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은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천편일률적인 교육을 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성격과 수준을 고려하여 맞춤식 교육을 제공했다. 자로는 용기가 있었으나 나서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대충 알면서도 자신 있게 아는 척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는 척 하다 보니 억지로 우기는 경우도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이 잘못하면 일을 그르칠 소지가 많아 보였기에 공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가르쳐 준다.
공자는 자로를 야단치면서 함부로 대하는 느낌을 주지만 끔찍이 사랑하기도 했다. 자로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중 내란이 일어나 전사했을 때 공자가 "내게 자로가 있은 뒤로부터는 나에 대한 나쁜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며 무척 슬퍼했다. 불같은 성격의 자로는 스승을 비난하는 소리를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는 것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 지식의 근본이다. 그러나 솔직한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오죽하면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겠는가. 그만큼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값을 아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안다면 능력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몸값은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급여가 아니다.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급여'로써 노동시장에서 결정되는 객관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이를 기회임금(opportunity wage)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기회임금을 알면 스스로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와 같은 구조조정이 두렵지 않다.
지식사회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지식근로자의 정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지식은 대학교수나 박사들이 갖고 있는 학문으로서의 지식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고 제품이나 서비스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지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식근로자는 피터 드러커가 정의했듯이 "자신의 업무를 끊임없이 개선, 개발, 혁신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지식근로자는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질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삼익THK의 심갑보 부회장은 공부하는 경영자로 유명하다. 각종 세미나장에 가보면 맨 앞에 앉아 열심히 강의를 듣고 캠코더로 녹화를 하고 질문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핵심을 찌르는 질문으로 강연회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켜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취미가 공부가 되고 훌륭한 질문자가 된 배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콤플렉스 탈출전략에서 출발하고 있다. "나는 시골출신으로서 경영과는 관련 없는 정치를 꿈꾸는 정치학도였다"며 "경쟁이 치열한 기업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자신감이 없어서 시작한 공부인데 어느덧 공부가 취미가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긍정적인 태도를 통해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깨달았다. 그가 각종 세미나와 강연장에서 녹음하거나 녹화하는 습관은 자신감을 얻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마케팅, 회계, 재무, 생산관리 등 생소해 모르는 분야가 많아 녹음을 해 반복해서 듣던 것이 오래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는 강의를 듣고 모르거나 이해가 가지 않으면 반드시 질문을 한다. 강사의 답변을 들으면 모르는 것이 아는 것으로 변해 공부하는 기쁨을 스스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움 없는 삶은 향기 없는 삶"이라며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엄청난 강점이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자가 말한 '앎에 대한 진리'는 지식사회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지식근로자는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침을 여는 마음의 풍경소리처럼 읊어보자. 진정한 앎을 향해 다가가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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