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40주년이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는 박정희 시대, 특히 '민주주의의 암흑기'였다고 평가되는 유신 시대를 둘러싼 현재적 쟁투에 돌입해있다. '역사적 박정희'를 둘러싸고 70년대 한국 사회가 '유혈(流血)적 쟁투'를 하고 있었다면, 이제 '현재적 박정희'를 둘러싸고 '비(非)유혈적 쟁투'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동남아시아형 '2세대 승계정치'가 과연 성공할 것인가
2012년 대선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이 대선이 갖는 여러 의미 중, 동남아시아의 특징적인 정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2세대 승계정치'가 과연 한국에서 성공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 박근혜는 한국에선 사례를 찾기 힘든 '2세대 승계정치'에 성공할까. 사진은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연합뉴스 |
주지하다시피, 박근혜라고 하는 60·70년대 독재 지도자의 딸이 집권당의 유력 후보로서 존재하고 있다. 사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명문 가문 출신의 정치인이 그 가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산을 배경으로 하여 유력 정치인이 되거나 심지어 대통령이 되는 사례가 많다. '2세대 승계정치'는 2세대 정치인이 자력(自力)으로보다는 선대 정치인의 후광에 힘 입어 유력정치인의 지위에 쉽게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와 같은 예는 말할 것도 없고, 필리핀의 아로요 대통령이나 아키노 대통령 같은 경우에도 이런 요인들이-전부는 아니지만-부분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정부 수반의 수준이고 의원 수준, 지역 정치 지도자나 자치단체장 수준에는 더욱 현저한 예들이 많다. 동북아시아에서도 일본은 예외적이다. 2009년 민주당 집권 이후 자민당 인기가 떨어졌을 때 자민당은 지지의 만회를 위해 '2세대 승계정치'를 타파하는 개혁을 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자민당의 재집권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아버지의 지역구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지역구 물려주기'로 나타나는 승계정치가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이런 흐름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조차도 공천 관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번번이 좌절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녀도 비리 혐의로 곤혹을 치렀으면 치렀지 선대의 정치적 자산을 밑거름으로 하여 2세대 정치인으로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과연 박근혜가 이런 현상을 역류하여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예상을 한다. 물론 박근혜가 박정희의 후광으로만 유력 정치인이 된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비리 혐의로 곤혹을 치룰 때 천막당사를 만들어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버텨 당의 위기를 넘어서게 만드는 등 자력으로 나름의 정치적 자산을 쌓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 뭐래도 박근혜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은 박정희에서 유래한다. 박근혜만 보면 눈물이 글썽이는 영남의 아주머니들에게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높은 민도와 '묻지마 불신'
왜 2세대 정치인이나 3세대 정치인이 힘든가하는 점을 천착해보면,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정치적 민도(民度)가 대단히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민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있으면 변화를 요구하고 그래서 새로운 정치인과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식으로 나아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기성 정당에 대한 '묻지마 불신', 나아가 '묻지마 변화' 요구까지 표출된다. 사실 안철수와 같이 '당외(黨外)' 후보가 선전하는 것도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대중의 높은 민도, 거기에서 유래하는 높은 정치적 기대, 그것의 이면으로서의 기성 정당에 대한 높은 불신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근혜의 당선은 단지 새누리당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박정희 시대가 부활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박근혜를 결코 박정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박근혜가 움직이니 박정희 시대에 유력인들이 움직이고, 그 한 징표로서 이미 '7인회'라고 하는 것이 논란이 된 바도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하는 것이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아시아 민주화의 두 가지 유형
이것은 한국에서 독재와 민주화 간의 관계와 연관이 된다. 나는 아시아의 민주화의 유형으로, 구독재 세력의 유산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구독재 세력의 이니시어티브가 제도적·비제도적으로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존재하는 '정치적 신과두제(新寡頭制. neo-oligarchy)'와 상대적으로 구독재적 보수 세력의 정치적 주도권이 균열되고 '독재세력 대 반독재세력의 대립구도'가 선명한 '포스트-과두제(post-oligarchy)' 유형을 나눈다(<복합적 갈등 속의 아시아 민주주의(조희연 지음, 한울 펴냄)> 중).
신과두제가 구과두적 세력들이 신생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포스트-과두제의 경우 정치세력들, 특별히 구 독재적 보수세력들과 반독재 중도리버럴(자유주의) 세력들 간의 다원적 경쟁이 상대적으로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비교사회적 측면에서-우리의 내부적 시각에서는 그 성과에 대해 비판적이지만-후자에 속한다고 나는 평가한다.
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을 비교해보면, 구독재세력과 반독재세력의 힘의 관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과두제적 사회일수록 전자의 힘이 강하고, 그 결과 독재의 붕괴 과정과 독재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서 전자의 이니시어티브가 강하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대중들의 귀속감(committment)과 정치적 선호에도 그대로 관철된다.
