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에 대한 논란의 전개과정은 매번 비슷하다. 어떤 선생님이 특정 학생에게 도를 넘어선 폭력을 행사하면 이를 다른 학생이 몰래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고,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돼 논란이 일면 해당 교사는 징계되고 체벌이 과연 옳은 것이냐는 논란이 들끓다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는 일이 반복됐다. 보다 발전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흥중학교 장경주 선생님이 현직 교사로서 현장에서 느끼는 점들을 담아 체벌 논란에 대한 제언을 기고해 소개한다. <편집자>
이상한 등식 "인권조례 문제제기 = 반민주세력?"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인간존중의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도 우려의 목소리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의 학생인권조례제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반민주세력으로 몰아붙이기 전에 학교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총체적으로 규명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학생인권조례가 적용되는 현실은 실험실의 통제된 상황처럼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취지와 달리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적용될 현재의 학교 상황이라는 맥락을 먼저 이해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가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하게 될지 그래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어떤 준비와 절차가 필요한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대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영향력 있는 정책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이 정도의 숙고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 한 학생이 찍은 학교 체벌 장면. ⓒ뉴시스 |
학교 안 인권침해의 두가지 얼굴
우리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침해되었던 많은 사례를 알고 있다. 교사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의적으로 행사되었던 폭력은 과거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학생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될 수 없이 제정되어 통제수단이 되고 있는 교칙이나 강제적인 '자율학습' 문제도 지적된다. 이와 함께 학생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는 금품 갈취, 폭행, 왕따 문제도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심각한 문제다.
지금의 성인들이 학교를 다닐 때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학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인권침해도 있다.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이 반찬이 맛이 없다고 학교 식당 아주머니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례도 발생한다. 의도적인 수업방해 행위를 포함하여 교사들이 소수의 거친 학생들로부터 당하는 욕설이나 폭력도 이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정면으로 해결해야 할 학교에서의 인권침해 사례가 되고 있다.
우리는 우선 학교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세분화할 필요성을 느낀다. 학교와 교사가 학생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복장규정 등의 교칙을 제정하여 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했다는 것과 일부 교사들이 지위에서 오는 권위를 이용하여 자의적으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한 부분이다. 이는 학생인권조례가 바꾸고자 하는 현실이다.
또 한편 학교에는 '학생과 학생'간에 발생하는 폭력이 있고 의도적으로 수업진행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학교 선생님들의 역할은 정의로운 심판자이고 벌의 집행자이기도 하다. 누가 잘못했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벌을 준다. 이 때 우리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교육적 체벌을 일정정도 허용해 왔는데 여기서 교사의 체벌수위가 폭력 수준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학생인권조례에서는 체벌자체를 아예 금지하도록 하고 있다.
'때려서라도 함깨 간다' 온정주의의 교체
그런데 계속되는 수업 방해, 지도받을 때마다 교사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학생들,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학생들이 특히나 의무교육 기간인 초등학교, 중학교에 있고 지속적인 지도에도 불구하고 이에 불응할 때 교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학교에는 여기에 대한 대책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현재 의무교육 과정으로 정학이나 퇴학조치를 할 수 없다.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이수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를 저지를 학생들에게는 처벌의 의미가 없는 시간 때우기의 의미로만 다가갈 수도 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가해자 학생의 학부모까지 억지를 부리는 경우에는 교사와 학교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현재의 학교에서 격리시킴으로써 반성을 유도할 수 있는 전학의 경우에도 학생과 학부모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 학교에서 강제로 보낼 수는 없다. 이런 학생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지도받는 과정에서 교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때리려면 때려보라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교정적 정의를 위해서 실시하는 벌도 '인권'의 관점을 고려한다. 말하자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의 의미가 아니라 교화적 차원의 교정을 추구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체벌'은 인권의 관점에 맞지 않고 자의적인 폭력의 우려가 높기 때문에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학생에 대해 그 행위를 공동체에서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즉 교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랑이의 폭력이 무서워 이빨이며 발톱은 뽑았는데 정의를 실현하는 힘이 필요할 때조차 호랑이는 무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대다수 교사들이 우려하는 지점은 인권의 관점에서 체벌금지를 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소수 거친 학생들의 인권침해를 막기 위한 방법 즉 교정적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막나가는 학생에 대해서 제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고 속수무책이라면 나머지 선한 학생들이 피해를 볼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 막나갈수록 학교나 선생님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학습효과를 일으키게 됨으로써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사의 최소한의 권위조차도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
호주는 체벌이 없다. 한국의 교사들이 체벌을 한다고 하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사들은 체벌금지를 하자고 하니 분노한다. 우리나라 교사들이 원래 폭력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호주의 경우, 교사의 정당한 교육적 요구를 3번 불이행하는 경우 퇴학의 조치가 내려지기 때문에 교사가 '체벌'이라는 양날의 칼을 가지고 위험천만한 지도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교사가 체벌을 사용하지 않아도 학교의 규율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는 한편으로 교사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려서라도 데리고 간다는 온정주의의 전통은 학생들을 위해서도 교사들을 위해서도 이제 합리적인 '정의'의 제도로 교체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오늘부터 전면 체벌금지령을 모든 학교에 내려 보내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동안 자의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던 일부 교사들의 행동을 일시에 제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사람들의 취지와 달리 위에서 말한 소수의 거친 학생들이 휘젓고 다니는 무법천지의 교실이 되는데 일조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데 교사들은 우려하고 있다. '인권'을 확대하고자 만든 '인권조례'가 오히려 '인권'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거부감만 확대시켜, 인권에 관한 논의의 저변을 축소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나, 학교 현장에 인권 논의의 장을 만들어 주자
학교에 인권의 꽃을 피우고자 할 때 농부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그 씨앗이 자랄 토양의 상태는 어떠한가. 물과 볕이 잘 들 수 있는 환경인가. 씨앗을 뿌리기 전에 '이해'해야 할 것과 이에 따라 '필요한 조건'들을 준비해야 한다. 아주 기초적이고 철저한 고민과 정교하고 치밀한 정책 입안, 조심스런 정책 집행의 과정이 필요하다. 진정한 변화는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래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원칙이라도 상급 관청에서 정한 원칙을 학교의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고려와 준비없이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그동안 '선진적'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었던 다른 많은 교육정책과 마찬가지로 의도한 바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럼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학교 현장에 인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자. 현재 일선교사들이나 학교 행정담당자들도 인권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은 행정명령으로만 형성되지 않는다. 현재 대부분의 교사들은 권위적인 학교를 경험했고 다른 대안에 대한 상이 뚜렷하지 못하다. 권위적인 학교 아니면 아노미다.
