 지켜보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정치적 이익이 있을 것이다.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자리'로 이동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범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도 패장(敗將)의 무리수라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지금이라도 긴급하게 머리를 맞대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타협적 해결책과는 정반대로, 아주 손쉽게 법을 빌미로 해서 강제철거를 시도하거나 강제적인 영장집행 같은 형식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 강제철거 같은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절망의 자살'이 이어질까봐 걱정이 된다. 사실 지난 수년 동안 정리해고, 비정규직, 사내하청 등 다양한 형태로 한계선 상에 선 노동자들이 '삶과 죽음의 한계선' 상에 서서 투쟁을 지속해왔다. 그러한 어려운 투쟁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노력해왔다. 사실 이번 대선에서의 범진보 진영의 결집과 그로 인한 역동적인 대선에는 이러한 투쟁의 동력이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상 '이번 대선에서도 민주통합당은 손 놓고 있었고, 정작 국민이 선거운동을 다 했다'라는 말들이 떠돌아다니는데, 그때의 국민 중에 가장 적극적인 국민은 아마도 그러한 투쟁 속의 노동자 국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노동자 대통령'을 표방하고 전투적인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을 배경으로 했던 김소연 후보가 1만7000표를 얻고 또 다른 진보 후보인 김순자가 4만6000표를 얻었던 것은, 전자의 지지도가 낮아서라기 보다는, 현장 노동자들의 절박한 조건이 많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문재인 후보라도 승리하게 해서 자신들의 절박한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흐름들이 다 모여서 그나마 48%의 야권 후보 지지가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런 점에서도 민주통합당이 이 문제를 단지 당선인의 문제로 위임해버리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절망의 자살'을 막아야

대선 전의 절박한 심정들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많은 노동자들이 삶의 끈을 놓아버린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절망이 그래도 '제한적 기대'로라도 바뀌지 않는 한, 잘못하면 더 많은 노동자들의 '절망의 자살'이 이어질 수도 있다.

바로 여기서 나는 박근혜 당선인이 보다 전향적인 생각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대선 이후 범진보 진영은 '멘붕'이라고 표현되는 절망적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노동자들에게는 절망의 자살을 촉발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이 고착된다고 하면, 박근혜 정부에게도 결코 득이 될 수가 없다. 만일 그래도 취임식을 축복 속에서 치르려면, 단지 취임식을 화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반대했던 국민, 그리고 그 국민들 중 '삶과 죽음의 한계선' 상에 서 있는 극한의 노동자들의 절망을 '제한된 기대'로라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이러한 무거운 절망의 반대자들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대선 이후 야권이 자신의 패배를 만회하려면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대중을 획득해 와야 하며, 박근혜 당선인은 집권 이후 상황이 순조로우려면 자신을 반대했던 대중이 자신에 대한 지지로 선회하도록 하거나 최소한 적극적 반대가 누그러지게 해야 한다. 반대와 지지의 '경계를 횡단'하고 반대와 지지의 경계선이 고착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나의 이러한 소망은 노동자들이 '살아서 싸워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더 이상 한계선상에 선 노동자들이 '절망의 자살'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 일련의 자살을 보면서 나는 1991년 5월의 악몽을 떠올렸다. 사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출범이라고 하는 새로운 '절망적 상황'에서 야기된 '절망의 자살들'이었다. 단지 대선 이후의 자살의 특수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한계선 상에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범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도 '죽음의 투쟁'으로는 '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이 진지하게 나선다면 충분히 개방적으로 나설 수 있다고 본다. 미래지향적인 '삶의 투쟁'으로 '적'을 이기고 '적'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한의 상황이 극한의 투쟁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도 나는 박근혜 당선인이 '최소 해결책'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한다면, 극한의 상황에 선 당사자들도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을 개별 기업주의 문제로만 놓아둘 수 없다. 그런 식의 사고라면 동반성장위원회에서 하는 것처럼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선정하고 말 것도 없다. 우리의 기업들은 개발독재 시대부터 친기업적인 국가 개입이나,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모두가 희생하고 국가와 사회가 총지원하는 것에만 적응해 있다. 그래서 '기업이 공생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흐름에는 낯설어한다.

