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대선기간 중에 여러 차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가 소속한 민주당도 노동조합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어 반대했다. 부시가 추진한 한미 FTA를 폐기할 뜻을 비치던 그가 집권중반에 들어서 비준 쪽으로 돌아섰다. 이명박 정권이 비준을 집요하게 요구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시아 국가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그의 정책변화에 기인한다.
오바마는 출범 초부터 최초의 태평양 대통령을 자임하고 나섰다. 하지만 중국, 일본,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가 오히려 악화된 측면이 있다. 북한과는 부시 이후 한 치의 진전이 없다. 그 까닭에 한국과의 안정적 관계유지가 중요하다고 판단해 천안함 사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연기, 한미 FTA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오바마는 11월 중간선거 이전까지 한미 FTA를 매듭짓는다는 방침이다. 오바마는 한미 FTA 중에서 자동차 분야에 대한 불만을 자주 토로해 왔다. 미국 의회는 연령, 부위의 제한 없는 쇠고기 수입을 주장해 왔다. 이 점에서 한미 FTA 재협상이 대두되면 자동차와 쇠고기가 최대쟁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자동차, 쇠고기 분야에서 한국이 더 이상 양보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배기량에 따른 누진세제인 특별소비세와 자동차세가 지난 20년간의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 형해화됐다. 미국의 대형 승용차에 유리하도록 세제를 뜯어 고치는 바람에 대형차와 소형차의 세율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쇠고기도 미국 의회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국민건강권 침해에 반발하는 제2의 촛불사태를 촉발할 만큼 휘발성이 강하다.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다시 들여온다?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파동이 일어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금지됐다. 3년반이 지난 2005년 6월 노무현 정권이 국민적 논의도 없이 불쑥 한미 FTA 협상 4대 선결조건의 하나로 쇠고기 수입을 재개했다. 소의 두개골, 척수, 편도, 내장 등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을 빼면 생후 30개월 미만 살코기는 안전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검역과정에서 갈비뼈가 상자째로 나오고 위험물질인 척추가 검출되는 소동이 반복됐다. 그래서 2007년 10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검역이 중단됐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4월 첫 미국방문 길에 그 빗장을 모두 풀어버렸다. SRM을 제외하고 연령제한 없이 모든 부위를 수입하도록 문을 활짝 연 것이다. 광우병의 원인물질로 알려진 프리온(prion)은 주로 소의 뇌, 안구, 편도, 척수, 두개골, 내장 등에 특정부위에 분포되어 있다. 그 이유로 뼈 부위와 내장은 수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광우병의 잠복기간은 소의 경우 3년이라 수입기준을 출생 30개월 미만 뼈 없는 살코기로 제한했던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은 국민건강권과 검역주권을 주장하는 촛불시위라는 국민적 저항에 부닥쳤다. 다급해진 이 정권이 미국한테 매달려 얻어낸 민간자율규제라는 임시조치에 의해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금지된 상태다.
지난 5월 미국 상원은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멕시코, 베트남 등 7개국을 겨냥해 모든 연령대의 쇠고기와 그 부산물을 제한 없이 수입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는다면 미국 의회에서 한-미 FTA 비준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 정권은 전경의 곤봉이 촛불을 껐다고 믿을 테지만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를 일이다. FTA를 빌미로 미 상원의 요구대로 무차별적인 수입을 허용한다면 다른 나라와의 평형성 논란을 일으켜 저항을 부를 것이다.
일본은 뼈, 내장 등 광우병 위험물질을 제외한 20개월 미만의 살코기만 수입을 허용하고 있다. 대만과 홍콩은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살코기만 수입하고 있으며, 모든 연령에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을 반드시 제거하도록 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멕시코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회원국이지만 30개월 미만으로 제한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의 강압에 의해 쇠고기 수입제한을 푼다면 FTA를 맺는다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강요당하는 꼴이 된다.
고기를 먹기 위해 사육하는 비육우는 30개월 이상 키울 이유가 없다. 20개월 이상 사육하면 생산량에 비해 생산비가 더 든다. 다시 말해 소를 20개월간 사육하면 거의 다 자라 사료투입에 비례해 고기가 생산되지 않는다. 20개월 이상 키우면 키울수록 손해인 것이다. 미국에서도 주로 20개월 미만의 송아지 고기(veal)를 먹는다. 햄버거도 송아지 고기로 만든 빌버거(vealburger)를 많이 먹는다. 30개월 이상이라면 젖소가 아니면 씨받이 암소라 고기질이 나쁘다. 모든 부위를 수입하라는 압력은 한국인이 뼈와 내장을 즐겨 먹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이 안 먹는 내장과 뼈를 팔아먹겠다는 소리다.
