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은 TV 중계를 통해 경기를 지켜본다. TV 속에는 32개 국에서 출전한 축구선수들이 뛰어다니고 있지만, 화면 뒤에서 이들보다 더 열심히 뛰고 있는 이들이 있다. 바로 FIFA와 더불어 'FIFA가 뽑은 15명의 정예선수' 2006 독일월드컵의 공식 후원업체들이다.
"월드컵의 새 규칙: 그 바지 벗어라. 후원업체 아니다"
지난 17일(한국시간) 슈투트가르트에서 치러진 C조 네덜란드와 코트디부아르의 경기를 관람하려던 네덜란드팀 팬들은 바지를 벗고 속옷만 입은 채 응원을 해야 했다.
이유는 한 가지, 이들이 입고 있던 가죽바지에 FIFA의 공식 후원업체가 아닌 네덜란드 맥주회사 바바리아(Bavaria)의 상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FIFA는 네덜란드 축구팬들이 게임을 보려면 후원업체의 경쟁사 로고가 박혀 있는 바지를 벗고 관중석에 입장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네덜란드인들은 바지를 벗어서 큰 화물함에 던져 넣었고, FIFA는 경기가 끝난 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바지들은 쓰레기들과 뒤섞인 채 버려졌다.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한 네덜란드인은 "우스꽝스럽다. 입장하기 위해 25분 동안 줄지어 기다렸는데 맨 앞에 갔을 때 직원이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난 바지를 벗어서 이미 입장한 친구들에게 담장 너머로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직원이 와서 이를 저지하고는 바지를 가져가버렸다."고 전했다.
바지를 입고 경기를 볼 수 있었다는 또 다른 네덜란드인은 "난 다행히도 굉장히 긴 길이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행운을 소개했다.
네덜란드 팬들은 자국 내에서 바바리아 맥주 12캔을 사면 7.95 유로에 이 바지를 살 수 있었다.
1000명이 넘는 네덜란드 팬들에게 바지를 벗게 한 이번 결정을 두고 FIFA가 후원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취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FIFA 측에서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앰부시(ambush) 마케팅'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한편 잉글랜드팀의 팬들 또한 지난 16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경기에 입장하기 전 나이키 옷을 입구에서 건네줘야 했다는 진술이 제기됐다. 아디다스가 공식 후원업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FIFA는 압수 사실을 부정하며 "월드컵 응원에서 '개인적'으로는 어떤 옷을 입어도 문제가 없지만 단체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현재 이번 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과 FIFA를 옹호하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양 쪽 모두 후원업체들이 이제 국제적인 스포츠행사에서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한편 명실상부하게 세계적으로 가장 큰 스포츠 행사가 된 월드컵을 두고, 후원업체에 관한 갖가지 논란도 뜨겁다.
"난 그 음식을 안 좋아해!" ('I'm not lovin' it!')
지난 17일, 영국의 권위있는 의학잡지 <란셋>에는 "FIFA가 탄산음료와 패스트푸드, 그리고 주류 회사의 후원을 받아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영국의 공중위생 전문가인 제프 콜린(에딘버그 대학)과 로스 맥켄지(런던 대학)는 "버드와이저, 맥도날드, 코카콜라와 같은 후원사들이 이번 월드컵의 공식 후원업체에 포함되어 있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며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월드컵과 올림픽, 그리고 다른 대형 스포츠 행사들이 가지고 있는 '건강과 복리 이미지'가 주류 남용 및 비만, 그리고 갖가지 질병을 불러일으키는 제품들 때문에 훼손당하게 내버려두어선 안 될 것"이라며 주의를 주었다.
이들은 특히 올해 FIFA가 건강 대책에 있어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1982년과 86년 월드컵에서 담배업체의 후원을 받던 FIFA는 그 후 2002년까지 담배업체 후원을 일체 받지 않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금연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월드컵 경기장 내 금연' 정책이 기각됐고 경기장의 공식 판매대에서는 라이터와 재떨이가 팔리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FIFA와 기업 간의 이런 관계가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FIFA가 계약을 맺을 때 건강 증진 협약도 함께 맺는 등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본이란 공을 쫓는 FIFA와 후원업체들
FIFA가 이 같은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식 후원업체를 선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공식 후원업체들이 쏟아내는 어마어마한 후원금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FIFA의 후원업체가 되는 조건으로 이 기업들은 각각 4000만 달러를 FIFA에 지불했다. FIFA는 6개의 독일 내 후원업체 및 15개의 공식 후원업체가 총 8억8200만 달러를 냈다고 밝혔다.
올림픽과 달리 경기장에도 홍보간판을 걸 수 있는 월드컵은 기업들에게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이다. 후원업체로 선정되면 이들은 월드컵 기간 동안 각종 홍보 이벤트를 펼칠 수도 있다. 올림픽 공식 로고 사용이 거의 유일한 권리로 행사되는 올림픽 공식 후원에 반해 월드컵 후원은 그 광고효과가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업체들이 천문학적인 광고료를 월드컵에 투자하는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월드컵 후원업체를 노리는 경쟁사간의 싸움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FIFA는 같은 업종에서 2개 이상의 업체를 선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월드컵을 후원해 왔던 마스터카드(MasterCard)는 비자(VIsa)사에 2007년 이후의 후원업체 자리를 빼앗기자 "빼앗긴 권리를 다시 찾겠다"며 FIFA를 고소하기까지 했다. FIFA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후원업체는 6개로 줄어들지만 후원 액수는 오히려 11억4000만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올해보다 40% 가량 증가한 액수다.
이쯤 되면 과감한 투자액만큼 과감히 본전을 뽑겠다는 후원업체들의 속셈도 쉽게 헤아려볼 수 있다. 스포츠 홍보 대행업에 종사하는 큐리(Currie) 씨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월드컵 후원업체들은 많은 돈을 냈고 그들에게는 TV 광고노출이 생명이다. 만약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음료수를 마시는 것이 화면에서 비춰진다면 후원업체로서는 좋을 게 없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한다.
"후원업체들의 돈이 없으면 경기 개최가 불가능하다"는 FIFA의 주장은 축구 선수들보다 더 재빠르게 움직이는 후원업체와 FIFA의 끈끈한 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나날이 증가하는 투자액은 정말 모든 축구팬들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경기장 입장권 판매액의 14%가 후원업체에게 다시 돌아가고, 8%만이 해당 국가 축구협회에게 돌아가는 현실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
전 세계의 축구팬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월드컵, 그 가운데에서 자본이라는 공을 쫓아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있는 FIFA와 후원업체들에 대한 따끔한 관전평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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