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 미래발전연구원장은 지난 28일 '고령사회와 복지국가' 강연에서 "기업이 가족 친화적이 되지 않는 한 한국의 장래는 없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그의 지적대로 저출산 문제의 핵심은 기업 문화, 혹은 노동 환경에 있다.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와 일을 해야 하는 여성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크게 다르다. <편집자>
-사장님은 '출산 훼방꾼'? ☞"저 아이 가졌어요" 그 한마디에… (上) |
"정규직도 임신하면 눈치보기…퇴사 압력도"
"우리나라 직장맘의 출산·육아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단지 비정규직 만의 문제 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저도 지금 9개월 만삭인데 5개월째부터 직장에서 퇴사를 권고 받아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자리 직원까지 뽑았더군요. 4개월 전에 저의 퇴사를 종용하면서 '제 자리가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식으로 말해 놓고선 새로운 직원 뽑고 인격적인 무시까지…. 모든 걸 다 버텨왔습니다. 현재는 새로뽑은 직원이 나오질 않자 당장 아쉬우니 제가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많이도 울었습니다 4년 동안 다닌 회사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동료들마저 제가 임산부란 이유로 여러 가지 일을 불가피하게 할 수 없으니 대놓고 모욕적인 말들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강력한 법 개정이 시급합니다."
11일자 기사 "'저 아이 가졌어요' 그 한마디에…"(☞바로 가기)에 달린 한 독자의 댓글이다. 이 독자의 지적대로 아이를 가진 임산부가 회사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은 비정규직만이 아니다.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 역시 임신과 동시에 각종 불이익은 물론 퇴사 압력에 시달려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임신을 했으니 노동 강도가 높은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나가라고 한다. 건설업종이고 6년쯤 근무했다. 회사가 어렵다면서 동의도 없이 월급을 30% 깎고 지급했다." (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임신, 출산' 차별 집중 상담 사례 중)
"5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고 지금은 팀장이다. 출산휴가에서 복귀한 지 며칠 되지 않아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이제 애도 있고 그러니 일하기 힘들지 않겠냐며 팀원도 거느리고 하기가 어려우니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겠다고 한다. 회사에서는 다른 부서도 아니고 새로 팀을 하나 만들어서 거기에 발령을 냈다. 그리고는 또다른 육아휴직자를 배치했다." (고용평등상담실네트워크 '임신, 출산' 차별 집중 상담 사례 중)
육아휴직 후 인사고과 불이익은 당연?
퇴사 압력까지 받지 않는다 해도 임신, 출산, 육아에 따른 불이익은 여전하다는 호소가 많다. 상당수 회사에서는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쓰고난 여성들에게 업무 평가 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이 당연한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다.
IT업체에서 일하는 한 30대 여성은 "요즘 대기업 중에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운영하는 회사는 흔치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임신, 출산한 사람들은 업무 평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령 한 팀원이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년 등을 쓰고 쉴 경우 다른 사람이 일을 해주게 되고 상대평가 체제에서 휴직하고 돌아온 사람이 점수를 잘 받기는 어렵다"면서 "또 다른 사람이 일을 메꾸다보면 복귀하고 나서 다른 자리로 갈 수도 있어서 경력 관리 등에서 손해를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금융계의 한 30대 여성도 "우리 회사는 육아휴직을 다녀오면 관행적으로 업무 평가에서 'C'를 준다"며 "딱히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가 받는 사람들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 전화나 민우회 고용평등상담실 등에는 출산휴가, 육아휴직으로 인해 인사고과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거나 연봉이 깎였다는 등의 사례가 종종 접수된다. 중소기업 사무직인 한 여성은 "출산휴가 기간 동안 근무성적 평가가 있었는데 받고 보니 연봉을 10% 깎는 'C'가 나왔다"고 진정했다.
이에 대해 민우회 고용평등상딤실 측은 "출산휴가 , 육아휴직 기간을 인사평가에 산입한다면 여성에게 당연히 주어진 권리가 결국 당사자의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며 "인사 평가를 하는 경우 이 기간을 제외하고 남은 기간을 평가해야 합리적이고 형평성에 맞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별, 혼인, 가족상의 지위나 임신, 출산의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경우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 상의 차별에 해당한다. 이 경우 사업주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2천 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문제는 출산휴가 등이 이유가 됐음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는 것. 민우회 고용평등상담실은 "인사평가가 정당한 기준에 의해 이뤄졌는지 확인해보고 차별에 해당될 경우 문제제기하는 것이 맞다"고 조언했다.
▲ 아이를 안은 엄마. (이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
"당연한 권리" vs "회사 충성도 낮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에 대한 분위기는 회사에 따라, 같은 회사 내에서도 부서에 따라 크게 다른 편이다.
