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여기가 묘지나 마찬가지야. 이렇게 차례를 지내는 게 벌써 15년이 넘었어. 언제까지 이렇게 차례를 지내야 할지. 쯧."
마임순 씨는 함께 온 사람들과 차례를 지낸 뒤, 부검실 좌우에 안치돼 있는 수십 개의 유골들을 향해 제를 지낸 소주를 뿌렸다. 유골 중에는 마임순 씨 시아버지 유골도 있었다. 시아버지는 6.25 당시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이다. 시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결혼한 후에 알았다. 시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마임순 씨는 이렇게 매년 부검실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다.
"도망 간 사람들은 살고, 남은 자들만 죽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 후 1950년 9월 28일, 미군과 남한은 서울을 수복했고 고양지역 일대도 이즈음 함께 수복됐다.
수복 과정에서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과 치안대, 태극단 등 준군사조직이 한 달여에 걸쳐 부역자, 즉 공산당이 하는 일을 돕거나 동조한 자를 색출하고 즉결처형을 단행했는데, 이 중에는 무고한 민간인이 무수히 많았다.
▲ 금정굴 피해자 유가족들이 26일 서울대 병원 부검실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
이 부역자 색출작업에 의해 고양시에서만 최소 1000명이 법적 절차도 밟지 못하고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소극적인 부역자나 부역과 무관한 그 가족 등이었다. 1995년 금정굴에서 발굴된 유골들도 마찬가지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로 몰려 최소 153명이 이곳에서 희생됐다. 발굴된 유골에는 여성과 아이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상당수였다.
마임순 씨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그는 작은 시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시삼촌, 시숙까지 한꺼번에 잃어야 했다. 마임순 씨는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점령지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 글을 아는 사람들이 인민위원장 등을 했다"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마임순 씨는 "그러다 수복이 된 이후, 인민군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자기 스스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만 남았다"며 "하지만 그들과 그의 가족들은 죄가 있다고 끌려간 뒤 무참하게 살해됐다"고 전했다.
"총 들이대며 일하라는 데 이것을 어떻게 거부하나"
자신의 가족이 그러한 죽음을 당했지만 어디에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빨갱이'로 몰려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박화송(66)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다섯 살 때 금정굴로 끌려간 뒤 총살됐다.
박화송 씨는 "아버지는 동네에서 양복점을 했다"며 "그럼에도 부역 혐의로 총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시골에 사는 노인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일을 하라고 하면 안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나"라며 "'빨갱이'로 몰려 재판 한 번 받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빨갱이'라는 연좌제가 적용됐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고 나서 내 성이 박 씨인데, 김 씨로 20년을 넘게 살았어. '빨갱이'로 몰릴까 걱정한 어머니가 궁여지책으로 그렇게 하셨지. 나는 아버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고 20년 넘게 무(無)호적으로 살았지. 결국 스물네 살이 되어야 내 호적을 찾아야 되겠다 싶어 따로 내가 호주인 호적을 냈지."
박화송 씨는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며 "성까지 바꿔가며 살면서도 행여 꿈에라도 아버지가 나타나길 바랬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유골이 발굴됐지만 이마저도 부검실에 안치돼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그였다.
물론 희소식도 있었다. 2005년도에 발족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2007년 6월 금정굴 사건을 두고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금정굴 사건이 고양경찰서장 책임하의 불법 집단살해이며 그 최종 책임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국가의 유해봉안 등 후속조치를 신속히 처리할 것도 권고했다. 하지만 진실규명 이후 3년이 넘도록 유해안치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법규가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프레시안(허환주) |
"우리도 남들처럼 양지바른 곳에서 차례를 지내고 싶소"
그나마 지난해 고양시의회에서는 고인을 기리는 평화 공원 조성, 유해 안치 등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했지만 이마저도 보수층의 반발로 무산됐다. 유가족들은 이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15세에 아버지와 큰 형, 셋째 형을 잃은 서병규(76) 씨는 "아버지와 형의 유해가 발굴됐지만 여전히 부검실에 방치되고 있다"며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서 씨는 "벌써 16년째 이곳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다"며 "고인들이 언제쯤 편히 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서 씨는 "우리도 남들처럼 양지바른 곳에 유해를 안치하고 성묘를 지냈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이들의 눈물은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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