구독재의 불가피성, 안보의 중요성, 성장 지속을 위한 권위주의의 불가피성, 경제위기 상황에서 민주주의적 과정을 희생할 수 있는 정도 등 다양한 측면에서, 대중들이 구독재체제의 지배 담론에 의해 상당히 큰 영향을 받고, 그 결과 구독재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런 조건 위에서 쿠데타와 같은 '민주화의 역류(reverse wave)' 현상도 용이하게 나타나게 된다.
포스트과두제적 사회에서는 이러한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다행스럽게도 신과두제적 사회로서 보다는 포스트과두제적 사회의 특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2004년 탄핵사건 같은 경우에 의회 내의 다수세력이 탄핵을 감행하였고 이것은 민주화의 흐름을 역류한다고 생각한 대중들에 의해 역풍을 맞고 말았다.
박근혜가 사실 박정희의 유산에 의해서만 대선 후보가 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박근혜에 반대하는 정서가 반대 진영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구조적 조건 때문이다. 박근혜에 대해서 극우적 보수주의자나 골수 반공주의자, 대구·경북 지역주민들의 다수가 열렬한 지지를 보이지만, 온건한 보수주의자,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박근혜가 집권하게 되면 우리 사회가 새롭게 '거대한 적대적 갈등 상황'에 돌입할 것이다'라고 우려하며, 열렬한 지지를 주저하게 되는데, 이것도 사실은 한국의 독재와 민주화의 역사적 조건-독재체제에 대항하는 반독재세력의 팽팽한 균형-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와-여러 편차가 존재하지만-비교하여, '독재 대 반독재'의 대립의 '경계'가 선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들의 기억에서 쉽게 상기되는 '독재의 추억'
사실 민주화의 과정은 독재 하의 정당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구(舊)독재정당은 반독재 세력의 일부를 포섭(co-optation)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서 국민적 정당성을 갖게 된 민주주의를 자신의 이미지로 차용하고자 하게 된다.
민주화가 본격화된 이후에 만일 '친독재정당 대 민주주의정당'의 대립구도가 유지된다면 전자는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구 민주정의당이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한 90년 '3당 합당'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 국민적 요구사항이 된 민주주의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구 독재정당이 반독재 민주화세력(그 일부로서의 반독재 민주정당)의 일부를 포섭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사실 나는 90년 3당합당이 87년 이후 한국정치사에서 구 독재정당의 최대의 '인적 혁신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과거 '독재 대 반독재(민주주의)'의 대립구도를 희석시키면서 구 독재정당이 민주화 이후의 변화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런 식의 변신 노력 속에서, 많은 동남아시아에서 민주화 이후 정당들의 대립에서 '독재 대 반독재(민주주의)'의 대립의 성격은 약화되어가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87년 이전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연원을 두는 이 대립구도가 확연하게 존재하며 국민들의 투표 행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국민적' 운동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비록 3당 합당과 같은 독재세력의 '성형수술' 과정에도 불구하고, 독재의 흔적과 기억을 지우려는 반독재세력의 노력은 그렇게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여전히 이 대립구도가 대중의 심성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어떤 후보가 나서건 어떤 대립구도가 형성되건 구 독재정권을 역사적으로 계승한다고-민주세력에 의해 규정되는-새누리당과 반독재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두는 진보개혁세력의 국민적 지지분포는 쉽게 양분된다.
또한 장준하 선생 암살사건이나 유신평가, 정수장학회 문제와 같이 독재 시대의 어두운 사건 등이 부상하게 되면, 국민들은 쉽게 독재 시대의 기억을 상기하게 되고,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측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물론 나는 이러한 '과거' 투쟁'이 대선의 성패를 결정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반독재민주주의세력에게 승리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민주화 이후에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주당 등 반독재 중도개혁정당이나 민주정부 시기의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정책' 등이 낳은 파괴적 결과를 둘러싸고 비판을 받고 그 결과 반독재 민주주의진영은 내부적으로 균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국민적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독재시대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강력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지, 반독재세력이 스스로의 통치세력으로서 한 일을 모두 긍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전 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것은 사실 결코 역사적·현재적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박정희 정권 시대에 관제언론이 만들어낸 '박정희에 대한 가공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역사적 현실을 보게 되면, 이러한 점이 이해가 된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단적인 몇 가지를 언급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박정희 정권 시기의 전 과정이—현재 뉴라이트가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조국 근대화를 위해서 국민들이 단결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이유이다.