한 30대 여성은 "팀이 크고 여성 직원이 많을 수록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쓰기 좋다"라며 "같은 회사 안에서도 팀원이 적은 곳의 경우에는 '여자는 싫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여성 직원이 적은 회사의 경우에는 이러한 제도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낮은 경우가 많다. 경상남도의 한 전력회사에서 일하는 30대 여성은 "우리 회사는 여성 직원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 한 3~4년 간 여성 직원을 늘려 뽑았다"며 "그 여성들이 최근 결혼하고 임신을 하면서 출산 휴가를 쓴다고 하는데 회사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젊은 여직원들은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당연한 권리로 주장하는 반면 직장 상사들은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낮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출산휴가만 쓰고 복귀한 케이스인데 상사들은 '여직원들은 왜 그러냐', '앞으로 여직원은 못 뽑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회사 내에서 여성 직원들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나한테도 피해가 올 것 같다." (30대 정규직 여성)
이 때문인지 출산휴가에 비해 육아휴직은 이용률이 크게 떨어진다. 고용노동부의 통계를 보면 2010년 출산휴가를 쓴 사람은 7만5742명인데 육아휴직을 쓴 사람은 4만1733명으로 55%에 불과하다.
게다가 상당수 직장여성들이 출산휴가를 전후해 아예 퇴직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극소수의 여성들만이 육아휴직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2010년 한 해 동안 태어난 신생아의 수는 47만 명이다.
회사 관리자와 여성 인식차 크다
실제로 사측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부담'으로 여기는 인식은 여전하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11월 낸 보고서 '워킹맘의 실태와 기업의 대응방안'에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관한 임원, 부장, 차장 등 회사 관리자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다.
"여직원들이 결혼하면 언제 임신할까 사실 걱정이 된다. 이번에 우리 파트 4명 중 2명이 동시에 출산휴가를 쓰게 됐다. 현재 업무량은 나머지 2명의 직원이 감당하기에는 곤란한 수준이다. 인사팀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다면 개발 일정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 (제조업, 관리자)
"솔직히 나는 여직원들에게 언제 임신할 예정인지 물어보고 싶다. 여직원이 많은 우리 부서에서 동시에 여러 명이 출산휴가를 쓰면 다른 부서원들도 힘들고 나도 부서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광고서비스업, 관리자)
이러한 인식 차이는 출산휴가, 육아휴직뿐 아니라 출산 전후의 여성 복지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서 워킹맘 1308명에게 '가족친화제도가 효과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이들은 '상사의 눈치가 보여서'(44.1%),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서'37.5%, '회사의 제도 운영에 대한 의지 및 독려가 부족해서 등을 꼽았다.
실제로 5개 회사의 임원, 부장, 차장 등 관리자 316명을 상대로한 조사에서 이들은 사내 여성 복지 제도도 잘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태아검진시간 제공' 등의 제도에 27%, 46%만이 알고 있다고 답했다.
"육아휴직 비율만큼 고용 늘리는게 당연"
결국 출산휴가나 육아휴직과 같은 제도의 실효성은 기업 문화가 좌우하는 셈이다. 김용익 미래발전연구원장은 "현재 산재와 고용보험 등의 제도가 워낙 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탓에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그만큼 기업 문화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용익 원장은 "게다가 우리나라 산업 구조 상 중소기업이 많은데 기업 규모가 작아 질 수록 대체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이라며 "크게는 우리나라 산업 구조가 바뀌어야 하지만, 작게는 각 기업들이 육아휴직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직도 대체인력 때문에 육아휴직이 부담스럽다고 하는 기업이 있느냐"며 "그건 핑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고용보험에서는 기업이 육아휴직 노동자에 대한 대체 인력을 채용할 경우 매달 20만~30만 원의 지원금을 주는 '대체인력 채용 장려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육아휴직자에게 주던 월급을 대체 인력에게 주고 더불어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는 셈.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출산휴가, 육아휴직의 사각지대에 있는 비정규직 여성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지만, 고용보험에 가입된 여성 노동자들은 적어도 회사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장지연 위원은 "선진국이나 선진국 수준으로 운영하고 있는 기업들은 아예 육아휴직을 고려해서 인력을 고용한다"면서 "여성 노동자가 많은 국내의 모 기업의 경우 아예 전체의 10% 정도는 휴직 상태라고 보고 그만큼의 인력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육아휴직을 특수한 상황으로 여기는 것은 작은 기업일텐데. 이들은 '대체인력 채용 장려금'제도를 이용하면 된다"며 "육아휴직은 법에서 보장한 권리이고 당연히 기업과 노동자의 권리는 상충된다.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 의식을 높일 필요도 있다"고 보탰다.
4만1733명 vs 819명…"남성도 여성과 똑같이 육아휴직 써야"
한편 보다 근본적으로는 육아휴직이 여성들만의 위한 '특별 혜택'인 것처럼 여겨지는 문화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2010년 한해 동안 육아휴직을 쓴 남성 노동자는 819명에 불과하다.(여성은 4만1733명)
김용익 미래발전연구원장은 "스웨덴과 같이 고용평등이 확립된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남성들의 육아휴직도 필수적으로 보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며 "이들 나라에서는 육아휴직을 쓰는 남녀 비율이 거의 같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우리나라처럼 여성만 육아휴직을 쓰면 '여성을 채용하면 손해'라는 고용 차별로 이어지게 되지만 남녀의 육아휴직이 비슷한 수준이 되면 '남녀에 상관없이 육아 휴직은 누구나 쓰는 것'이라는 문화가 생긴다"면서 "진정한 고용 양성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성도 육아휴직을 쓰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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