교사들이 인권에 대해 배우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인권교육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사를 포함한 다른 교직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자-교사일수도 있고 학생일수도 있다-에 대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학생들을 존중하면서도 정의가 살아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대안들을 만드는데 학부모도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교육과 토론을 병행하여 학교에서 인권의식을 반영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교칙을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함께 제정하는 과정 자체가 인권의 토양을 다지는 교육과정이 될 수 있다.
둘, '체벌'을 넘어 학생참여를 통한 집단 규범의 형성으로
학교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너무도 규칙을 지키지 않아 생활지도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매점에서 사먹은 빵의 봉지는 뜯는 순간 바로 복도에 버려진다. 다 마시고난 음료수 깡통은 창틀에 얹어 놓는다. 선생님들에게 들켜 지도를 받으면 치우지만 그것도 순간이다. 복도 정돈을 맡아하시는 아주머니가 계속적으로 돌아다니시면서 치우지 않으면 학교는 쓰레기 투성이가 될 것이다. 점심시간에는 먹는 순서를 정해 놓았지만 새치기를 하거나 다른 친구들 몫의 음료수나 과일을 슬쩍 더 가져가는 행위도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쓰레기통을 비우러 가기 싫어 2층 복도 창문에서 처마위로 부어버리고 있는 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평소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아이들이 아니라 보통의 아이들이다. 교실이나 복도에서 침을 뱉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행위를 하는 학생들도 다른 급우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들에게 걸려 혼나지만 않으면 그만 일 뿐이다. 이런 행위들을 싫어하는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강력하게 지도해주길 바란다.
학생들에게는 교칙이라는 것이 외부적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그것에 문제제기를 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따르기만을 요구받아왔다. 도덕을 포함한 규범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제기는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스스로 형성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위부의 권위에 의존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분위기속에서 당연한 것이다. 이제 교사들에게 남은 실오라기 같은 권위로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들과 함께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과 규칙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함께 하고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규칙을 교사 혼자서 정해서는 안 된다. 규칙을 만드는 과정은 토론과 합의의 과정이다. 모두가 빨리 먹고 싶어 하는 급식을 먹을 때 어떻게 순서를 정하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를 학급 단위로 논의해 볼 수 있다. 함께 정한 규칙을 어긴 친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도 결정하면 어떨까. 이렇게 되면 교사 권위에만 의존하던 규칙이 또래의 집단 규범이라는 권위아래 힘을 받게 된다.
아이들의 욕구를 반영하여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규칙과 벌칙을 정하는 과정은 아이들을 자율적인 존재로 키우는 과정이 될 수 있다. 함께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만든 교실 규칙은 이를 위반하는 학생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를 어긴 친구들은 이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학교 단위의 규칙을 정할 때도 교사들만이 아니라 학생들과 학부모가 함께 모여 만든다면 교사 권위에만 의존한 규범이 아니라 공동체의 집단규범으로서 보다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변화를 방해하는 또다른 조건들
체벌은 매우 짧은 시간만을 요구하는 '효율적인' 교정의 방법으로 사용되는 측면도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일단 강제적 '제지'의 효과를 가졌었다. 학생들을 효율적인 방법에 기대어 훈육의 대상으로 대하기보다는 '상담'을 통해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에 익숙해지기 위한 교사 상담기술교육도 필요하다.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고 '상담'을 통한 문제해결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학교 교사들은 컴퓨터를 바라보며 보고할 문서들을 만드는데 지나치게 바쁘다. 학생들과 상담하고 대화하는 시간은 갈수록 일의 '효율성'에 밀려 줄어들고 있다. 행정당국은 교사업무를 면밀히 연구해보고 학생 교육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업무들을 교사들과의 논의를 통해 과감히 줄여나가야 한다. 교사들은 스스로 학생들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통제와 군중심리가 작동하는 공간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학급당 학생 수도 줄여가야 한다.
내가 자랄 때 다니던 80년대 학교와 지금 2010년의 학교에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짚어보자. 학교 행정이나 교칙에 학생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 "하이, 경주샘"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들은 과거보다 선생님들을 가까울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권위주의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사의 권위 자체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변화를 나는 다른 직장에 다니다가 서른이 넘어 학교에 교사로 다시 돌아와서야 알 수 있었다. 80년대의 기억에만 의지하여 2010년 오늘의 학교를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자. '권위주의'가 아닌 존중과 배려가 있는 '권위'는 학교에서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학교에 던져진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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