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단 죽도록달린다 제공 |
슬픔과 싱그러움이 공존하는 김지현은 연기 폭이 꽤 넓은 배우다. 연극 '마르고 닳도록', '그자식 사랑했네', '양덕원 이야기', 'B언소', 뮤지컬 '김종욱 찾기', '스프링어웨이크닝', 영화 '이를 닦는다', '작은 연못', 4.19혁명 50주년 드라마 '누나의 3월', '돌아온 뚝배기', '제중원' 등. 다방 여종업원, 첫사랑을 찾아 나서는 엉뚱한 스물아홉 여자에서부터 방황하는 보헤미안 청춘까지, 모든 게 원래 제 모습인 듯 척 달라붙어 연기했다. 그리고 이제 뮤지컬 '왕세자실종사건'에서 중전 역을 맡아 궁궐의 여인이 돼 있다. 눈동자에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 고여 있으나 그녀가 활짝 웃으니 마음 싸하고 늘 허기지기만 하는 처량한 가을은 없고 빛깔과 향기가 새콤달콤한 살구의 가을만이 가득하다.
살구처럼 시린 사랑, 뮤지컬 '왕세자실종사건'
살구처럼 사랑스러운 배우 '김지현'
서재형 연출과 한아름 작가라는 이름만으로도 신뢰감을 주는 뮤지컬 '왕세자실종사건'은 평온하던 궁궐에 왕세자가 사라지며 시작된다. 연극을 모태로 한 이 작품은 극단 죽도록 달린다의 첫 뮤지컬 작품으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여기에 작곡가 황호준이 가세, 템포감 있는 극적 긴장감을 재즈, 클래식, 전통음악 등 다양한 선율로 표현한다. 이 감각적인 무대에 서게 될 배우 김지현은 힘든 연습으로 인해 분명 고단함에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배려를 보이며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냈다.
▲ ⓒ인터뷰 당시의 모습 |
아, 무대에서 예뻐 보이는 게 좋기는 한데 친구들도 사석에서가 그나마 더 낫다고들 한다.
Q. 중전 역을 맡았다. 중전 하면 왕의 사랑을 빼앗기고 쓸쓸하게 늙어가는 드라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뮤지컬 속 중전은 어떤가
기본적으로 외롭고 공허하다. 처음에는 온순하고 약한 모습도 보이나 왕세자를 잃어버리고 찾는 과정에서 오해 등을 통해 점점 독해진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음에도 안쓰러운 여자다.
Q. 중전의 외로움과 공허를 느끼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게 있다면
초반에 내가 제일 많이 헤맸다. 가볍게 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해 '엄마의 모습이 뭘까'를 많이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정서적으로 가라앉고 무거워졌다. 완벽히 알 수는 없지만 일곱 살 된 아들이 있다는 생각 아래 혼자서 왕세자와 대화를 하는 등 캐릭터와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Q. 왕의 마음이 몸종 자숙이에게 향하는 것 같은데 자숙이가 얄밉겠다
왕이 마지막에 자숙이를 붙들고 네가 정말 나를 배신했냐며 다그치는 장면이 있다. 나한테 미안한 자숙이는 눈을 피하는데 그 순간 '저게 또 연기를 하고 왕은 속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나더라. 자숙을 연기하는 배우 전미도 얼굴을 보라. 저렇게 귀엽고 순한 얼굴에서 도저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음에도 나는 그렇게 보이더라. 반면, 구동과 자숙을 보면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워 눈물이 난다.
Q. 분노하고 얄밉고 아들은 잃어버렸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숙은 불쌍한데, 심적으로 힘들지 않나
머리가 아프다. 계속 인상을 쓰고 있다. 자숙이와 함께 미간에 주름이 생길 것 같다고 농담 식으로 말한다. 연습이 끝나면 진이 빠지고, 힘든 기운이 가득한 연습실을 벗어나고 싶고, 우는 친구들도 많고. 밖에만 나와도 살 것 같다. 얼마 전 안산 공연 때문에 안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연습하고 녹음을 하기 위해 신림으로 이동한 적이 있다. 이른 시간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 그 시간에 밖에 나온 게 오랜만이었다. 배우들 모두 너무 신나 안산문화예술회관 광장에서 소리 지르고 팔짝팔짝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Q. 실제 중전이라면 어떨 것 같나. 궁궐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글쎄, 지금처럼 쉽게 이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다른 즐거움을 찾아볼 수밖에. 어떻게 해야 할까? 수를 더 열심히 놓고 가사 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하나. 술도 마시고(웃음). 연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기 배우 중 누구하나 그 궁궐에 놔두면 답답해서 죽지 며칠이나 살겠냐고. 나도 못 산다.
