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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유족들 "박근혜, 무릎 꿇고 사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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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유족들 "박근혜, 무릎 꿇고 사죄하라"

[현장]37년 만에 외친 "내 남편 살려내라!"…눈물의 기자회견

여덟 개의 영정이 차례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 들어섰다. 30대 젊은 남편의 사진을 손에 든 이들은 이제는 80대 노인이 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 유족들. 면회가 허락되지 않아 얼굴 한 번 못보고 남편을 형장에서 잃은 유족들은 시신조차 되찾을 수 없었던, 37년 전의 '그 날'을 애써 지우려 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이틀 전, 유력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한 마디가 이들을 카메라 앞으로 다시 불러 들였다.

"대통령 나가려는 사람은, 아니 대통령은 고사하고 동네 동장 나가는 사람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인혁당 재건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기에 내 목숨을 걸 수 있어요." (고(故) 우흥선 씨 부인 강순희 씨)

▲ 12일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혁당 피해자 유족이 남편의 영정 사진을 들고 통곡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오후 새누리당사 앞에서 열린 인혁당 재건위 유가족들의 기자회견은 시작 전부터 눈물바다였다. 젊은 남편의 영정을 손에 꼭 쥔 강순희(80) 씨는 "매주 산소에 가면 항상 세 번씩 하늘에 대고 외쳤다. '박정희 이 살인마, 천벌을 받아라!'라고…한 번만 외치면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항상 세 번을 외쳤는데…"라고 울음을 터트렸다.

1975년 4월 9일 형장에서 아버지 고(故) 송상진 씨를 잃은 송철환(52) 씨는 "우리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벽제화장터에서 강제로 화장해 시신조차 확인 못했다"며 "이 엄청난 사건을 두고, 판결이 두 개라니,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냐"라고 울분을 터트렸다.

담담하게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던 송 씨의 목소리도 "40년 가까이 온갖 박대와 냉대를 받으며 간첩의 자식으로 살아왔다"는 대목에선 떨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눈물을 터뜨렸다. 한 번 떨리던 목소리는 곧 유족들의 통곡으로 이어졌다.

이날 유족들은 성명을 통해 "이미 박근혜는 200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됐다는 국정원 조사 결과를 두고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면서 "억울하게 여덟 분이나 사형을 당한 사건을 두고 자신에 대한 모함이라 강변하는 당신의 몸에도 진정 인간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시는 이 땅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같은 무고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역사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유족들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박 후보와의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 새누리당사 안으로 향했지만, 채 몇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곧 당사를 지키는 전경들에게 가로막혔다. 김 씨가 37년 전, 남편이 사형당한 뒤 억울함을 호소하며 외쳤던 구호를 다시 외쳤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내 남편 살려내라!"

ⓒ연합뉴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왜 다시 논란 되나

유신 시절 대표적인 공안 사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도예종 씨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해 사법역사상 '사법 살인'이란 오점을 남긴 판결이다. 당시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집행일인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할 만큼 국제사회의 질타도 거셌다.

이후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고문 등을 통해 조작한 사건으로 규정, 2005년 12월 법원이 이 사건의 재심을 수용했다. 2007년 1월 서울지방법원은 이미 형이 집행된 피고인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미 재심을 통해 무죄 결론이 난 이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이유는 최근 박근혜 후보의 발언 때문이다. 박 후보는 지난 10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인혁당 유가족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라며 "앞으로의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일축했다.

박 후보가 언급한 두 가지 판결은 유신 시절이었던 1975년 '권력의 시녀'라고 불렸던 대법원의 사형선고와 2007년 서울 중앙지법의 재심 판결을 이야기한 것으로, 이 두 개의 재판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재심의 개념조차 부정하는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논란이 커지자 박 후보는 11일 "대법원 판결(재심 판결)은 존중한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그 조직에 몸 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해 다시 논란에 불을 붙였다. 박 후보가 언급한 '관련자 증언'은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박범진 전 한성디지털대 총장과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들은 2010~2011년 저서 등을 통해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유신 전이었던 1964년 중앙정보부에서 청년 57명을 잡아들인 공안사건으로, 유신 시절 벌어진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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