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에도 개각이 임박하면 이른바 하마평이 신문, 방송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곤 했다. 누가 어느 장관에 유력하다, 누가 총리 물망에 올랐다는 따위의 기사가 며칠 동안 보도될 만큼 취재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더러 오보도 있었지만 완벽하게 적중하기도 했다. 어느 장관이 어떤 사유로 경질될지, 후임은 누가 될지, 개각폭은 얼마나 넓을지 예측하기도 하고 후보에 대한 검증도 경쟁적이었다. 집권세력은 언론의 취재경쟁을 이용해 후보명단을 언론에 슬쩍 흘려 여론을 떠보기도 했다. 언론을 통해 인사검증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개각에서는 군사정권하에서도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언론이 일제히 개각인선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문 것이다. 현직 총리가 사퇴하여 개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졌고 언론 스스로 개각폭이 크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청와대의 엠바고(보도유예)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알아도 쓰지 않기로 담합했다는 소리다. 이것은 보도유예가 아니라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자율적 보도관제이다. 출입기자단이 임의로 엠바고를 설정해 국민의 알 권리를 박탈하고 인사검증을 포기한 것은 한국언론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는 심각한 문제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의 자발적 인사검증 포기?
엠바고는 대체로 네 가지로 나눠진다. 보충취재 엠바고는 사안이 복잡하고 난해하며 전문적이어서 주로 해설기사나 분석기사를 쓰는 경우이다. 발표내용에 대한 보충취재가 필요해 취재대상과 취재기자 사이에 합의에 의해 보도유예가 이뤄진다. 사건-사고의 발생이 확실히 예견되나 정확한 발생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발생 이후 쓰는 조건부 엠바고가 있다. 또 공익을 위한 엠바고가 있다. 국가안위 또는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경우 시한부로 보도를 유예하는 것이다. 그 밖에 외교관례 엠바고가 있다. 주재국 정부가 외교사절에게 아그레망을 부여할 때까지, 또는 국가간의 협정 따위를 양국이 동시에 발표할 때까지 보도를 보류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의 엠바고도 사전설명이 전제되어야 하고 보도시기가 유예대상이다. 그래야만 취재기자들이 해당사안에 대해 보도시기를 유예할 필요가 있는지 판단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 개각문제는 인선에 관한 어떤 설명도 없었고 정보도 없었다. 청와대가 개각에 관한 전반적 내용을 발표할 때까지 보도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기자단이 수용한 것이다. 보도시기를 포함해 개각에 관한 포괄적 보도관제를 청와대가 요청했고 기자단이 이에 동의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해 기자단이 청와대의 요청에 따라 자율적 보도관제를 실시한 것이다. 기자단이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고 권력을 감시-건제하는 언론의 사명을 포기한 셈이다. 청와대는 인선과정에서 또 다시 예상되는 '고소영', 'S라인'과 같은 인사파동을 회피하고 40대 총리라는 깜짝효과를 기대해 기자단에 보도관제를 요청했을 것이다.
한미FTA, 삼성떡값, UAE원자력 사업…반복되는 '보도 관제'
심각한 문제는 엠바고라는 이름의 보도관제가 반복적-임의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지난 6월 22일 청와대는 4일 후인 26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연기를 논의한다고 브리핑했다. 그 다음 청와대가 엠바고를 요청했고 기자단이 수용했다.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 방향과 천안함 사태를 고려한다면 일반인도 이 문제가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것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자단이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내일신문>이 엠바고를 파기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내렸다.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이 브리핑한 다음 일방적으로 엠바고를 선언했고 기자단이 나중에 수용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류매체가 지배하고 있는 기자단이 정권의 언론통제에 협조한 것이다.
2008년 3월 5일 오후 4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기자회견을 갖고 '삼성 떡값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1시간 빠른 3시께 자체 조사결과에 따르면 거명된 사람들이 떡값을 받았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논평했다. 문제는 사제단 발표 이전에 논평했고 발표 이후에 보도하라고 엠바고를 요청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기자단은 '발표 이전 논평'이란 사실을 보도한 YTN 기자들에게 춘추관 출입을 금지시켰다.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순방 중에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사실을 기업인 간담회에서 정부의 공식발표보다 먼저 밝혔다. 그런데 청와대 대변인은 협상타결을 보도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 대변인은 빼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발표시까지 보도자제를 요청했다고 반박했다. 그런데 기자단은 이 사실을 폭로한 코리아 타임스 기자를 징계했다.
UAE 원자력 발전사업 수주는 작년 12월 27일 막바지에야 엠바고가 풀렸다. 참여기업들이 많아 재계에는 널리 알려졌는데도 말이다. 홍보효과의 극대화를 노린 청와대 요청에 기자단이 협조한 것이다. 리비아와의 외교마찰은 발단초기에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 외교통상부가 6월 16일 엠바고를 요청했고 기자단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지언론은 한국인이 리비아에서 간첩활동을 벌이다 체포됐다고 크게 보도하고 있었지만 한국언론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26일 저녁 무렵 트위터에 그 한국인이 추방됐다는 사실이 유포되고 확산된 다음에야 엠바고 깨졌다.
미디어 환경 변화 외면한 시대착오적 착각
인터넷은 물론이고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유투브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온갖 정보를 네트워크를 통해 실어 나르고 퍼트리고 있다. 이런 쌍방향교신 시대, 1인 미디어 시대에 최고 권부에 안주한 기자단이 고급정보를 독점하고 있다고 믿고 엠바고를 남발하고 있다. 이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감지조차 못한 시대착오적 착각이다.
문제는 기자단이 담합을 통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유린하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이다. 누구도 언론인에게 그런 자격과 권리를 준 적이 없다. 언론은 권력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감시-견제해야 한다. 바로 이 언론인의 기본적인 사명을 방기한다면 스스로 언론인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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