미국의 압박에 형해화된 특별소비세
미국은 1990년대부터 자동차를 많이 수입하라고 온갖 통상압력을 동원해왔다. 한국정부가 나서 미국차에 대한 잘못된 사회인식을 바로 잡아라, 지도층이 미국차를 타도록 독려하라 등등 집요하게 압박해왔다. 한국정부가 시장개입을 통해 수요창출을 독려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가 실현될 리 없다. 그러자 미국은 배기량이 큰 자국산 승용차에 유리하도록 관련세제의 누진제를 없애는데 통상압력을 집중해 왔다.
1994년에만 해도 배기량 2000cc 이상 승용차의 특별소비세 세율이 65%이었다. 그 해 미국의 통상압력에 눌려 세율을 25%로 한꺼번에 40%나 내렸다. 대형차 세금을 크게 내려 미국차가 많이 팔리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입관세도 내리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그해 10%에서 8%로 인하됐다. 이와 함께 7,000만원 이상 고급승용차에 물리던 15%의 취득중과세도 없앴다.
세금인하로 대형 승용차의 값이 싸졌지만 미국차는 안 팔리고 그 대신 유럽차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됐다. 그래도 미국은 특별소비세를 물고 늘어졌다. 1년만인 1995년 또 세율을 25%에서 20%로 내렸다. 자동차세도 대형 위주로 대폭 인하했다. 2500~3000㏄는 1cc당410원→310원, 3000㏄ 이상은 1cc당 630원→370원으로 무려 41.3%나 내렸던 것이다. 대형차 세금이 크게 줄자 대형차 수요가 급팽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차에 대한 시장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미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통상압력을 가중시키기 위해 1997년 10월 통상법 수퍼 301조를 동원해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관행(PFCP)으로 지정했다. 결국 다음 해 자동차세 세액구간을 7단계에서 5단계로 축소하고 세액도 대형차에 더 유리하도록 크게 내렸다. 중-대형차의 세금이 같도록 2000㏄이상을 동일한 세액구간으로 묶어 단일화한 것이다. 세액도 1cc당 200원으로 인하했다. 이 세제개편으로 인해 수입차 수요가 급증세를 보이면서 자동차 시장이 대형차 위주로 개편됐다. 하지만 미국차는 시장에서 여전히 외면당했다.
그 이후에도 미국은 특소세를 트집 잡고 늘어졌다. 노무현 정권도 그 압력에 눌려 2003년 7월 특소세율을 또 내렸다. 당시 세율구간은 3단계였고 세율은 2000cc 이상 14%, 1500~2000cc 10%, 1500cc 이하 7%였다. 그런데 세율구간을 2단계로 줄이고 세율도 2000cc 이상 10%, 그 이하는 5%로 인하했다. 억대를 자랑하는 고급수입차는 세율이 10%인데 100만원대의 에어컨은 16%나 되는 엉터리 세제가 되고 만 것이다.
FTA 협상과정에서도 미국은 특소세 인하를 압박하여 또 다시 내리는데 성공했다. 3년에 걸쳐 2단계인 세율구간을 없애 5%로 단일화한다는 것이다. 억대 수입차나 천만원 짜리 경차나 같은 세율을 적용한다는 소리다. 자동차세도 5단계를 3단계로 축소한다. 중-대형차를 가리지 않고 1600㏄ 이상이면 같은 세금을 물린다는 것이다. 부자에게 감세잔치를 베푸는 꼴이다. 세수감소액만도 한해 4000억원이나 된다.
특별소비세는 1977년 7월 부가가치세와 함께 시행됐다. 부가가치세는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단일세율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 소득격차와 상관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역진성(逆進性)을 보완하기 위해 특별소비세를 동시에 도입했던 것이다. 고가-사치품에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소득재분배에 기여하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하여 그 때마다 억지로 뜯어고치는 바람에 그 취지가 반대로 변질되어 2008년 세명도 개별소비세로 바뀌고 말았다. 이제 세제를 통해 더 이상 미국차에 유리하도록 양보할 여지가 전혀 없다.
자동차는 클수록 도로를 더 차지하고 도로도 더 파손한다. 대형차는 배기량이 크니 대기도 더 오염시킨다. 수혜자 부담원칙과 응능부담 원칙에 따라 큰 차가 마땅히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누진과세의 원칙에 따라 고소득자에게는 높은 세율을, 저소득자에게는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형차에 대한 잇따른 감세조치에 따라 대형차가 급증함으로써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을 더욱 심해지고 있다. 세제가 거꾸로 가기 때문이다.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해 조세주권과 환경주권을 내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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