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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에 다시 부활한 '바리야그', 그리고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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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에 다시 부활한 '바리야그', 그리고 인천

전쟁, 침략, 수탈에서 평화, 번영, 도약으로

#1.
"중국은 항공모함 바리야그를 진수한다고 한다. 1904년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하였던 바리야그 함대, 그 이름을 다시 부활시킨 러시아의 구축함 바리야그와 별개로 우크라이나에서 건조되었다가 중국에 인도된 바리야그가 중국의 항공모함으로 재탄생하여 서해바다에 진출하게 되었다. 미국은 재정위기로 국방비를 불가피하게 축소해야 할 상황이다. 동북아에서 미중간의 힘의 균형과 갈등 속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국제외교역량이 어느 때 보다 더 요구되는 상황이다."(송영길 인천시장 시정일기 中)

중국의 항공모함 바리야그(Varyag)호가 실전배치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며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배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 해전에서 일본에 패배한 바리야그 함대의 이름을 붙여 구 소련의 니콜라예프 조선소에서 건조되던 항공모함이다. 그러나 이 배가 완성되기 전 소련 연방의 붕괴로 1992년 우크라이나 정부가 인수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1998년 홍콩의 작은 회사에게 이 배를 팔았다. 당시 홍콩 회사는 마카오에 해상 카지노를 만든다는 이유로 이 배를 샀다. 결국 중국에서 실전 항모로 재탄생하게 된 것.

중국이 이 항모의 이름을 '스랑(施琅·청나라 수군 장수로 대만을 수복한 인물)'으로 바꿨지만 '바리야그'라는 이름이 107년 만에 황해에서 부활한 셈이다. 러시아에서 바리야그 함대는 '용맹'의 상징으로 통한다. 송 시장에게 '바리야그'는 익숙한 이름이다. 러시아는 인천 연안부두에 추모비를 세웠고, 송 시장은 지난해 가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던 바리야그 함대의 함대 깃발을 러시아에 반환했었다.

▲ 2010년 11월 바리야그 함대 깃발이 새로 건조된 러시아 순양함 바리야그 호로 옮겨지는 모습. ⓒ연합뉴스

#2.
"연평도 부근 포사격 관련 보고를 들었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다행히 충돌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남북관계의 현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 같다. 시급한 군사적 긴장완화조치가 필요하다. 최소한 상호훈련 통보 수준, 핫라인 개설이라도 시급히 되어야 한다. 연평도 주민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송영길 시장 시정일기 中)

지난 10일. 연평도에서 우리 군이 대응사격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해안이 다시 남북 긴장의 최전선이 됐다.

송 시장은 "독도는 침탈당하고, 왜곡 역사교과서는 채택되는 비율이 높아가고, 동해바다는 일본해로 미국조차 표기하고, 서해바다는 중국의 항공모함이 진출하고, 남북관계는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며 포사격 훈련을 하는 상황"이라며 "이런 한반도 주변 정세를 돌파하는 핵심적인 키는 남북관계의 돌파이다. 남과 북이 분열되어 싸우고 긴장이 강화되면 필연적으로 미중일러의 영향력이 증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3.
이렇게 인천 앞 바다가 뜨거워지던 사이. 인천에서는 여러 가지 '국제' 행사가 열렸다. 세계모의유엔대회와 한류콘서트. 세계의 젊은이들, 특히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인천에 모여 '평화'를 나눴다.

▲ 국제모의유엔대회에서 특강하고 있는 송영길 인천광역시장. ⓒ인천시청
송 시장은 유엔본부와 공동 주최한 세계모의유엔대회에서 '글로벌 리더의 조건'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통해 "진정한 글로벌 리더라면 무엇보다 빈곤과 질병, 전쟁으로 고통받는 국가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며 "리더가 되기 위해 공부 잘하는 지식이 아닌 현실에서의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송 시장은 또 케냐, 우간다, 팔레스타인, 네팔 등 저개발·분쟁국가 학생들을 따로 만나 한국의 과거 역경과 극복 과정을 설명하는 간담회를 갖고 개성공단에서 만든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인천이 갖는 역사적·지리적 의미는 상당하다. 구한말 인천은 제국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가 일어나 직접 침략 받은 것은 물론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이 일어났다. 당시 인천항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군함들도 수시로 정박을 하며 서로 경쟁을 벌였었다. 인천은 '개화'의 관문이기도 했다. 제물포항을 개항한 이후 각국의 영사관과 상공업 시설뿐만 아니라 종교·교육·문화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의 권력을 제패한 이후에는 일제 수탈의 최전선이 되기도 했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상륙작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인천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황해는 미중 군사 경쟁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고, 연평도·백령도 등은 남북 긴장 관계의 상징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공항이 있고, 중국과의 교류에 항구는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내륙에서는 경제자유구역을 설치해 외국 자본 유치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인천이 과거와 달라야 할 것은 명확해 보인다. '전쟁이냐, 평화냐', '피동적이냐, 능동적이냐'이다. 인천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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