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서울연극올림픽' 폐막작으로 오태석 연출(극단 목화)의 연극 '분장실'과 '춘풍의 처'가 공연됐다. 영웅은 없고 남루한 인생들이 모여 신나게 한 판 놀아보는 오태석의 연극에는 전통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 있다. 간이 딱 맞고 질감이 좋으며 오래될수록 숙성돼 입에도 달고 몸에도 좋다.
더 이상 '론論'이 무의미한 한국 연극계의 대가 오태석이 꾸준하게 선보이고 있는 두 연극 '분장실'과 '춘풍의 처'는 모양도 색도 다르나 관통하고 있는 뿌리는 일맥상통한다. 인간은 늘 공허하고 무언가 부재하고 있으며 삶과 죽음은 결국 한발자국 차이다. 당연하면서도 쉽게 수긍되지 않는 이 세계에 너무나 가볍게 닿아있는 그의 경지가 어느 때고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다. 그의 가벼운 터치 속에는 인생에 대한 철학이 있으며 애정이 있고 관객을 향한 배려가 있다. 유령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어깨가 힘을 빼도록 톡톡 건드린 뒤 삶의 기복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비극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슬픔을 껴안고 함께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한다.
분장실 잔혹사, 당신이 맡은 내 역할 돌려주세요!
사색과 유희, 환상의 열기로 가득 찬 연극 '분장실' 손을 펼쳐 다섯 개의 손가락을 보면서도 불가사리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고래라고 말하는, 얼굴에 기미가 낀 갱년기 여배우가 있다.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니나 역을 맡은 이 주연배우 주변에는 두 명의 무명배우가 서성거린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결코 오지 않을 배역을 기다리며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보던 두 배우는 모두 유령이다. 분장실이라는 공간이 연상시키는 구체적 사물들(화장대, 의자, 옷가지 등)이 있음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무대는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태연하게 공존시키며 전혀 기괴스럽지 않은, 유쾌한 소란의 공간으로 변한다. 베개와 배역을 교환하자며 '니나'를 돌려달라는 또 다른 여배우의 등장 역시 비현실의 세계를 추구하지만 놀랍도록 현실감 있다. 오히려 그로테스크는 죽은 자들보다 '잔혹함에 굶주려있다'고 말하는 살아있는 여배우의 독백에서 시작된다. 육체에 집착을 갖기 마련인 여배우는 배설의 공간이자 가장 사적인 공간 화장실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며 일그러진다. 큰 소리를 치거나 욕을 하는 정도의 호소가 아닌, 흡사 짐승이 돼 으르렁 거리는 소리로 태산같이 싸여있는 잔혹함을 외면하는 동시에 인정한다. 두려움과 고독, 외로움, 내적 고통의 극단적 표현은 유령보다 불안한 인간심리를 보여준다.
백 년 전에 죽은 안톤 체호프와 통화했으니 니나 역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젊은 배우는 주연배우가 휘두른 맥주병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간 뒤 다시 분장실을 찾아온다. 그리고는 두 명의 무명배우와 함께 '역할놀이'를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사건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세 귀신들의 덧없는 희망은 오히려 씁쓸하다. 태평양전쟁 이전과 이후에 각각 정신대 끌려가 폭발사고로 죽고 자살해 죽어 만난 이들의 몸에는 전쟁과 죽음, 삶과 운명 등 거대한 주제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녹아있다. 매우 짧은 시간, 매우 가벼운 컬러로 시대와 인생을 관통하는 연극 '분장실'은 고통스러우나 웃기다. 비현실적인 귀신들의 천연덕스러운 출연으로 오히려 현실성을 부여받은 연극은 미소를 가장한 집착으로 '당신이 맡은 내 역할을 돌려달라'고 떼쓴다.
달래야 달래야, 눈물과 한숨 껴안고 히히 웃으며 어디 가니!
통쾌한 해학, 신명나는 볼거리가 가득한 연극 '춘풍의 처'기생 추월에게 빠져 돌아오지 않는 춘풍을 찾아 그의 처가 길을 나섰다. 한바탕 신명나는 축제의 장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함께 어우러지며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희화화시킨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박치기면 가뿐하고 다시 불러오는 데는 엉터리 경이 전부다. 덕중은 스스로의 이마를 쳐 자살하고 여기 춘풍의 처는 죽고 살기를 반복한다. 언어의 영역을 벗어난 리듬감 있는 대사는 시공간을 극단적으로 함축시키며 사람과 미물, 생과 죽음, 정상과 비정상 등을 한데로 모은다. 웃음을 유발하는 춘풍의 처 심달래의 대사는 오히려 그의 내면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반증하며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남편에게 소박맞고 아들을 잃은 심달래는 길고 긴 아들의 죽음을 간단하게 읊는다. 첫째는 솔방울에 맞아 죽고 둘째는 미꾸라지 잡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셋째는 하도 귀여워 어르다가 경기로 풍에 걸려 죽는 등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 가장 요약적이고 희극적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인간과 미물,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듯 기생 추월과 심달래의 경계 역시 단번에 허물어진다. 죽어가는 심달래는 추월의 치마를 입고 그녀를 흉내 내며 추월로 오해한 춘풍과 성행위를 한다. 여기서 태어나는 생명은 바로 이춘풍이며 해소를 해야 함에도 새 생명은 전혀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삶, 거대한 인류, 자연의 순환구조를 형상화 하고 있는 심달래의 존재는 죽음조차 축제, 놀이로 만든다. 생략과 비약을 통해 탄생된 연극의 인물들이 우리를 자신들의 축제 한 가운데로 이끈다. 그곳에서 우리는 희극과 비극의 가운데서 차라리 한 판 놀고 마는, 그냥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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