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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녀인가?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김기영 감독과 임상수 감독의 <하녀>

I. 주인과 하녀의 탈근대적 역설

이창동 감독의 <시>와 함께 2010년 프랑스의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는 근대적인 영화비평가들의 평가와는 달리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영화가 아니다. 김기영 감독은 그의 영화 <하녀>를 통하여 1960년대의 대한민국 영화관객들에게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올바른 주인 노릇을 하라고 강요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의 영화 <하녀>를 통하여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혼재되어 있는 2010년 말기 근대의 대한민국 영화관객들에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인과 하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라고 질문한다.

이러한 탈근대적 영화의 질문을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녀인가?"라는 근대적 질문으로 곡해하여 "나는 주인이다"라거나 "나는 하녀이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관객들은 우리의 현실을 에워싸고 있는 가족과 교회, 직장과 국가를 포함한 근대적 국가장치들에 의하여 1960년대에 만들어진 김기영 감독의 <하녀>로 되돌아가서 자기 스스로 올바른 주인 노릇을 하라고 강요한다. 영화 이미지를 이미지로 사유하지 않고 교훈이나 계몽의 대상으로 추락시키는 이러한 근대적인 자체검열은 시대를 달리하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무차별적으로 비교하여 어느 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이분법의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 김기영 감독의 <하녀> 포스터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근대의 고전적인 "홈 코미디"의 장르영화이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오늘날의 대부분 영화들처럼 탈근대의 혼합장르영화이다. 근대의 고전적인 장르영화는 기독교화와 서구화와 산업화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영화 서사구조에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종속되어 있지만, 탈근대의 혼합장르영화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관계를 맺음으로 또 다른 그 무엇으로 생성되는 과정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탈근대의 혼합장르영화는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서사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스크린 이미지를 통한 관객들의 사유가 개별 관객들이 지니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현실에 따라 끊임없이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가족과 국가의 생산적 서사구조를 생성시킨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를 보면서 만들어지는 관객들의 새로운 서사구조는 "나는 주인이다"라거나 "나는 하녀이다"라는 근대적 이분법이 아니라 "나는 주인이기도 하면서 하녀이기도 하고, 하녀이기도 하면서 주인이기도 하다"라는 시간 이미지의 과정에 대한 사유의 이야기이다.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녀가 되는 것이고, 내가 하녀라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이 되는 탈근대적 역설이 생산되는 것이다.

II. "주인 되기"의 근대성과 "하녀 되기"의 탈근대성

▲ 임상수 감독의 <하녀>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는 주인공 동식(김진규 분)의 시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김기영 감독의 한계가 아니다. 아버지와 맏아들이 살아야 가족이 산다고 믿었던 1960년대 한국 근대화 과정의 한계이고,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서사구조 속에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를 종속시켰던 근대의 고전적인 장르영화의 한계이다. 장르영화의 규칙에 따라 김기영 감독은 동식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여주고, 그래서 1960년대 근대화 과정의 한국 사회와 가족의 "주인 되기"를 시도한다. 두 자식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인 동식의 시선에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려는 악마들이다. 심지어 부인(주증녀 분)과 하녀(이은심 분)는 이름조차도 없다. 하녀와 부인의 차이는 저급 하녀와 고급 하녀의 차이이고, 그 차이는 결혼이라는 합법적 장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동식 이외에 버젓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조경희(엄앵란 분)는 동식에 대한 애정을 숨기고 그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으며 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현모양처의 교양을 쌓는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이미지 그 자체로 돌아가면, 동식은 자본의 노예일 뿐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마찬가지로 1960년대의 근대 고전영화들은 가족과 국가를 핑계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들을 다룰 뿐이다.

▲ 임상수 감독의 <하녀>
김기영 감독이 <하녀>에서 주인 되기를 하는 것과는 달리 임상수 감독은 <하녀>에서 "하녀 되기"를 달성한다. 물론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 등장하는 스크린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중년의 가부장 동식(김진규 분)의 시선과 동식의 이야기이지만,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등장하는 스크린 이미지는 하녀, 은이(전도연 분)의 시선이 아니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마치 어느 도시를 여행하는 이방인이 그 도시를 바라보는 풍경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하녀 은이, 주인 남자 훈(이정재 분), 주인 여자 해라(서우 분), 나이든 하녀 병식(윤여정 분),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안서현 분) 모두의 시선이 뒤엉켜 있다. 임상수 감독은 이들이 만드는 시선들의 풍경 속에서 모든 관계들의 하녀 되기를 하는 은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은이와 어린 딸의 관계, 은이와 병식의 관계, 은이와 해라의 관계, 그리고 은이와 훈이의 관계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의 주인은 은이 뿐이다.