박근혜 당선인의 많은 공약들도 기업의 이러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그러한 공약들만으로 자신들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대중들의 저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제한된 공약마저도 거부하는 자본과 관료들, 보수층의 저항에 의해서 무력화될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한 기업에서 선례가 만들어지면 다른 기업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기업들의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물론 나는 박근혜 당선인이 취임 전에 '최소 해결책'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물론 이러한 전제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대선은 민생 문제의 '해결 약속 경쟁'이었다

이번 대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명박 정부 하에서 악화된 이른바 '민생' 문제로 인하여 대중들의 분노와 좌절이 심각한 상태에서,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는 일종의 '해결 약속 경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전 칼럼(☞바로가기)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박근혜는 국가재정위기 등을 고려한 '현실적 복지세력'으로서, 문재인은 보다 '전면적인 복지세력'으로서 해결 약속 경쟁을 했다. 여기서 박근혜 후보자는 같은 보수 정부이지만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야권의 전면적 복지와 거리를 두면서도, 이명박 정부 하에서 참혹하게 악화된 문제들에 대해 내 식으로 표현하면 '제한된 타협적 해결'의 경로를 약속했다고 생각한다.

'극한의 의제들'은 공약의 진정성을 판별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노동자의 죽음으로 표출되고 있는 문제들은 박근혜 당선인이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많은 문제들의 '극한의 의제'들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이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많은 의제들 중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다른 많은 의제들에서의 신뢰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극한의 의제들에서 보이는 태도야말로, 전체 공약들의 진정성을 판별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한된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박근혜 정부가 약속한 바를 지켜보면서, 박근혜 정부의 통치 이후의 새로운 문제들을 가지고, 그리고 지속되는 문제를 가지고 다시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들을 통해서 박근혜 정부를 압도하는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할 것이다.

노동자의 죽음, 공화국의 위기

조금 더 학술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구성원인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죽음이다. 지금 자살을 선택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나 정리해고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서 사는 특정한 계급적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노동자의 자살 사태는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공동체의 어떤 위기를 반영한다. 공화국의 공화(共和)가 이미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적 시민의 죽음은 이미 그 사회와 공동체가 자본가적 시민의 입장과 요구만 반영되는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죽어가는 그 노동자들은 삶의 존재로서 존립할 수 없는 '배제된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이 해체되는 파열음

그래서 나는 바로 노동자의 죽음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해체되는 파열음을 듣는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국민국가는 계급적으로 균열되어 있지만, 그러나 최소한의 '국민'으로서의 공통성을 가진 집합체이다. 근대 국민국가는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공동체의 근대적인 형태의 정치적 존재 형태이다. 그것이 이전에 부족국가, 도시국가, 봉건국가의 형태로 바뀌어왔지만, 그것은 인간들 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존재 형태의 변화이지-비록 계급적 분열로 찢기어져 있지만-근대 국민국가가 '공동체'(존재의 근원적인 연대성을 공유하는 집단)로서의 성격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어떤 성원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고, 그래서 '죽음으로 한 발 더 내디뎌' 죽음을 선택하는 상황은 이미 '공동체로서의 사회', 그 근대적 형태로서의 국민국가, 그 정치적 형태로서의 공화국의 근원적인 위기를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나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영향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그러한 질서가 균열되고 있음을 인지한다. 그래서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의 문제에는 일국적 수준을 넘는 지구적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근대국민국가의 가장 전형적인 공동체적-자본주의적이기는 하지만-공존의 제도는 서구 복지국가의 '보편적 복지' 같은 것이고, 비(非)서구에서는 일본의 '연공서열-종신고용'형태였다. 그것이 서구와 일본에서조차도 이미 균열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세계화 이전의 해결 양식이 그대로 관철될 수는 없다. 이런 점을 나는 인지한다.

그러나 이런 점을 인지하면서도, 그래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최소한의 근간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정상'이 아닌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갖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보수, 박근혜 정부의 주도세력도 여전히-계급적으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 근원적인 위기를 직시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최소한의 해결책을 내오기 위해 나서기를 소망하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는 1000여 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입니다. <민교협의 정치시평>은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목요일에 게재됩니다. 이 칼럼은 민교협 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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