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캠프 선대위원장'으로 시작해 '탄핵 주역'으로
조 당선자가 노무현 대통령과 맺은 인연은 질기고도 기구하다. 두 사람은 모두 90년대 초 민자당으로의 3당 합당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에 몸을 담으면서 손을 잡기 시작했다.
조 당선자는 2002년 대선 당시에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아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의원들의 '노무현 흔들기'에 정면으로 맞서는 등 정권 재창출의 1등 공신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3년 민주당 분당 사태 때 잔류를 선택하면서 노 대통령 책임론을 정면으로 제기했고, 결국 2004년 민주당 대표 재임 시 노 대통령 탄핵을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합작하는 정치적 자충수를 뒀다.
결국 이는 민주당의 17대 총선 참패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공동 발의한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 속에도 건재했지만, 군소정당으로 몰린 민주당은 지금까지 반전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조 당선자도 17대 총선에서 민주당 불모지인 대구 수성갑에 출마하는 배수진을 쳤지만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순형 당선자가 이번 재보선을 통해 서울에서 정치 복귀에 성공함에 따라 노 대통령과 그 사이의 재대결이 펼쳐질지 주목된다. 현역 대통령과 미니정당의 의원이라는 엄연한 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 확산되고 있는 전국적인 반노감정이 그 토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에 앞서 조 당선자 개인적으로는 탄핵 주역으로서 정치적 사면을 받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물론이다. 조 당선자가 선거과정에서 이번 선거를 "정권 심판과 민주당의 새로운 거점 마련, 그리고 과거 정치 행적에 대한 평가"로 규정하고 총력전을 펼쳐 온 대목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한 그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분당 이후 이념과 노선, 정책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만큼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한다고 하더라도 두 당의 합당에 대해 반대한다"는 선제공격까지 했다. 이와 함께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서 분당한 것은 동서고금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배신행위로 용서할 수 없다"며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뿌리 깊은 앙금도 내비쳤다.
'돌아온 탄핵 주역' 조순형 의원과 민주당이 앞으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겨눌 비수(匕首)가 어느 정도나 파괴력을 가질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순형 당선자는 누구? 1935년 서울 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선친인 유석 조병옥 박사와 친형인 고 조윤형 의원의 뒤를 이어 신민당에 입당했다. 조병옥 박사가 1956년 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한 지 47년 만에 대를 이어 민주당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선친의 후광에도 정치 역정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1대에 무소속(성북 갑)으로 첫 배지를 단 뒤 12대에는 신민당(도봉)으로 당선됐고, 13대에는 한겨레민주당을 직접 창당해 나섰으나 쓴 잔을 마셨다. 그 뒤 14대에 선친과의 인연으로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민주당에 합류해 내리 3선에 성공했다. 11대 국회 첫 입성 때는 당시 관제야당 민한당에 입당해 출마할 뜻을 비쳤으나 당시 안기부가 '관제야당의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해 그의 입당을 막아 할 수 없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자주 이용하는 정치인, 가장 신사적인 정치인 등 시민단체가 선정하는 최우수 의정활동 의원에 단골로 뽑히기도 했다. 또한 노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권의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원칙적이고 강직한 성품으로 의정활동을 펼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쓴소리' 경력은 김현철 씨 사면 유보 건의(1999년 8월9일 당중진 초청 청와대 오찬), 내각제 연내 개헌 포기에 대한 대 국민사과 요구(1999년 8월4일 당무회의), 특검제 도입과 사직동팀 해체(1999년 6월9일 국민회의와 자민련 합동의총) 등이 꼽힌다. 그러나 본래는 개혁적인 쓴소리를 주무기로 삼고 강직한 이미지였으나 탄핵을 겪으면서 내용은 없이 '쓴소리'라는 이미지만 남았다는 비판도 높다. 정치적으로는 중도보수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