은이는 가족주의의 계율 속에서 권력의 노예가 되고 있는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로 하여금 세상을 자신의 시선으로 보도록 생성시키며, 같은 하녀이면서 주인 노릇을 하는 병식으로 하여금 직업적 관계와 인간적 관계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든다. 또한 관객들은 은이와 해라와의 관계에서 해라가 단지 근대적 가부장주의의 자식 낳는 기계, 즉 병식과 같은 고급 하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영화의 스크린 이미지가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처럼 은이가 훈이의 몸을 받아들이는 것도 또한 그녀가 하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성되기를 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미 이혼의 경력이 있는 그녀가 이전에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돈과 권력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랑을 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암시한다. 그러한 은이에게 이 세상의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은 아름다운 몸의 소유자 훈이는 얼마나 황홀한 이성적 관계의 대상이겠는가? 그래서 은이는 자신의 여성되기를 위하여 훈이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하녀 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하녀 되기의 섹슈얼리티는 근대 서구 유럽의 백인 남성이 아프리카의 흑인 여성에게서 발견하는 섹슈얼리티이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제국주의 백인 남성이 근대 식민지 인도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유색인 여성에게서 발견하는 섹슈얼리티이다. 이와 반대로 근대 식민지 아프리카 흑인 여성에게 아프리카 흑인 남성은 돈과 권력의 노예들이고, 근대 식민지 인도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유색인 여성에게 인도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성들은 식민지 지배 권력과 자본의 노예들로 보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에게 백인 남성의 아름다운 몸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남성의 섹슈얼리티로 보임에 틀림이 없다.

▲ <하녀>
그러나 은이의 여성되기가 지니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달리 훈이의 근육질 몸이 지니는 인위적 가공성은 임상수 감독의 카메라의 시선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진다. 마치 육체미 과시를 하듯이 상반신 나체로 한 손에는 와인 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서 와인을 가득 따른 와인 잔을 들고 은이 앞에 서서 권위적으로 은이를 내려다보는 훈이는 가부장주의의 권위적인 사디스트의 몸이다. 임상수 감독은 은이의 여성되기가 빗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래서 관객들은 훈이의 몸 아래에 있는 은이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훈이의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가 은이의 아픈 과거처럼 권력과 자본의 노예 이미지라는 사실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하나의 환상이고, 그 환상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 밝혀지듯이 영화 스크린 속에 있는 은이는 영화관객들처럼 훈이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의 폭력성과 파괴성을 보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근대 제국주의가 흑인 여성이나 유색인 여성들의 여성되기에 의하여 남성 되기의 생산성을 지니지 못하게 인종차별주의라는 제도로 여성되기의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근대국가 내부의 가족주의의 제도가 은이와 같은 여성되기의 여성들이나 남성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근대적인 모든 관계, 즉 친구와 연인을 비롯하여 가족과 사회, 종교 그리고 학교와 국가의 모든 관계에서 그 관계의 주인 되기를 하는 것은 은이와 같은 여성되기의 소수자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억압하는 근대적인 국가(사회) 장치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상수 감독은 나이든 하녀 병식이 하녀이면서도 주인 되기를 하기 때문에 주인보다도 더 나쁘게 은이의 여성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마침내 병식이 주인 되기를 때려치우고 은이와 친구 되기를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은이와 친구 되기를 하는 사람은 단지 병식만이 아니다.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은 은이의 하녀 되기, 즉 어린 소녀인 자기와 친구 되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성시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은이를 죽게 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라는 사실을 아주 뚜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마치 이창동 감독의 <시>(2010)에서 사랑하는 동료 선배에게 강간을 당하고 자살한 중학교 여학생 희진(한수영 분)이가 시인 되기를 하는 양미자(윤정희 분)가 되어 영화관객들을 노려보듯이, 해라와 훈이의 어린 딸이 생일파티를 마치고 갑자기 영화관객들을 노려보는 것은,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인인가?"하고 우리들에게 묻는 것은 아닐까? 당신도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주인 되기를 하면서, 하녀 되기를 하며 당신을 생성시키는 수많은 은이를 죽이고 있지 않은가?

III. "피아노"와 "와인"의 근대성과 식민지성


▲ 김기영 감독과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영화 스크린 이미지를 지배하는 진정한 주인은 피아노와 와인이다.

김기영 감독과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영화 스크린 이미지를 지배하는 진정한 주인은 피아노와 와인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주인공 동식을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피아노이고,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 자본가 훈이를 다른 일상적인 남성들과 구분하여 주인으로 만드는 것은 와인이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 가족주의의 근대성은 피아노를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었고,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업주의의 후기근대성은 와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는 우리의 음악문화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거문고나 가야금 혹은 징이나 북처럼 그냥 여타 음악 악기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와인도 마찬가지이다.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주인들은 와인을 술의 주인으로 섬긴다. 그러나 와인은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류문화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소주와 막걸리, 혹은 배갈이나 샤케와 같은 수많은 술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한 음악 악기들 중의 하나인 피아노와 수많은 술들 중의 하나인 와인을 음악과 술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근대성인 동시에 식민지성이다.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피아노와 와인은 바이올린이나 위스키로 변신하면서 우리들을 끊임없이 근대적 주인 노릇을 하는 식민지 노예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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