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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을 보라!"

김민웅의 세상읽기 <147>

"저 앞을 보라!…텅 빈 흑판, 텅 빈 교단, 텅 빈 교탁, 저것을 학생이란 이름의 너희들과 교사라는 이름의 내가 지금 지켜보고 있다. 똑똑히 봐둬라! 이것이 오늘날 남한의 교육실정이다."

이 대사의 대목은 작가 이병주의 소설 <관부 연락선>에 등장하는 주인공 유태림이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있던 학급에 들어가서 외쳤던 말입니다.

좌우의 대립이 한참 격렬했던 시기를 무대로, 소설에서는 C시로 표현되고 있는 현실의 진주,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명문 "진주 고등학교"가 이 대사의 현장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교사로 잠시 활동하게 되는 일본 유학생 출신의 유태림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반의 뒷문으로 들어가 학생들의 등 뒤에 서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반의 학생들은 앞문 위에 물통을 걸어놓았고, 유태림이 들어서기만 하면 일제히 공격적인 질문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놓을 태세였는데, 그만 그가 자신들의 등 뒤에 등장하면서 사태는 영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고 만 것이었습니다. 좌익이 중심이 된 동맹휴학의 진상에 대한 논란은 제쳐두고라도, 작품에 등장하는 유태림의 상황을 장악하는 기지는 비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워 했던 이 고급학년 학급에 담임을 자청했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나는 너희들의 학급을 담임하러 온 것이 아니다. 너희들과 더불어 저 교단에 어떤 선생님을 모셔야 할 것인가를 찾으러 온 것이다. 그 선생이 나타날 때까지 너희들과 함께 기다리기 위해 온 것이다." 그의 어조는 침착했고 그의 논리는 일방적이지 않았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말자, 동맹휴학에 반기를 든 유태림을 축출하기 위해 치밀한 공세를 취하려 했던 학생들은 난데없는 기습, 그것도 쉽게 반격하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유태림의 문제 처리 방식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현실을 완전히 새로운 지점에서 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격의 목표로 정했던 지점이 자신들 모두의 고뇌가 집중되어야 할 현장이 된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하여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는 바로 그 자신들의 현실을 자각하도록 했고, 셋째는 그걸 교사인 유태림이, 위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풀어보자는 자세로 임했다는 면모입니다.

작품 <관부연락선>이 일제치하로부터 6.25에 이르는 당대의 고난과 혼란, 그리고 격렬한 변화의 소용돌이의 역사를 다루었다면, 진주고등학교의 이 대목은 다만 교육실정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런 역사의 갈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이제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우리의 등 뒤에서 "저 앞을 보라!"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무엇을 보게 될까요? 어떤 목표를 향해 우리 함께 마음을 모아 나가고자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에도 좌우의 대립은 있고, 논의는 격렬합니다.

그러나 혹 그 아까의 교실처럼 텅 비어 있을지도 모를 우리 사회의 현실을 숙연하게 고뇌하기보다는, 적이라고 인식되는 상대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는 논법이 과연 누구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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