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가 일주일 동안 사막을 걸어 낯선 마을에 도착했다. 쇠락해가는 마을에는 그토록 찾던 큰아버지가 없다. 이 연극은 계속해서 길을 떠나는 세 자매, 세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혹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세상 가득한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다. 입 안에 들어찬 사막모래의 서걱거림과 홍차의 맛이 느껴지는 연극 'someone on a journey'가 세 자매를 내새워 우리에게 길을 묻는다. 이어 낯선 이방인에게 따뜻한 차 한 잔 건넬 것을 조심스럽게 부탁한다.
연우소극장 매표소 안내 직원은 '자막이 없으니 줄거리를 필히 읽어달라'는 불친절한 내용을 친절하게 말한다. 극단 노뜰과 일본 교토의 아틀리에 게켄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에는 일본배우와 한국배우가 함께 출연한다. 기막힌 것은 서로가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다. 무대 위 그들은 일본어로 묻고 한국어로 대답하며 한국어로 부탁하고 일본어로 거절하는 상황을 반복한다. 간간히 들리는 반가운 우리말로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대사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고로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감정의 세밀함을 오롯이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한국어만을 사랑하고 주장했던 자신의 고집을 탓할 필요는 없다. 들리는 건 '아리가또' 뿐일지라도 우리는 충분히 그들의 현재를 공유할 수 있다. 공허한 눈빛과 지쳐 늘어진 어깨, 불안한 목소리, 좁은 공간에서의 방황 등은 극을 관통하며 나지막한 그리움의 감성을 전한다. 오히려 서로 다른 언어는 이방인의 낯섦을 확대시키며 소통과 이해의 절박함을 호소한다.
세 자매의 여행에는 '여행'이라는 단어에서 기대할만한 설렘은 완전히 배제된 채 낯섦만이 존재한다. 전쟁의 혼동에서 정신을 차릴 무렵, 세 자매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한다. 이것을 예측한 아버지는 죽기 전, 큰아버지를 찾아간 후 바다건너 동쪽에 있는 고향을 향해 떠나라고 말한다. 기억에도 없는 고향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큰아버지를 만나야한다. 서로를 의지해 황야 속 마을에 도착하지만 아버지가 일러준 집은 큰아버지의 집이 아니다. 만연한 피로와 당황 속에 느닷없이 한 여자가 나타나 자신도 자매라며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꺼낸다. 낯선 집의 낯선 주인과 낯선 변호사, 또 한 명의 낯선 자매(?)의 한바탕 난리가 끝날 때 쯤 더욱 낯선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 역시 자매라고 우긴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인원은 단 세 명. 함께 사막을 건넌 세 자매는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할만한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서로의 기억은 불확실하다. 엉키고 엉켜 결국 누가 진짜 자매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바다는 점점 깊어지고 고향은 멀어진다. 각자의 환경에서 자랐지만 비슷한 머리에 비슷한 옷차림의 그녀들은 무너져가는 희망의 모래성 아래 한 덩어리로 묶인다.
히피적 감성과 삶에 대한 애절한 호소가 묘하게 조화된 연극 'someone on a journey'는 인물들만큼이나 낯설다. 연극은 한 장소만을 무대로 한다. 시종일관 어두운 그곳에는 친절과 의심이 교차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들이 일순간 무너진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어딘가에 있다. 예기치 않게 그 존재들과 맞닥뜨리게 된 세 자매는 흩어진다. 몸이 약한 첫째는 홀로 그곳에 남기를 자처한다. 셋째는 그곳에서 만난 소년과 함께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이제 둘째와 낯선 두 자매가 바다 건너기를 시도한다. 연극은 그들이 고향을 찾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구차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여행이란 게 의례 그렇듯, 삶이 그렇듯 계획대로 되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길을 잃는다. 동행자와 헤어지고 낯선 일행을 만난다. 발자국의 여백마다 어쩔 수 없는 고독이 그림자처럼 함께한다.
연극 'someone on a journey'는 '일본의 부인'이라 불리는 할머니들이 있는 나자레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 공통의 역사가 남긴 작고 연약한 생명들, 그럼에도 강한 존재에 대한 애정 등을 이 시대의 감성으로 풀어냈다. 극이 끝날 즈음 모두가 함께 모여 만찬을 즐기는 상상의 장면이 소리 없는 슬로우 동작으로 표현된다.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긴 이 작품에서는 어둠을 밝힌 작은 조명 빛처럼 희미한 희망이 새어나온다. 작지만 선명하고 흔들리지만 분명 무엇을 밝힌다. 과거를 읽고 위로하며 현재를 살기 원하는 이 작품이 창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작은 빛과 다르지 않다. 기억에도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명확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선천적 그리움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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