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의 KBS 본부는 26일 오후 노조 명의의 대형 현수막을 회사 본부 건물에 거는 데 진땀을 빼야 했다. 노조원의 앞을 막아선 청원 경찰 60명의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 원하던 대형 현수막을 걸기는 했지만, 뒷맛은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KBS 노조, KBS 본관 앞에 한미 FTA 반대 대형 현수막 설치
노조는 상급단체인 전국언론노동조합의 결의에 따라 한미 FTA에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걸기로 지난 22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와 관련 최근 한미 FTA에 반대하는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바 있다.
대형 현수막에 들어간 문구는 "IMF 외환위기 10개가 한꺼번에 닥치는 게 '한미 FTA'입니다"였다. 이 현수막은 가로 10미터, 세로 8미터의 크기로 노조가 KBS 본관에 건 현수막 중 가장 큰 크기라는 것이 노조 관계자의 전언이다.
노조 측은 지난 23일 KBS 신관 건물에 같은 내용의 현수막을 부착했다. 이때는 청원경찰이 출동하지는 않았지만, 노조는 역시 웃지 못할 황당한 일을 겪어야 했다. 노조는 현수막을 걸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려고 했지만, 회사 측이 옥상 문 열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조의 최재훈 대회협력국장은 "노사협력팀에 전화를 하면 옥상 출입문 열쇠를 주는 것이 평소의 관례였는데, 이번 경우에는 달랐다"며 "결국 열쇠수리공을 불러서 겨우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노조 "정연주 사장, 정부 눈치보나" 의혹제기…사측 "불법 현수막, 철거해야"
노조측은 회사측이 대형 현수막 걸기에 제동을 걸고 나선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번도 노조 명의의 현수막이 걸리는 일에 대해 회사측이 막아선 선례가 없었다는 점이 이런 의구심을 특히 증폭시키고 있다. 조만간 임기가 만료되는 정연주 KBS 사장의 거취와 이번 사태를 연결짓는 의견마저 나온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정연주 사장이) 연임을 앞두고 정권 눈치를 보는 것일 수도 있다"며 "회사 내에서는 이미 정 사장이 과거 관제 사장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KBS 내의 분위기를 귀띔했다.
그러나 KBS 측은 이같은 의혹을 강하게 부정했다. 이번 사태는 '불법 현수막'을 마음대로 회사 건물 전면에 부착한 노조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회사측의 한 관계자는 "지정된 게시판에만 의견이 담긴 현수막을 걸 수 있다"며 "따라서 지정된 게시판이 아닌 다른 곳에 걸린 이번 현수막이 불법 현수막인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그는 "불법 현수막이 설치된 것에 대해 회사가 철거 요청을 하는 것은 부당한 요구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노조가 스스로 불법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회사측이 강제로 철거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월드컵 홍보 현수막은 되고, 한미 FTA 반대 현수막은 안된다니…
한미 FTA에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노조가 설치한 사건에 대한 논란은 KBS의 과도한 '월드컵' 홍보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됐다. 사측이 문제 삼는 노조 명의의 대형 현수막 옆에는 월드컵을 홍보하는 대형 현수막이 부착돼 있기 때문이다.
전국언론노조의 박강호 부위원장은 "월드컵 홍보용 대형 현수막은 괜찮고, 한미 FTA에 반대하는 내용의 현수막은 안 된다는 말에는 전혀 타당성이 없다"며 "KBS가 월드컵으로 이성이 마비되지 않았다면, 대형 현수막 철거 방침은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MBC는 이 회사 노조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설치하겠다고 통보해 오자 '노조 명의'만 분명히 해주면 전혀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현수막 철거 요구까지 하고 있는 KBS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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