▲ ⓒ연습과정(극단 죽도록달린다 제공) |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수다도 많이 떨고 단순하다. 또 A형이라 소심하기도 하다. 우리 팀 여자들의 거의 다 A형이더라. 연습 끝나면 다들 '나 때문에', '내가 틀렸지' 이런다.
Q. 그렇다면 지금까지 맡아 온 역할 중 가장 성격이 비슷한 캐릭터의 작품은 무엇인가
김종욱 찾기. 그 작품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긴 시간 하면서 성격도 많이 쾌활해지고 수줍었던 예전과 달리 먼저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런 성격을 동경하는 편이었기에 바꾸려고 노력했다. 나 소심쟁이였다(웃음).
Q. 좋게 생각하려해도 여배우로서의 스트레스가 있을 것 같은데
살찌는 거? 하하. 살은 여배우의 숙명적 스트레스다. 캐릭터가 잘 안 잡히고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노래가 원하는 만큼 되지 않을 때 등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뮤지컬의 경우 꾸준한 목관리가 중요한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은근한 스트레스다.
Q. 그래도 계속해서 무대에 서고 꾸준한 호평을 받는다. 다른 장르와 달리 무대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
현장감에서 오는 희열. 배우가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부분에서 집중도 훨씬 잘 된다. 쉼 없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그것이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Q. 공연 중 실수도 있었을 텐데
얼마 전 안산 공연 첫날 첫 순간부터 술병을 두 번이나 떨어트렸다. 술잔을 드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연출님이 보셨을까, 관객들이 알았겠지, 배우들은 봤을까 등등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실수 하면 안 되는데.
Q. 안산 공연을 무사히 끝내고 이제 곧 서울 공연이다. 관객들과 무엇을 소통하고 싶은가
우리 뮤지컬의 타이틀처럼 '살구처럼 시린 사랑'이 있다. 세자가 없어진 가운데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놓치고 있다. 기본적 메시지와 함께 이 안에 녹아있는 사랑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연극을 뮤지컬로 만들다보니 아무래도 드라마가 강하다. 또한 일반적 사랑이야기지만 새로운 느낌으로 만날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이 가을에 보시기 참 좋은 작품이다. 많이들 보러 오셨으면 좋겠다.
▲ ⓒ프레시안 |
조선의 어느 날 여름 밤, 왕세자가 실종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던 중 최상궁의 진술로 인해 왕세자가 실종되었던 시간, 각각 처소와 근무지를 이탈한 나인 자숙이와 내시 구동이 용의자로 지목된다. 두 사람의 미스터리한 만남을 밝히려 취조를 하던 중, 이들 간에 숨겨진 진실과 이를 감추려는 방책들은 어느새 사건을 점점 본질과는 먼 곳 으로 몰고 가버린다.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도 사건의 본질 보다는 점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간다. 그 순간 살구처럼 시린 구동이와 자숙이의 순수했던 사랑이 순식간에 관객의 감성을 지배하는데….
연출 서재형은 연극 '왕세자실종사건'에서 필름을 거꾸로 돌려버린 듯한 역모션 플래쉬 백 연출기법과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감각적인 무대 디자인, 꼼꼼하고 세심한 조명 디자인으로 이미지의 통일성을 이뤄내며 호평 받은 바 있다. 이번 무대 역시 무대·조명디자이너를 겸해 일견 단순해 보이는 무대를 배우들의 동선과 연기, 노래, 조명과 효과음을 이용해 궁궐 내에 수많은 공간들을 만들어낸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대극장 뮤지컬의 막 전환보다 더 역동적으로 느껴지는 장면 변환을 경험하게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뮤지컬 '왕세자실종사건'은 2010년 10월 19일부터 11월 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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