통상 한국의 보수는 박정희 시대 하에서 '조국 근대화'가 급속히 일어난 '기적 같은 시기'로 묘사한다. 그런데 그 시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의 매년 '정치적 위기'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전국민적 저항으로 첨예한 갈등이 전개되었던 시기이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가 지속되었다. 사실 박정희 시대를 독재시대라고 하는데, 독재는 오랜 기간 장기 집권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폭력과 폭압으로 강압적 통치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국민들의 박정희 체제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저항하니까 박정희 정권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하여 거대한 폭력적 통치를 했던 것이다.
보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박정희가 고속성장을 추동한 공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고속성장과 같은 경제적 실적(economic performance)이라도 성취하니까 19년을 버텼지 그렇지 않으면 단명(短命)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박정희 시기는 높은 정치적 민도를 갖는 국민들이 저항하는 정치적 위기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그나마 경제적 업적이라도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것으로 그나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72년 10월 유신 이후 완전히 '반민주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하려고 함으로써 정권의 위기가 오히려 가속화되고 그 결과 붕괴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 위수령과 계엄령과 같은 폭압적 수단이 동원된 시기는 재임 19년 동안에 63년, 67년, 69년, 72년, 74년, 75-79년이었다. 거의 전 기간에 '무력 통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박정희 통치의 전 기간이 보수가 그러내려는 상(像)과 달리, 정치적 저항과 무력적 진압의 연속과정이었음을 말해준다.
'한 번 더 대통령 한다면 나도 총 들고 나가겠다'는 식의 분위기
이 글을 쓰다 보니, 70년대 말에 함께 자취를 하던 전도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금은 일산에서 대단히 큰 교회의 목회자로 재직하는 분인데, 나하고는 70년대 후반 같이 자취를 했었다. 그는 유신시대에 보수적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박정희에 반대했는데, 그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60년대 말에는 박정희를 지지했고 그래서 69년도에 3선 개헌이 논란을 빚으면서 강권적으로 국회를 통과하고 국민투표에 붙여질 때, 자신은 주위에 "야, 그래도 더 믿어보자. 그나마 수출도 잘되고 경제성장도 본 궤도에 오르는 것 같은데, 지금 중단하면 되겠냐? 만일 박 대통령이 한 번 더 대통령한다고 나서면 '나라도 총 들고 나가서 싸울 테니' 이번에는 지지하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총 들고 싸운 적은 없었다. 이런 말은 70년대 중후반의 대중적 정서를 잘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사실 오히려 9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살아나면서 그 시대의 '기억'이 보수적으로 재구성되고 있어, 그것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착시' 현상이 발생하고 있지만, 유신 이후에는 박 정권은 그 대중적 기반은 현저히 균열되었고 광범한 국민적 저항으로 강압적 통치가 아니었으면 유지될 수 없는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이 바로 박정희 시대 이후 한국에서 독재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된 기반이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는 자체의 도덕적 붕괴이다
다음으로, 박정희 체제의 말기에는 박 정권에 충성했던 권력 엘리트 내부에서도 그 체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민중의 저항을 기본 요인으로 하면서도—사실은 군부 권력엘리트 자신들의 도덕적 붕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지배 체제는 지배 엘리트들의 '도덕적 붕괴'와 '체제 유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의 실종, 자기모멸적 행위 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확히 박정희 유신체제도 그러하였다.
초기에는 기성 정치인의 부패를 비판하는 우국충정 식의 자세를 일부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가 부패의 화신이 되고 동료들의 부패를 보면서, 그들 스스로가 박 정권에 대한 도덕적 자부심을 상실하게 되었고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해갔던 것이다.
권력엘리트들의 도덕적 자부심을 실추시키는 사건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70년 3월 발생한 정인숙 사건이었다. 정인숙의 오빠인 정종욱이 여동생을 한강변에서 살해한 이 사건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박 정권의 도덕성에 의문을 확대하는데 기여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당시 정일권이나 박정희 등 권력의 핵심인사들이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 정권의 수뇌부들은 광범하게 이른바 '요정 정치'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70년대 서울에는 비밀요정을 포함하여 100여 개의 요정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정계의 거물들을 모시는 요정정치의 산실이었다. 이 경우 많은 경우 재계 인사와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었고 때로는 정치권의 희의 장소이자 호화호색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박정권의 주요 현안들은 요정에서 결정되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심지어 이후락의 지원을 받는 삼청각의 개업식에는 이후락을 포함하는 중정요원 50명이 참석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런 사실들이 주간지, 월간지 등에서도 다루어지고 유언비어로도 확산되면서, 박 정권의 도덕성의 기반이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요정은 또한 고위층들에 대한 중정의 정보수집 통로이기도 하였다. 요정 주인들이나 접대부들은 중정의 정보부의 요원 노릇을 강요당하였다. 직접적으로 망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고 수시로 중정에 블려가 자신들의 지득(知得)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정에 협조하지 않으면, 요정이 폐쇄당한다거나 요정 출입 탤런트가 TV에 출연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점에서 나는 박 정권의 붕괴는 도덕적 자부심의 붕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사실 모든 체제의 말기적 모습이기도 하다.
