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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은사',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교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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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은사',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교수 별세

5일 새벽 지병으로…향년 81세 '현대사의 증인' 떠나다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진보 언론인이자 지식인, 언론학자로 꼽히는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가 5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리영희 교수는 그간 지병인 간경화와 배에 물이 차는 증세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투병해 왔으며 5일 오전 12시 40분께 이 병원에서 별세했다.

이로써 한국 지성계는 반공 극우 이데올로기 속에서 진실을 밝히고 한국인 지식인과 청년을 새로운 시대로 이끈 '사상의 은사'를 잃었다. 리 교수는 스스로 한국 지식인, 지성인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고 침묵 속의 지식인들을 깨운 선구자였다.

▲ 리영희 교수ⓒ프레시안(김하영)
1929년 평안북도 삭주군 대관면에서 태어난 리영희 교수는 1947년 경성공립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안동공업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입대해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리 교수는 6.25 전쟁에서의 경험과 동생의 죽음이 "나의 국가관과 전쟁관,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 나의 마음가짐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전쟁 이후 리 교수는 기자가 됐다. 그는 1957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시작해 1972년까지 <조선일보> 및 <합동통신> 외신부 부장을 지내다 해직될 때까지 '박정희-케네디 밀약' 등 수많은 특종을 썼다. 그러나 그의 기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64년에는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 쓴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검토 중'이라는 기사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며 구속됐고 2심에서 선고유예를 받았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회사 안팎과 갈등을 일으키다 결국 1968년 <조선일보>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는 <합동통신>에서 외신부장으로 있었으나 1971년 위수령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강제 해직됐다.

그 이후 1972년 한양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역시 해직과 복직을 거듭해야 했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 1976년 제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임됐다.

유신정권이 한창이던 이 기간에 리 교수는 반공·냉전·극우 논리에 메스를 들이대는 문제작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를 썼다. 리 교수는 동아시아 정세를 분석한 이 책에서 중국의 부상과 한미 관계, 한일 관계의 실체를 밝혀냈고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을 뒤흔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젊은 학생들과 지성인들은 이 책을 '지적 해방'으로 받아들였고 이른바 '전론 세대'를 구성하기도 했다.

<전환시대의 논리> 이후에도 리 교수는 줄곧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책을 내놨다. 1977년에는 사실 그대로의 중국을 다룬 <8억인과의 대화>과 한국 사회의 도그마를 파헤친 <우상과 이성>을 냈고 이 역시 <전환시대의 논리> 못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리 교수는 이 책들로 인해 또다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리 교수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1977년 12월 반공법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리 교수는 1980년 1월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했으나 한양대학교에 돌아가기 까지는 4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리 교수는 해직 4년 2개월 만인 1984년 7월 한양대학교에 다시 복직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도 리 교수는 <분단을 넘어서>, <베트남전쟁 : 30년 베트남전쟁의 전개와 종결>, <역설의 변증 : 통일과 전후세계와 나'> 등의 책을 내놓았다.

1989년 4월에는 <한겨레> 창간 1주년 기념으로 북한 취재단의 방북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구속 기소됐다. 이로써 리 교수는 다시 6개월 여간 고초를 겪어야 했으나 정부의 탄압에 격앙된 독자들이 <한겨레>에 폭발적으로 성금을 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부교수로 두 학기 동안 '평화와 투쟁(Peace and Conflict)'이라는 제목의 특별 강좌를 열어 '한민족 현대정치 운동사'를 강의했다. 1988년 <한겨레> 비상임이사 및 논설고문, 1993년 통일원 통일정책평가위원을 지냈다.

리 교수는 지난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는 집필, 공개 발언 등을 자제해 왔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9년에는 "한국 사회가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서 있다"며 현 정부를 이례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현대 인권사의 제4기'로 규정하면서 "비인간적이고 오로지 물질주의적, 인권이 존재하지 않고 인권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파시즘의 시대 초기"라고 비판했다.
▲ 故 리영희 선생님 영정 사진. ⓒ프레시안(최형락)

리 교수의 장례는 4일장으로 민주사회장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졌다. 유족은 부인 윤영자씨와 아들 건일·건석씨, 딸 미정씨가 있다.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임재경 초대 <한겨레> 부사장, 고은 시인이 맡기로 했으며 고광헌 <한겨레> 사장, 박우정 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장 등이 집행위원장을 맡는다.

영결식은 8일 오전 6시 30분에 진행되며 리 교수의 영현은 오전 10시 경기 수원시 연화장으로 옮겨져 화장된다. 리 선생의 장지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로 잠정 결정됐다.


▲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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