71년 10.2 항명파동에서 보이는 박정희 정권의 또 다른 야만성
이러한 도덕적 붕괴와 함께, 박 정권의 붕괴는 박정희에게 권력이 무한대로 집중되고 그것을 배경으로 박정희의 일부 측근이 심지어 쿠데타를 같이 했던 군부권력엘리트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그러한 야만성에 의해서였다.
60년대 말-70년대 초의 예를 들어보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민주공화당은 박정희의 1인 권력체제로 전환되어갔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충성파 및 중정 등 공안기관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71년 10.2파동은 유신으로 가는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중정으로 중심으로 한 박정희 극렬 충성 그룹들의 폭력적 반격이었다. 68년 국민복지회 사건이 날 때만 하더라도 박정희에 대한 핵심적인 충성그룹으로 공화당의 중심에 있었던 김성곤, 김진만, 길재호, 백남억 등 4인방이 제거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당시 야당이 발의한 내무부장관 오치성 해임안이 통과된 것이었다. 문제는 20여명의 공화당 의원이 야당의 해임안에 찬성한 것이었다. 이는 4인의 오만이자 박정희에 대한 항명으로 규정되었다.
후반에는 박정희 정권이 거의 조폭처럼 작동했다
당시 박정희는 '주동자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반쯤 죽여 가지고 공화당에서 내쫓아라'라고 말했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실제 해임안이 가결된 이후, 중정은 박정희의 지시 하에서, 4인을 포함하여 공화당 23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했고 이 과정에서 극심한 구타와 고문을 행하였다. 당시 김성곤 의원은 중앙정보부 수사관에 의해 콧수염이 반만 뽑혀 밖에 다니지도 못했다. 육사 8기로서 5・16 쿠데타 세력 중 한 사람인 길재호 의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그 후에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는 중앙정보부는, "마치 암흑가 폭력조직의 보스가 등 돌리는 부하를 잡아다 린치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행동을 했다"라고 혹자는 쓰고 있다.
이것은 권력엘리트 내부에 심각한 상흔(傷痕)을 남긴 사건이었다. 즉 박정희에 대한 극렬 충성 이외의 '다원적'인 행동양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명하게 보여주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충성을 극도로 약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10.2항명사건은 정보부의 폭력이 저항그룹에게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공화당, 지배블럭의 구성원들에게도 가해질 수 있음을 각인한 사건이었다. 이는 공화당 의원들의 심적 이반, 권력엘리트의 결속력의 약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조갑제조차도 어딘가에서 "10.2항명 하동 이후 여권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공화당은 독자성을 잃고 슬슬 기기만 했습니다. 공화당 운영은 위탁경영에서 대통령 직영체제로 바뀐 것이지요"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1인에게 권력집중과 충성파 이외의 비판적 그룹에 대한 폭력행사 및 제거과정은 지배블럭 내의 도덕적 결집력과 기풍이 급속히 약화되는 과정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지배블럭 내부의 이반현상과 지배블럭에 속하던 성원들 일부가 이탈하여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재야에는 지식인이나 야당인사들 뿐만 아니라 여당 이탈파도 등장하였다. 예컨대 69년 공화당에서 제명된 양순직, 예춘호 전 의원들은 재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5・16 이후 저항진영의 일부가 분열하여 쿠데타 지지를 하고 이에 포섭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권력엘리트의 일부가-예춘호 처럼-이제 운동정치에 합류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재벌2세에게도 부담스러운 박근혜 시대
이처럼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측면은 꼭 독재에 저항했던 '신념이 투철한' 사람들이나 집단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박 정권에 대한 기억은 재벌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니다. 나는 재벌가의 '2세들에게' 박근혜 시대가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박정희 체제가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적 지원체제였지만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박정희에게 "무릎 꿇고 굴종하면서 '간택(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유신시대에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독재에 저항했던 젊은 세대와 달리 박정희 정권의 편애와 전략적 지원을 한 몸에 받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들도 '무릎 꿇고' 살았던 시대였다.
이런 전제 위에서 볼 때 '과연 한국에서 2세 승계정치'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나는 이런 '관전 포인트'로 이번 대선을 지켜보고 있다. 한류에 대한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의 수용과 선망은 단지 '잘사는 나라', '흥미롭고 수준 높고 경쾌한 댄스뮤직'에 대한 선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나라의 정치와 시민사회가 갖지 못한 '높은 수준의 민주화'와 '역동적인 시민사회의 나라'라고 하는 정치사회적 선망도 자리 잡고 있다. 최소한 아시아 한류를 연구하는 내 아시아 친구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번 대선은 그런 점에서도 아시아 친구들의 선망의 깊은 저변이 유지될 것인가 아닌가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줄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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